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가 살았던 팔레스타인은 어떤 사회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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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가 살았던 팔레스타인은 어떤 사회였나?
  • 캐논 프랑소아 후타르
  • 승인 2018.09.26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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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어떻게 살았나-2

흔히 복음은 마치 예수가 선(先)-정치의 세계에서 살았던 것처럼 읽히고 해석되고 있다. 예수 시대의 팔레스타인 사회에 관한 이 분석은 복음과 예수의 삶을 이해하는 데에 새로운 빛을 던져줄 것이다.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민족의 바빌론 유배(기원전 6세기) 이후 팔레스타인은 항상 페르시아와 로마제국에 정복당해 왔으며 내부에서는 부유한 지주 계층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다.

예수 당시의 팔레스타인은 현저하게 다른 두 개의 지리적 지역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유다는 예루살렘과 성전을 중심으로 산악지역이었다. 땅은 건조하고 황량하였으며 올리브와 과일이 재배되었고, 양과 염소 등의 목축이 성행하고 있었다. 또다른 지역인 갈릴래아에는 두 개의 교역로가 가로지르고 있었는데, 하나는 다마스커스에서 바다로 가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다마스커스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이었다. 갈릴래아는 국토 중 매우 비옥한 지역이었으며 옥수수 재배와 목초재배의 광대한 농원이 펼쳐지는 곳이었다.

또한 해안가와 호수주변에는 어민들이 있었다. 외국상인들이 이 지역에 침투해 와서 갈릴래아는 혼혈의 지역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따라서 유다 민족에게는 순수하지 못한 지역으로 간주되었다(마태 4,15-‘이민족들의 갈릴래아, 어둠 속에 앉아있는 백성’).

사회지리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갈릴래아의 마을들은 자립적으로 살아가고 있었던 반면, 유다 특히 예루살렘에는 고급 도시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로마정권

로마제국은 팔레스타인에서 생산되는 잉여재화를 로마로 흡수하였다. 우선 수많은 세제를 통하여 공식적으로 착취하는 방법이 있었다.

6백만 데나리온(1데나리온 = 1일 노동임금에 해당됨)가 매년 인두세(추수의 4배에 해당하는 개인세), 군역세, 국세라는 세목으로 징수되었다.

뿐만 아니라 로마 관리와 팔레스타인의 동맹세력이 합작하여 착취하는 비공식적인 과세도 있었다.

이스라엘의 지배계층과 로마시민권을 얻은 관리계층에서 충당된 중간계층을 통하여 로마의 지배는 또한 정치에도 미치고 있었다. 정치행정을 본다면, 제일 위에는 유다지방의 총독이 있었는데 그는 로마인이었고, 가이사랴에 주재하였으나(예루살렘에서 너무 눈에 띄지 않도록) 축제 때에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곤 하였다. 총독은 대사제를 지명하였으며 그 당시 사회의 4대 지배문중에서 선택하였다. 갈릴래아에는 헤로드 안티파스왕과 시리아의 로마총독 사절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로마는 간접적으로 대지주와 귀족들을 지배하고 있었는데 이를 통하여 재산소유권을 박탈할 수도 있었다. 따라서 대지주와 귀족계층의 이익은 로마정권과 협력하는 여부에 따라 좌우되었다.

또한 로마정권이 직접 임명하는 중간층의 관리집단도 있었으나 일반적으로는 산헤드린의 원로들과 대가문에서 선택되었다. 세리들은 사회의 낮은 계층에서 징발되는 세를 거두어들이는 책임을 지고 있었다.

군사적 지배는 팔레스타인에 주둔하는 로마군대가 담당하였다. 이 로마군대는 대부분 시리아에서 혹은 팔레스타인의 비유다인들 속에서 징집되었다. 군대는 해안을 따라 주둔하고 있었다.

팔레스타인의 사람들

농촌과 도시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시골마을은 일반적으로 소지주들의 토지와 마을 공동체가 공동으로 소유하는 경작지로 이루어져 있었다. 농작물 생산으로 본다면 대부분 자립이 가능하였다. 그리고 약간의 기술공들이 있어 마을에서는 물물교환으로 교역이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대체로 마을에는 계급사회가 없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나 로마제국의 출현 이후로 가난이 점점 뚜렷하게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팔레스타인의 중심권(성전지역)뿐만 아니라 변경까지도 백성들은 각종 과세로 고혈을 빠는 로마의 악정에 시달리게 되었다.

