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멘스의 편지: 로마 제국 닮은 로마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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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멘스의 편지: 로마 제국 닮은 로마 교회
  • 한상봉
  • 승인 2018.11.27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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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묵시록 묵상-3

[그리스도인들을 가장 극심하게 박해했던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시대를 앞뒤로 하여 동시대에 저작된 교회문헌 가운데 로마에서 쓰여진 클레멘스의 편지 그리고 아시아에 있는 식민지에서 쓰여진 요한의 묵시록을 개관하면서, 오늘날 물질문명이 낳은 마몬의 질서 안에서 사는 그리스도인의 처신을 성찰한다.]

로마 제국, 하느님, 그리고 클레멘스

90년경 요한의 「묵시록」이 쓰여지던 같은 시대에 로마 교회에서 쓰여진 한편의 중요한 편지가 있었다. 이 편지는 로마 제국에 대하여 묵시록과 전혀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는데, 서기 96년에 로마 교회의 3대 감목(주교)으로 알려진 클레멘스가 고린토 교회에 보낸 편지이다. 클레멘스의 편지는 기도문으로 끝맺는데, 로마 제국의 권력자들을 위해 먼저 기도하고 있다.

“주님, 그들에게 건강과 평화, 그리고 일치와 단호함을 주소서!”(클레멘스 61,1)

여기서 지배자의 건강은 제국의 건강이며, 제국의 건강이란 로마의 평화를 뜻한다. 로마 제국에 저항하는 어떠한 저항운동도 고개를 들어 민심을 흐리지 않도록 평온과 질서를 달라는 것이다. 나아가 클레멘스는 하느님과 지배자를 나란히 위치시킨다.

“우리로 하여금 올바른 마음을 갖고 행동하게 하시고ㅡ 당신과 우리의 지배자 앞에서 선하고 당신들의 마음에 드는 행동을 할 수 있게 하소서!”(60,2)

지배자의 마음에 드는 것과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것이 같다는 생각은 여지껏 초대 그리스도 교회에서 찾아볼 수 없는 관점이었다. 이 새로운 관점을 클레멘스는 몇 번이고 강조한다. “우리로 하여금 당신의 전능하신 이름과 땅 위에 있는 우리의 지배자와 지도자들에게 복종하게 하소서.” 왜냐하면 그래야 이 땅에 평화가 이뤄질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Clement I, was Pope from 88 to his death in 99

그리스도의 복음과 지배권력

이런 태도는 복음서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입장과 사뭇 다른 것이었다. 예수님이 원했던 평화는 로마의 평화와 다른 것이었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요한 14,278) 이를테면 “세상에서는 통치자들이 백성을 강제로 지배하고 높은 사람들이 백성을 권력으로 내리누른다.”(마태 20,25)는 것을 잘 알고 계셨던 예수님은 권력에 기대어 있는 평화가 불의 위에 세워져 있음도 아신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평화는 로마의 평화의 반대편에 있다.

지배하는 이 없는 무위의 평화, 지배가 아닌 섬김과 사랑으로 성취되는 평화를 그 분은 원한다. 그러므로 하느님과 황제를 나란히 놓는 태도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낯선 것이었다. 어떻게 하느님과 마몬이 함께 예배받을 수 있는가.

“너희는 스승 소리를 듣지 말아라. 너희의 스승은 오직 한 분 뿐이고 너희는 모두 한 형제들이다. 또 이 세상 누구를 보고도 아버지라 부르지 말아라., 너희의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한 분 뿐이시다. 또 너희는 지도자라는 말을 듣지 말아라. 너희의 지도자는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시다.”(마태 23,8 – 111)

오로지 하느님꼐 대한 신앙만이 그리스도 있들에게 빛을 준다. 그러나 클레멘스는 로마의 감목(주교)으로서, 교회를 지키기 위하여 로마의 법과 질서에 순응하기로 결심한듯하다. 그것도 적극적으로 말이다. 클레멘스의 입장에서는, 황제에게 복종하는 것은 곧 하느님께 복종하는 것이 된다.

