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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헌 만큼 소중한 스태프가 있다 "강자가 먼저 나서야"

[김경집 칼럼]

나는 영화관에 자주 가는 편은 아니다. 특히 블록버스터 급 영화로 도배하는 대형영화관에 가는 일은 한 해에 고작해야 한두 편에 불과하다. 그래도 시네큐브처럼 예술성이 뛰어난 작품이나 저예산 영화 가운데 잔잔한 감동을 주는 영화를 상영하는 곳에는 한 달에 한 번쯤은 꼭 들르는 편이다.

그런 영화관에서 누리는 즐거움 가운데 하나는 엔딩크레디트를 끝까지 볼 수 있는 여유다. 이상하게도 대형영화관에서는 영화의 스토리가 끝나기 무섭게 조명을 켜는 까닭에 엔딩크레디트를 끝까지 볼 수도 없거나 관객들이 자리를 뜨는 북새통 탓에 집중할 수 없다. 왜 우리는 끝까지 그것을 보는 마음의 여유가 없을까.

내가 악착같이(?) 엔딩크레디트를 사수하는 까닭은 영화에 대한 지적 탐구가 강해서 그런 건 아니다. 물론 그것을 통해 영화를 만들어낸 시스템이나 기술 등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 누구의 음악이었는지, 장소가 어디인지, 작품 중에 나온 미술품은 누구의 작품인지 등 의외로 건질 것들이 많다.

그러나 내가 그것에 애착을 갖는 가장 큰 이유는 영화에 단 한 번도 얼굴 내밀지 못하고 영화 작업에 참여한 사람들에 대한 일종의 예의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달랑 이름 하나 올리는 게 그들이 영화에 남긴 유일한 ‘공적’ 흔적이다. 그이들이 없었다면 영화가 만들어질 수 없다. 그런데도 그렇게 이름으로만 존재하는 수많은 참여자들은 이름조차 무시되고 보수 또한 무시되거나 착취되는 일이 다반사인 게 현실이다.

 

승자독식을 깨뜨리는 건 승자의 몫이다

TV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에 출연한 배우 이병헌의 출연료가 회당 1억 5천만 원이라고 한다. 뛰어난 연기력과 관객을 흡인하는 스타파워가 막강하니 그 정도의 출연료를 지급하더라도 제작자의 입장에서는 마다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는 총 제작비의 1/10 정도는 주연 배우의 몫이 되는 게 일상적인 일이 되고 있다고 한다. 그런 대우를 받는 배우로서는 뿌듯할 것이다. 명성도 커지고 그에 비례하여 수입도 증가하니 그야말로 일석이조요 광고수익까지 따진다면 일석삼조 이상일 것이다. 그들은 이미 하나의 ‘걸어 다니는 중소기업’이다.

그런데 심심찮게 보도되는 것 가운데 드라마(외주제작뿐 아니라 방송국 자체 제작의 일부 경우까지 포함해서) 작업에 참여한 단역배우들이나 스태프들에 대해 임금을 체불하거나 심지어 떼먹는 경우까지 비일비재한 모양이다. 헌법과 법률에 보장된 노동의 시간과 공정한 임금은 이들에게는 처음부터 남의 일이다. 악조건에서도 때로는 며칠 밤을 새면서 힘들게 일했지만 차일피일 미루던 임금(그나마도 아주 열악한 조건임에도)이 지불되지 않는 일이 21세기 현대 사회에서 버젓하게 벌어지고 있다. 이것은 야만이다.

아무리 훌륭한 배우라 할지라도 영화에 참여한 스태프들과 단역 배우들의 노력이 없다면 그의 연기가 스크린에서 관객에게 전달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영화산업이라는 게 자본주의의 첨병이고 당연히 강자와 승자의 몫으로 돌아가기 쉬운 것이며 위험 부담이 높은 까닭에 그것을 줄일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한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그 리스크 회피가 약자의 쥐꼬리만큼도 못한 임금을 착취하는 방식으로 채워지는 걸 방조하는 것은 일종의 범죄행위다. 그런 일을 ‘관행’이라며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 것 또한 범죄행위다. 우리가 영화를 즐기는 이면에 약자들의 착취와 억압이 자행되는 것을 외면하면서 내가 관람료를 냈으니 그들의 비참한 상황에 대해 관여할 바가 아니라는 것 또한 비겁한 일이다.

스타파워 배우들 가운데 가톨릭 신자와 개신교 신자가 꽤 된다고 들었다. 적어도 그들만이라도 먼저 나서기 바란다. 물론 누구나 자신의 몫을 최대로 받는 걸 목표로 삼겠지만 노동의 사각지대에서 착취당하는 스태프들과 단역배우들의 처우개선에 목소리를 높이기를 바란다. 최소한 동업자 의식은 가졌으면 좋겠다. 그들의 임금을 먼저 지불하고 자신들의 출연료를 달라고 주장하기를 요구할 수는 없겠지만(물론 그렇게 해준다면 더 바랄 나위 없겠지만) 그들의 입장을 대변할 수 있는 용기와 연대의식을 갖는 성숙한 배우이면 좋겠다.