갈릴래아의 대농원은 옥수수와 가축사육에 쓰였고 유다는 올리브, 과일 그리고 양이나 염소를 키우는데 이용되고 있었는데 소유주인 대지주들은 도시에 살면서 도시경제 및 외국의 대상인들과 관계를 맺고 있었다. 지주들은 대부분 화폐경제권 안에 살고 있었고 그들의 농업노동자들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현금으로 지불받았다.

도시지역은 세 경제계층으로 이루어졌다. 직물, 식량, 향료, 보석 등을 생산하는 기술공들은 건축에도 참여하고 있었다. 또한 주로 건축에만 종사하는 노동자들도 있었다. 성전은 기원전 20년과 기원후 62년 사이에 재건립 되었는데 이때 왕, 지방귀족, 로마관리들은 자신들의 거주지를 짓기도 하였다. 기원후 60년경 예루살렘에만 약 18,000명의 노동자가 있었을 것이라 추정된다.

대상인들은 노예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원자재와 농산물을 교역하였다. 그들은 이 지역을 통과하는 무역상들과 관계를 맺고 광대한 제국 전역에 교역망을 만들었다. 또 한편으로 기술공 출신인 소상인들도 있었다.

예루살렘 성전은 한마디로 소비생활의 중심지였다고 할 수 있다. 국외 이주 유다인들의 공물, 세금, 봉헌제물(유다의 4가문 중에 대사제가 뽑힌 한 가문이 독점하였던)의 판매수입, 그리고 농산물 수입 등 모든 수입이 성전으로 집결되었다. 계약의 궤를 소유하였다는 사실 때문에 성전은 모든 경제 분배의 수원이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성전은 오늘날 중앙은행, 증권거래소처럼 재정을 담당하는 기구역할을 하였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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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층

농촌지역에는 부재대지주, 소지주, 기술공, 노동자 그리고 노예들이 있었다.

도시에는 삼중의 계층분화가 있었다: 먼저 최상류층은 네 가문의 사제 귀족들(이 네 가문 중에서 총독이 대사제를 임명하게 된다), 대상인들 그리고 일반 귀족층을 구성하는 고급관리들로 이루어진다. 다음 중류이하 계층은 장인, 장사들, 하급관리들, 평신자나 사제 그리고 랍비들로 구성된다. 중간하층은 대개 성전붙이로 살아가는 노동자들과 노예들로 이루어진다. 마지막으로 소외된 최하층의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경제활동에 참여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경제적이 아닌 다른 이유 때문에 유기적 사회체제로부터 완전히 제외된다.

우리는 사회계층 분화의 두 가지 다른 측면에 대하여 생각할 필요가 있다. 첫 번째는 인종적인 측면이다. 당시 팔레스타인에는 순수한 혈통과 혼혈의 유다인들로 구분되어 있었고 정통성은 혈통에 따라 결정되는데 세 가지 부류가 있다. 즉 적자, 준 비적출자, 완전 비적출자로 구분되었다. 완전 비적출자는 모든 사회활동으로부터 제외되었다.

비적출자들의 대부분이 갈릴래아에 살고 있었으므로 갈릴래아 지방은 매우 평판이 나빴다.

또한 종교적 측면에서도 금기와 속박이 많았다. 법조문 한 가지만을 어겨도 죄인으로 간주되었다. 병으로 신음하는 이들, 특히 정신병자(마귀 들린 자로 여겨졌던)와 나병환자들은 불결하게 생각되었다.

이들은 팔레스타인의 사회 문화생활에서 제외된 변두리 인생으로 살아야 했다.

정치

정치체제에 있어서도 우리는 도시와 농촌을 구분해서 보아야 한다. 농촌에 있어 정치권력은 가문이나 혈통에 좌우되었다. 한 가정의 가장은 연장자로서 남자였고, 그는 농촌의 소규모 사회에서 공동체적으로 권위를 행사하는 마을 장로회의 일원이 되었다. 그러나 순수한 혈통의 유다인만이 장로회의 일원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매 회의에는 사제가 있었다.

도시의 사회구성은 농촌보다 훨씬 복잡하였다. 먼저 귀족 가문과 대지주들이 구성하는 장로회의가 있었는데 이들은 정치, 경제권을 독점하고 있었다. 그런데 예루살렘이라는 국가의 정치제도는 이러한 장로회의보다 훨씬 더 까다롭게 구성되었다.