“주님, 당신은 당신의 탁월하고 신비한 힘을 통해 그들에게 지배의 권력을 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당신이 그들에게 주신 영광과 명예를 깨달아 그들에게 복종함으로써 결코 당신의 뜻을 거역하지 않게 하려 함입니다”(61,1)

그러나 예수님은 달리 말씀하셨다. 가장 보잘것없는 이들에게 해준 것이 당신께 해준 것이며, 가난한 이들이 하느님 나라의 주인이 되리라고 하셨다. 로마 황제는 결코 별볼일 없는 하찮은 인생이 아니었다. 그는 어부도 농부도 노동자도 아니였고, 부랑자나 창녀나 거지도 아니었다. 그는 막강한 힘의 소유자요 최대의 부자였다. 결국 황제에 대한 복종을 요구한 클레멘스의 태도는 하느님 신앙을 모욕하고 있는 셈이다.

 

Basilica di San Clemente al Laterano

박해는 업무상 과실

이는 곧 클레멘스가 서 있던 자리가 어디였는지 잘 말해준다. 클레멘스는 헬라화한 유다인으로서 로마에 거주했을 뿐만 아니라 상류계급에 속했다. 따라서 그는 지배자, 황제, 고관대작들을 ‘우리의’ 지배자와 지도자로 부르고, 군인들이 ‘우리의’ 지도자들을 돕는 것을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었다.

클레멘스는 로마를 자신의 고향으로 느끼고 있었으며, 마음 깊은 곳에서 충성심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는 자유롭게 라틴어를 구사하며, 폭넓은 지식을 갖춘 상류계급 출신이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언제나 부자의 관점에서 편지를 쓰곤 했다.

“부자는 가난한 사람을 구제해야 하며, 가난한 자는 그의 부족함을 채워주시는 하느님께 감사해야 한다.”(28,2)

여기서 능동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은 부자뿐이다. 가난한 이들은 거기에 감사할 뿐이다. 또한 “좋은 노동자는 노동의 대가로 빵을 얻지만, 게으르고 태만한 노동자는 고용주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한다.”(34,1)라고 함으로써 고용주의 입장에서 노동자를 바라본다. 게다가 클레멘스는 여성을 낮추어 보고 있다. 여성들은 남편에게 복종하고, 가사에 전념하며, 교회에서 침묵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클레멘스가 경험한 로마 제국은 탄식과 고통이 얼룩진 땅이 아니라 ‘완전한 세계’였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찬란한 현존재로 부르셨다는 감사가 울려 퍼지는 곳”(38,2)이며, 전 우주는 “질서 가운데”(20,1-10) 있으며, 지배자들에게 복종함으로써 이 질서와 평화는 지속될 것이었다.

그러나 클레멘스 역시 로마에 의해 자행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 문제를 피해 갈 수 없었다. 그는 신앙고백 때문에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가 로마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클레멘스는 의도적으로 ‘박해’라는 말을 사용하기를 꺼렸고, 편지에서는 순교 이야기를 하지만, 박해했던 자들이 누구였는지 입밖에 내지 않는다. 그리고 박해는 다만 ‘업무상 과실’ 이었다고 말하는 듯싶다.

로마가 그리스도인을 박해한 것은 단순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여겼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을 것이다. 오히려 박해의 원인을 그리스도인들의 잘못된 행동에서 찾았다,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질투와 시기 때문에 가장 위대하고 의로운 사람들이 박해받고 죽을 때 까지 싸우게 되었다”(5,2)라고 말하고 있으며,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의 순교도 ‘질투’에서 원인을 찾았다. 로마 사회에서 박해와 순교는 불가피한 그리스도인의 실존이 아니라, 불필요한 혼란으로 여겨졌다.

 

채석장에서 샘물을 발견하는 성 클레멘스 1세_by Bernardino

교회는 로마에서 배워야 한다

클레멘스는 교회문제 역시 로마 제국의 질서라는 관점을 빌려 해결하려고 한다. 코린토 교회는 몇몇 젊은이들의 뜻을 받아들여 감목직(주교)을 맡고 있던 몇몇 장로들을 해임시켰다. 이를 본 클레멘스는 로마 교회의 일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에 개입했다. 그는 편지를 보내 “사랑하는 자여, 믿을 만하고 존귀한 고린토 교회가 한두 사람 때문에 장로들에게 거역한다는 것은 엄청난 수치이며, 그리스도인의 삶에 역행하는 것.”(47,6)이라면서, 쫓겨난 장로들을 다시 복직시키고, 소요를 일으킨 사람들을 망명 길로 보내려 했다.

