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시 데이 "사랑에 빠진 모든 여인처럼, 그분과 일치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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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시 데이 "사랑에 빠진 모든 여인처럼, 그분과 일치하고 싶었다"
  • 프란치스코 신부
  • 승인 2018.12.23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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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시 데이 38주기 추모 미사 강론] 2018년 11월 29일 연중 제34주간 목요일

[도로시데이영성센터와 가톨릭일꾼은 지난 11월 29일 도로시 데이 선종 38주기 기념미사를 인문카페 엣꿈에서 봉헌하였습니다. 이날 강론 전문을 게재합니다.]  

제1독서: 묵시 18,1-2.21-23;19,1-3.9ㄱㄴ
복음: 루카 21,20-28

1주일 전, 청소년 사목 연수 중이었던 저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한 선생님이었습니다. 도로시 데이 38주기 추모 미사를 부탁하는 전화였습니다. 사제서품 받고 본당이 아닌 곳에서 하는 미사는 처음이라 거절할 법도 한데, 지금도 제가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고민하지 않고 ‘알겠다.’라고 답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미사만 부탁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강론도 해야 한다는 겁니다. 요구도 디테일했습니다. “도로시 데이의 삶과 연결 지어서….” 원래 저는 이런 부탁에 엄살을 잘 부립니다. 그런데 또 저는, 제가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해보겠다고 했습니다. 도로시 데이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것도 없으면서.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제가 도로시 데이에 대해서는 모르지만, 한 선생님은 알잖아요. 한 선생님의 강의, 차 마시며 나누던 이야기들, 메일을 통해 받아보는 선생님의 글들을 통해, 도로시 데이의 삶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다고 느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여러분들이 도로시 데이의 삶과 정신에 대해 훨씬 더 많이 알고 계시겠지만, 제가 이 부족한 강론을 준비하면서 바라본 도로시 데이에 대해 조금이나마 나누고자 합니다.

 


도로시 데이는 참 예언자

여러분은 ‘도로시 데이’ 하면 어떤 단어가 떠오르시는지요. 제가 도로시 데이의 삶을 부족하게나마 찾아보면서 느낀 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로 도로시 데이는 참된 예언자였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언자’를 단순히 미래의 일, 앞으로 다가올 일을 내다보고 예언하는 사람 정도로만 여깁니다. 그러나 이는 ‘예언자’의 참 의미가 아닙니다. 앨버트 놀런이 <오늘의 예수>라는 책에서 밝히고 있듯이, 예언자는 과거, 현재, 미래를 막론하고 “남들이 침묵할 때 외치는 사람”입니다. 기준 없이, 또는 자신의 기준만을 들이대며 떠드는 이가 아니라, 하느님과 깊은 관계를 맺으면서 그분 말씀과 생각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과거에 대한 판단도, 현재 시대의 징표를 해석하는 것도, 미래의 일을 예언하는 것도 모두 예언자 자신의 말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해 자신의 뜻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언자들의 말은 곧 하느님의 뜻이며, 하느님의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언자가 그렇게 ‘외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그렇게 사는 사람’이 되어야 했습니다. 예언자들은 말로써, 즉 사람들에게 예언함으로써 하느님의 뜻을 알리기도 했지만, 그들이 먼저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살아감으로써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증거 하기도 했습니다. 말보다 행동이 사람들에게 더 큰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예언자들은 그렇게 자신의 메시지를 말로 전하고, 무엇보다 삶의 실천으로 하느님을 증거합니다. 도로시 데이는 이렇게 하느님의 뜻을 전하고 펼쳐냈던 참 예언자였습니다.

그녀는 ‘외치는 사람’이었고, ‘외치기 위해 먼저 실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이 아니라 돈이 더 중요한 사회, 인간의 노동보다 기술의 발전이 더 중요한 사회, 모두가 아니라 자신만이 중요한 사회. 이러한 사회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습과 다르다는 것을 끊임없이 지적했습니다. 그리스도교 평화주의자로서 폭력을 배제하고 오히려 사랑하며, 노동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자발적 가난을 끌어안는 삶을 살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복음의 핵심을 삶 안에 녹여내려 무던히 애쓴 이가 바로 도로시 데이였습니다, 저는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도로시 데이는 교회를 정말 사랑했다

