상단여백
HOME 칼럼 칼럼
백척간두에 선 자에게 응답하는 신앙[주님 공현 대축일 후 수요일] 1요한 4,11-18; 마르 6,45-52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시기 때문에 우리도 사랑하면 하느님 안에 사는 것이 됩니다. 물론 사랑을 가로막는 방해물도 있고 노골적으로 방해하는 적도 있습니다. 우리가 현세의 인생을 살면서 이기심과 욕심으로 마귀의 유혹을 받을 때나, 또 심리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두렵거나 불안한 상황에서 마음이 자꾸만 움츠러들 때에도 사랑하기가 힘듭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도 사랑으로 대처하면 최후의 심판 날에도 그 사랑의 용기로 인하여 상급을 받을 것이 확실합니다. 그래서 모든 경우에 사랑이 답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사랑하며 살아가지 않습니다. 사랑은 자기를 희생하는 것인데, 세상 사람들은 자기를 희생하기는커녕 자기를 위해 다른 사람들을 이용하고자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위해 살아주기를 바랄지언정 그들을 위해 희생하기는 싫어합니다. 그렇게 세상 사람들 각자는 자기중심적으로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가치관으로만 판단하자면 세상 사람들은 각자가 우주의 중심인 것처럼 살아갑니다. 그러나 모두가 중심일 수는 없기 때문에 모두가 모두를 상대적으로 대합니다. 하느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이 절대적인 가치 기준을 부인하면서 각자 살아온 인생 내력을 기준으로 세상과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사진출처=pixabay.com

분명히,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하여 돌아가지는 않습니다. 각자는 다 나름대로 자기 인생에서 최선의 선택을 거듭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주가 지구를 중심으로 하여 회전하는 것이 아닌 이치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지구에 사는 우리는 지구에서 보이는 것을 기준으로 판단할 수 밖에 없듯이, 나의 입장과 관점 그리고 이해관계와 가치관 등을 기준으로 세상 돌아가는 일을 판단하고 내 주변의 인물들을 바라봅니다. 그런 것이 세상이고 인생입니다. 대단히 상대적인 측면이 강합니다.

사랑을 기준으로 하여 살아가야 한다는 절대적인 계시 진리와, 모든 것이 상대적인 경험 사이에서 모범을 보여주시는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오늘 복음의 상황이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신 기적 사건 전후하여 군중과 몇 날 며칠 동안 함께 지내셨기 때문에 극도로 피곤하셨습니다. 그래서 혼자서 쉬시려고 제자들까지도 재촉하시어 배를 타고 건너편 벳사이다로 먼저 가게 하시고, 군중도 돌려보내신 후에 산에서 홀로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지식과 진리에 굶주린 군중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현실에 대해 가르치셨고, 배고픈 군중에게는 빵의 기적으로 배불리 먹이셨으며, 당신과 마찬가지로 군중으로부터 시달린 제자들도 쉬게 해 주시려고 군중을 돌려보내신 것처럼 제자들도 따로 건너편 고을로 가게 하신 예수님이셨습니다. 각자가 원하는 것이 달랐지만 그 원을 들어주셨던 예수님이셨습니다. 제자들도 이러시는 예수님 곁에서 지식과 진리를 얻어 들었고 기적으로 늘어난 빵을 나누어주면서 자신들도 배불리 먹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제는 예수님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채우실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기도하시려고 산에 가셨습니다.

기도는 하느님으로부터 에너지와 힘과 기운을 충전받는 일입니다. 기도 시간은 충전 시간이지 방전 시간이 아닌데도 어떤 신자들은 이 기도조차도 누구를 위해 사랑하는 것과 같은 의무적인 방전 행위로 여깁니다. 기도하면 하느님께서 사랑할 기운을 채워주십니다. 반성과 성찰도 하게 해 주시고, 다짐과 결심도 하게 해 주십니다. 그리고 더 필요한 청원도 들어주십니다. 그러나 간혹 오늘 복음에 나오는 제자들의 위기 상황에서처럼 갑자기 사랑을 행해야 할 상황에서는 기도를 중단하고서라도 위기를 타개하는 것이 기도의 응답이 됩니다. 기도란 사랑할 기회를 청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산 속에서 홀로 쉬시기도 하며 기도도 하시다가, 제자들이 처한 위기 상황을 감지하신 것 같습니다. 기도하다 보면 영적으로 감지되는 어떤 상황이 간혹 있습니다. 성령께서 일하신 까닭이겠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서둘러 제자들에게 가시느라고 호수 물 위를 걸어가셔야 했습니다. 워낙 상황이 급했기 때문입니다. 그러지 않으셨다면 제자들은 맞바람이 불어오는 통에 배가 뒤집혀 깊은 물에 빠질 수도 있었습니다.

 

제자들이야 물 위를 걸어오시는 모습을 보고 유령처럼 놀라기도 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예수님께서는 태연자약하게 물 위를 걸어 배 위에 올라 바람을 멎게 하심으로써 요동치던 배를 안정시키셨습니다. 덕분에 제자들의 마음도 안정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위기에 청한 제자들의 부르짖음에 이렇게 응답하신 것입니다. 관심과 도움을 바라는 누군가의 기도에 응답하는 일, 이것도 사랑입니다, 신앙이 공현되는.

사회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이 공현되는 과정은 위기에 처한 누군가의 요청과 울부짖음에 응답하는 과정입니다. 현장 미사 또는 길거리 미사는 그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전례를 위해 필요한 물품과 여건이 완전히 조성되어 있는 성당과 달리 현장이나 길거리에서는 미사를 드리는 분위기가 을씨년스럽고 감시하러 나온 정보 경찰관의 싸늘한 시선도 견디어야 하며 의자도 없이 땅바닥에 앉아야 하는 불편에다가 제대를 장식할 꽃은 물론 성가대도 없습니다. 오로지 무언가 하느님께 하소연해야 하는 약자들의 안타까운 사연만이 미사의 제물입니다.

헌법에 민주주의를 위한 시위와 결사의 자유, 표현과 언론의 자유가 규정되어 있다면, 오늘 복음은 현장과 길거리에서라도 관심과 도움이 필요한 이들이 서로 모여 하느님께 탄원할 수 있는 전례적 자유를 보장하는 근거입니다. 우리는 위기에 처한 이들의 울부짖음에 응답하기 위해서도 용기를 내어야 합니다.

이기우 신부
서울대교구 사제
영원한도움의성모회 파견사제

 

[ 가톨릭일꾼 www.catholicworker.kr ]

<가톨릭일꾼 기사는 상업적 용도 아니라면 출처를 밝히고 누구나 퍼갈 수 있음>

이기우 신부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