클레멘스는 장로들을 내쫓은 사건을 ‘반란’ 또는 ‘혁명’ 으로 묘사했다. “사랑은 결코 반란을 도모하지 않는다.”(49,5)고도 했다. 그는, 로마의 평화는 반란 때문에 어지럽혀지고 교회 공동체에서 ‘분쟁과 반란을 도모하는’ 자들, 평화로운 상태와 거리를 두려는 자들은 하느님의 뜻에 맞는 질서를 거부하는 사람들이라고 단죄한다.

클레멘스가 이끌었던 로마 교회는 로마 제국을 모범으로 삼았다. 로마 제국이 식민지와 동맹국들의 분규에 개입할 힘을 갖고 있었듯이, 로마 교회는 다른 지역 교회의 문제에 간섭할 권리가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그러나 클레멘스는 로마 제국처럼 코린토 교회에서 소요를 일으킨 신도들을 사형시킬 수도 없었고, 추방할 수도 없었다. 이를 두고 클레멘스는 한탄한다.

“너희 가운데 누가 고상하고, 누가 자비로우며, 누가 사랑으로 가득 차 있는가? 그런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나 때문에 반란과 다툼, 그리고 분열이 일어났다면 나는 너희들이 원하는 곳으로 떠나고, 교회가 지시해 주는 것을 행하겠다,’”

장상을 거역하고 문제를 일으킨 사람은 알아서 자발적으로 교회를 떠나라는 충고다. 클레멘스에게 중요한 것은 신도들이 ‘ 복종의 자리’에 있는 것이었다.

클레멘스의 제국 교회

클레멘스는 군대의 힘에 의해 얻어지고 보장되는 로마의 평화처럼, 교회의 평화도 군대와 같은 일사분란한 질서에서 나온다고 여겼다. 교회 공동체의 평화는 한번 임명된 ‘직책을 가진 사람들’에게 복종할 때만 이뤄진다는 것이다. 그는 교회 지도자의 권한을 강화시킬 필요를 느꼈다. 그는 정치적 지배자를 하느님의 반열에 나란히 놓았듯이, 교회 지도자에 대한 복종을 하느님께 대한 복종과 나란히 놓았다.

장로(감목,주교)의 직책 근거를 사도와 그리스도, 심지어 하느님에게까지 연결시켰다. 즉 ‘권위 그 자체의 제도화’를 꾀했다. 결국 클레멘스는 하느님 나라를 미리 맛보는 낯선 세계로서의, 순례자로서의 교회관을 잃어버렸다. 그가 원했던 교회는 너무나 세상과 닮아버린 것이다.

클레멘스는 그리스도인들이 권력에 도전하는 것을 심혈을 기울여 막으려 했다. 물론 클레멘스는 신도들의 경박한 행동이 박해를 불러올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권력과 질서에 대하여 ‘조용히 견디어 가는 것.’을 좋아했던 클레멘스의 교회는 로마 제국에 대한 교회의 승리를 가져왔다. 그러나 교회의 승리 이면에서 갈릴래아의 예수님이 선포하셨던 복음은 다시 무덤 속으로 들어갔다.

[마무리 묵상]

나비 같은 옷들이 나의 품위인가요.
나의 자동차는 나의 영광
나의 저금통장은
내 삶의 보증인가요.
더 중요한 무엇을 어디에 두었는지 헤어리고 싶지 않아요.
다져진 몸매와 매끄런 피부가
부끄럽단 생각은
추호도 하고 싶지 않아요.
정당한 노력에 대한 정당한 대가
그게 잘못인가요.
아니에요, 라고 말하고 싶어요.
그렇지만 가난이 미덕이 아니고
초라함이 믿음을 불러오는 건 아니잖아요.
그래도 당신께서 원하시면 할 수 없어요.
툭 털고 나서라면 어쩔 수 없어요.
나의 부끄럼 나의 모든 걸
헤아리고 생각하고 털어놓으람
어ᄍᅠᆯ 수 없는 거지요.
그렇게 하고 나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런데 잘 안 돼요, 하느님,
도와주세요.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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