두 번째로 느낀 것은, 도로시 데이는 ‘교회를 진정으로 사랑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2014년 교종 프란치스코께서 한국에 오셨을 때, 주교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렇게 이야기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순교자들의 후손이고, 그리스도 신앙을 영웅적으로 증언한 그 증거의 상속자들입니다. ... 그들은 성직주의의 유혹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 한국 교회는 바로 그 메시지에, 그 순수함에 거울을 보듯이 자신을 비추어,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찾아야 합니다.” 한국 교회의 성직자들에게 하신 엄청난 비판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를 두고 우리는, ‘아, 프란치스코 교종께서 한국 교회를 엄청나게 싫어하시는구나.’라고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한국 교회 성직자들의 모습이 얼마나 안타까우셨으면, 저런 말씀을 하셨을까?’ 또는 ‘사랑하시니까 저렇게 말씀하실 수도 있는 거야’라고 받아들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감정적 사랑이 아니라 실천적 사랑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그것을 마음에만 간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 사랑을 어떻게든 표현하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그 표현 방법이 꼭 격려, 응원, 칭찬과 같은 긍정적인 것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의문을 제기하거나, 비판하거나, 안타까워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 표현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상대방의 회신과 쇄신과 성장과 발전을 위해서 말입니다.

도로시 데이는 교회가 시류를 거스르기를 바랐지만, 교회가 오히려 세상과 타협하고 그 분위기에 편승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슬픔을 느꼈고, 그러한 마음을 실제로 표현했습니다. 부자들을 위한 교회가 아니라,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하느님과 맺는 내적인 관계와 사회적 실천이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여러 자리에서 한 연설과 먼저 실천하는 모습 안에서, 교회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그녀의 마음을 느끼게 됩니다.

 

사진=한상봉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사는 사람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사람’, ‘그리스도를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단순히 그분을 믿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분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우리의 삶에 녹여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이 미사 중에 우리가 기억하는 도로시 데이가 바로 그런 삶을 살고자 무던히 애썼던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가난하고 정결하며 순명하기를 바랐다. 나는 살기 위하여 죽고 싶었고, 낡은 인간을 벗어버리고 그리스도를 입고 싶었다. 다른 말로 하자면 나는 사랑하고 있었다. 그리고 사랑에 빠진 모든 여인처럼 나는 나의 사랑과 일치하고 싶었다.”

도로시 데이 자신을 가장 잘 설명하는 말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삶의 모토가 지금 여기 모인 여러분들께서 하고 계신 가톨릭일꾼 운동으로 표현되고 있다고 믿습니다.

한 선생님을 비롯한 여러분들의 노력이 항상 환영받거나 호의적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뭐 그렇게 해서 세상이 변하겠어?’라거나, ‘편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뭐 그리 어렵게 살아?’라는 등 냉소적인 반응과 반대 또한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 또한 어떻게 보면 박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을 좌절시키고 힘들게 하고 이 모든 것들을 놓고 싶게 만들 테니까요. 멀리 보면 희망이 보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번 주 복음 말씀이 모두 그런 내용입니다. 이번 한 주, 독서와 복음으로 무서운 말을 너무나 많이 들었습니다. 마지막 날에 세상이 파괴될 것이고, 사람들은 박해받을 것이며, 오늘 복음의 말씀처럼 하느님의 도성 예루살렘마저도 다른 민족들에게 짓밟힐 것이라고 합니다. 희망이라곤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말씀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지켜나갈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처럼 우리도 부활할 수 있다는 희망을 계속 이어갈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파괴와 박해와 짓밟힘이라는 말씀 사이에서 보석처럼 빛나는 한 마디 때문입니다. ‘성전과 민족과 세상이 파괴될 것이지만, 그것이 끝은 아니니 두려워하지 마라’는 말씀입니다. 세상 모든 이들이 너를 박해하고 죽이기까지 하겠지만,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니 인내로써 생명을 얻으라는 용기의 말씀입니다. 하느님에게서 선택받은 너희들이 짓밟힘을 당하겠지만, 너희의 구원이 가까웠으니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그 한 마디가 우리를 살게 합니다. 그 한마디를 하신 예수님이라는 존재가 우리를 살게 합니다.

여기 모인 우리 모두가 하고 있는 가톨릭일꾼운동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곁에 있는 소중한 사람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도로시 데이, 또 우리가 서로 주고받는 그 보석 같은 한 마디가 이 운동을 계속 이어가게 할 거라고 믿습니다. 이 미사를 봉헌하면서,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정의와 사랑에 따라 살아가는 진정한 가톨릭 일꾼이 될 수 있도록 서로를 위해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저도 수동적 가톨릭일꾼 신문 구독자로서 여러분들을 응원하고 기도로 함께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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