스타파워는 단순한 티켓파워와 몸값으로 저울질되는 게 아니라 그에 걸맞은 인격과 품성이 따를 때 더 오래 더 깊이 사랑받을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나는 이른바 티켓파워를 가진 스타가 이 글을 봤으면 좋겠다. 혹은 그런 이들을 아는 이들이 이 글을 읽는다면 그들에게 전해줬으면 좋겠다.)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한국이 4강에 진출한 쾌거를 이뤘을 때 축구협회는 대표선수들에게 포상금을 차등지급하려고 했다. 월드컵 경기에 출전한 선수들과 후보 선수들을 똑같이 대우할 수는 없다는 논리였다. 시민들은 그런 처사에 실망하고 비난했다. 그런데 결정적인 것은 선수들 자신의 연대였다. 선수들은 협회에 지급원칙을 거절하고 모든 선수들에게 동일한 포상금 지급을 요청했다.

출전 기회가 많았던 선수들은 그냥 입 다물면 자신들에게 돌아갈 몫이 크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동료선수들’에 대한 연대가 깨진다는 것을 알았고 그런 동료의식이 원칙적인 팀스피리트라는 것을 알았기에 그들은 결연히 요구했다. 그러나 협회가 그 요구를 거절하자 선수들은 포상금을 모아 공평하게 나누기로 결의했다. 결국 협회는 자신들이 내세웠던 차등지급 원칙을 포기했다. 그 과정을 통해 선수들뿐 아니라 시민들도 경기에 나간 것과 안 나간 것의 차이는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천명한 셈이다. 똑같이 훈련하고 노력했기 때문에 포상의 지급도 동일해야 한다는 매우 상식적인 선례를 남긴 것이다. 나는 월드컵 4강의 감격보다 당시에 선수들이 보여줬던 멋진 연대의식과 공동의 투쟁이 훨씬 더 감동적이었다.

약자의 설움을 토하는 것은 약자의 몫이지만 그들의 권리에 대해 공감하고 연대하며 지지함으로써 부당한 대우와 억압의 사슬을 끊도록 돕는 것은 강자의 몫이다. 인종문제가 대두될 때 큰 힘은 소수인종의 저항과 투쟁에서 오는 것이기도 하지만 결정적인 힘을 보태는 것은 주류의 다수 인종이 함께 분노하고 그들과 연대하는 것임을 우리는 가까운 역사를 통해 배우지 않았던가. 승자독식의 프레임은 동물의 세계에서도 보기 어려운 파렴치한 행위다. 동물도 제 배를 채우면 더 이상 먹잇감을 쥐고 있지 않는다. 하물며 인간이 동물의 세계보다 더 가혹하게 자신의 욕망만을 추구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교회의 사명

한국교회에서 인권 감수성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환대의 태도는 부끄러울 만큼 빈약하다. 그런 가치에 대한 말의 성찬은 넘치지만 그것을 실천하는 교회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소수자와 약자에 대한 가혹한 저주와 수의 횡포와 다르지 않은 억지만 도드라져 보인다. 교회는 강자들의 위력을 축복하고 그들의 성공을 하느님 섬김의 결과로 포장하여 선전하는 일보다는 약자의 설움을 교회 구성원들에게 전달하고 공감하게 해야 한다. 그래서 지금 이 땅에서 우리가 어떻게 복음을 실천해야 하는지를 강력하게 촉구하고 각성시켜야 할 시대적 의무를 지녔다.

“너희는 밭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곡식 한 묶음을 잊어버리더라도 그것을 가지러 되돌아가서는 안 된다. 그것은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의 몫이 되어야 한다.”(신명 25, 19)

현대철학자 레비나스의 핵심적 사상은 주체 중심인 근대 철학의 문제를 비판하면서 타자 중심의, 혹은 타자에 대한 공감의 사상으로 전환하자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근대윤리학의 핵심은 바로 ‘고통 받는 타자에 대한 환대와 배려’이며 자기중심적인 해석에서 벗어나 이분법적 인식과 사유의 울타리를 깨뜨려야 진정한 자아의 해방과 실현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종이 가톨릭 사제들에게 레비나스의 저서를 읽도록 권한 이유는 바로 그런 사상에 대한 필요성 때문이다.

마태오복음서의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는 늦게 데려온 일꾼에게 같은 임금을 지불하는 것이 단순히 자신이 주인이기 때문에 자기 마음대로 결정할 권리가 있고 먼저 온 다른 노동자들이 그것을 항의할 권리가 없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루 품삯의 일을 얻지 못해 노심초사하고 속을 태우며 동동거리며 절망하던 사람에게도 똑같은 인격의 대우와 누구나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본적 요소를 동등하게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주려는 것이다.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 20, 27~28)

이 말이 단순하게 예수님 자신의 소명에 대한 언급이 아니라는 것을 모르는 신자들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정작 우리들은 그게 우리 몫이 아니라고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 볼 일이다. 복음 실천의 첫 걸음 가운데 하나는 바로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와 공감의 실천이다. 교회 안에 있는 수많은 강자들이 해야 할 일이기도 하다.

김경집 바오로
인문학자, <눈먼 종교를 위한 인문학>, <생각을 걷다> 저자

 

 

 

 

 

[ 가톨릭일꾼 www.catholicworker.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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