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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는 똑똑하고, 나는 이를 잘 닦고, 그림을 잘 그리고"

[유수린과 김정은의 <딸그림 엄마글> 네 번째 이야기]

여덟 살 수민이는 양치질을 깜빡깜빡합니다. 아침밥을 먹고 양치질을 깜빡하고, 학교에서 점심밥을 먹고 양치질을 깜빡합니다. 집에서 저녁밥을 먹고 놀다보면 양치질을 깜빡하고 잠이 들곤 합니다.

흔들리는 이를 뽑으러 치과에 갔을 때, 의사 선생님께서 수민이 충치를 걱정하시며 양치질이 습관이 돼야 한다고 당부하셨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표를 하나 만들었습니다. 가로로 월, 화, 수, 목, 금, 토, 일을, 세로로 아침, 점심, 저녁을 써 넣었습니다. 일주일동안 하루 세 번 식사 후 양치질을 하고 나서 빈 칸에 동그라미를 그려 넣으면 됩니다.

네 살 수린이는 양치질을 잘 합니다. 엄마가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척척 합니다. 표를 만들어주지 않아도 양치질을 빼 먹는 일이 없습니다. 그러니 충치도 없습니다. 이가 새하얗고 예쁩니다.

“우리 수린이 양치질 정말 잘 하네!”
“이가 반짝반짝 빛이 나!”
“충치가 하나도 없네!”

양치질을 잘 하는 수린이가 신통방통해 칭찬을 듬뿍 해줬습니다. 그랬더니 수린이는 손발도 잘 닦고 세수도 잘 하기 시작했습니다. 외출 후엔 곧바로 화장실에 가서 양손을 비누 거품을 내어 뽀득뽀득 소리가 나도록 씻었습니다. 양치질 후엔 화장실 세면대를 깨끗이 닦아 놓기도 했습니다. 수린이가 쓰고 나면 물건이 제자리를 찾고 주변이 정리됐습니다.

아홉 살 수민이는 초등학교 생활에 적응이 됐는지 새로운 도전을 하고 싶어 했습니다. 학교에서 방과후 중국어 수업을 신청했습니다. 세 살에 한글, 다섯 살에 영어 파닉스, 일곱 살에 일본어 히라가나와 가타카나를 익힌 수민이는 이제 중국어도 더듬더듬 읽었습니다. 다섯 살에 말문이 트인 수린이가 물었습니다.

“엄마, 언니는 똑똑한데, 난 왜 안 똑똑해?”
“엄마, 언니는 예쁜데, 난 왜 안 예뻐?”
“엄마, 언니는 멋진데, 난 왜 안 멋져?”

아아, 이럴 때 엄마는 속이 상합니다. 언어를 빨리 익히고 금세 잘 하는 것과 비교할 수 없이 중요한 일이 바로 자기 몸과 맘을 잘 보살피고 가꾸는 일인데 말입니다.

“우리 수린이가 얼마나 똑똑하고 예쁘고 멋진데!”

양손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폭풍 칭찬을 해줘도 수린이 맘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아니야, 아니야. 난 안 똑똑하고, 안 예쁘고, 안 멋져!”

어깨가 축 늘어진 수린이를 데리고 집을 나섰습니다. 아파트 상가로 갔습니다. 상가 2층에 코끼리 그림이 수린이를 반깁니다. 코끼리는 수린이가 가장 좋아하는 동물입니다.

“저기 코끼리가 있네!”

잔뜩 찌푸렸던 수린이 얼굴이 활짝 펴졌습니다. 코끼리 그림과 ‘코끼린’이라 쓰인 간판이 붙어있는 곳은 바로 미술 교습소였습니다.

 

코끼린을 만난 다섯 살 수린이. 사진=김정은

“코끼리가 아니고 ‘코끼린’이네!”

‘린’을 강조해 간판을 읽어주었더니, 수린이는 “코끼린? 유수린?” 하더니 “유수린! 코끼린!”을 반복하면서 좋아했습니다. 수린이는 코끼리 그림과 ‘린’자 돌림에 강하게 끌렸습니다. 매주 1회 수린이는 코끼린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코끼린 선생님은 나이가 백 살이라고 소개하셨고 다섯 살 수린이는 백 살 코끼린 선생님이 맘에 쏙 들었습니다. 한 시간, 두 시간 오래 생각한 후에 그림을 그리는 수린이를 끝까지 기다려주셨습니다. 잘 하지 못하고 느리게 하더라도 스스로 그리고 색칠해서 완성하고 싶어 하는 수린이의 방식을 존중해 주셨습니다.

치카치카치카치카(5세). 그림=유수린

‘치카치카치카치카’는 다섯 살에 만난 코끼린 미술 교습소에서 수린이가 그린 첫 그림입니다. 양치질하는 자신의 모습을 그렸답니다. 빨간색 혀와 목젖, 새하얀 이가 보입니다. 입 안에는 동글동글한 치약 거품이 가득 차 있습니다. 입 안을 깨끗하게 해주고 이를 새하얗게 만들어주는 고마운 거품입니다. 빨대에 물감을 묻혀 후후 불어 표현했답니다.

네 살 많은 언니, 말이 빨라서 자신보다 똑똑하고 멋져 보이는 언니 때문에 수린이는 늘 기가 죽었습니다. 하지만 양치질은 수린이가 언니보다 훨씬 잘 했습니다. 양치질할 때만큼은 세상에서 자신이 가장 빛나 보였습니다. 수린이는 그 모습을 그렸습니다.

코끼린 선생님은 미술공모전에 수린이의 ‘치카치카치카치카’를 출품하셨고, 수린이는 곧 상장과 반짝반짝 빛나는 메달을 받았습니다. 생애 최초로 큰 상을 받은 수린이는 새하얀 이를 내보이며 활짝 웃었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언니는 똑똑하고, 나는 이를 잘 닦고. 그리고 그림도 잘 그리고!”

 

'딸그림' 유수린 엘리사벳: 오직 아름다운 것에만 끌리는 자유영혼의 소유자, 그림 그릴 때가 가장 좋은 열 살 어린이입니다.

'엄마글' 김정은 글라라: 수민, 수린 두 아이의 엄마「엄마의 글쓰기」(2017) 저자, 아이들과 보낸 일상을 글로 남기는 걸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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