예루살렘에는 두 개의 기본적인 기구가 있었다. 즉 산헤드린과 대사제직이었다. 산헤드린은 유다, 갈릴래아, 디아스포라에서 각각 다른 기능을 발휘하고 있었다. 유다에서 산헤드린은 최고의 정치권력을 막강하게 행사하였다. 갈릴래아에는 로마지배하의 헤로데왕이 정권을 잡고 있었으며 디아스포라의 산헤드린은 최고의 사법권과 이념적인 지배를 장악하고 있었다. 따라서 국가를 대표하는 모든 초권력 기구들은 성전에 자리 잡고 있었다. 산헤드린은 사두가이 가문(대제사장의 가문과 세속귀족의 장로들로 구성됨)과 레위인, 바리사이파 그리고 사제들로 이루어지는 중하계층에서 뽑힌 71명으로 구성되었다.

대사제 계층은 바빌론 유배이후로 왕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었다. 그들은 세습제로 이어지고 있었으나 로마지배 이후로 현직자는 로마의 총독이 임명하였다. 산헤드린의 권한은 간헐적으로 행사되었으나 대사제직은 성전에 뿌리를 박고 최고의 영속적인 권한을 누리고 있었으며 정치, 행정, 경제적 차원에서 실제 영향력이 막대하였다.

또한 성전에는 예식을 주관하고 레위인들을 통하여 정치적인 기능을 행사하고 있었던 사제집단이 있었다. 또한 사제는 회계를 맡고 있었다. 이외에도 관리, 사제, 레위인 그리고 평신자들의 집단이 있었다.

정치권력에 나타난 인물들

유다의 귀족 계층을 이루고, 경제 이득권 때문에 로마정권과 연결되고 있었던 사두가이파가 있으며, 도시 중하계층을 이루고 있었던 바리사이파는 기술공, 소무역상인, 법률학자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산헤드린에 출석하고 있었으나 정치권한은 거의 행사할 수 없었다. 로마에 대항하여 게릴라전을 선포하였던 젤로트파가 있었고 이들은 대지주의 착취에 대해서도 저항하고 있었다.

이들은 다양한 출처로부터 영향을 받고 있었다. 갈릴래아의 대혁명가 유다스, 바리사이파 중 사독 계열, 또는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기도 하였다. 그중에서도 전형적인 이념은 바리사이파의 이념이었는데 그들은 신정 유다국가로의 복귀를 꿈꾸었다. 전사들은 대부분 농민출신이었고 이들은 국내와 외국의 착취에 이중으로 가장 시달리는 사람들이었다.

예수 이전 시기에도 저항운동에 대한 로마의 탄압은 특히 잔인하였다. 시리아의 로마 총독 바루스는 2,000명을 십자가에 처형하였다.

열혈당원들은 자신들의 정치종교적인 이념으로 기원후 68년에 대제사장을 죽이고 권력을 장악하였다. 그들은 한 가문에서 새로운 대사제를 선정하였으나 기원후 70년에 로마정권은 이 찬탈 사건에 개입하였다. 그들은 마지막 한 사람까지 저항하며 성전을 옹호하였다. 이 사건은 예루살렘을 함락시킨 로마의 앙갚음을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 열혈당운동을 개혁운동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이 운동은 과거의 상황을 복원시키려는 성향이 강했다. 가끔 이 열혈당운동은 계급차별이 없는 사회건설을 목표로 하는 게릴라 운동으로 소개되지만 실상 그들에게는 거의 이러한 성향이 없었다. 이 운동에 가담했던 소작농민들은 절망적인 상황 때문에 무력투쟁에 휘말려 들었으며, 이념달성이라는 객관적 목표 때문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운동은 예수의 죽음 이후에야 비로소 확장되기 시작했던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로마제국의 식민지화 정책은 기존정치-성직계급제도의 매개역할을 통하여 달성되었다. 대제사장은 로마총독이 임명했으며 고위행정 관리들은 귀족가문으로부터 충당되었고 원래는 유다인들인 세리들이 세금징수를 맡고 있었다. 이러한 제도 때문에 로마와 팔레스타인 사회 사이에는 연계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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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과 종교

팔레스타인 같은 사회에서는 이념적 제도와 종교적 제도 사이에 거의 차이가 없었으므로 여기에서 우리는 그 둘을 하나의 실재로 다루겠다. 실상 사회적, 정치적 관계를 설명하고 합리화하는 이념은 팔레스타인 같은 사회에 있어서는 본질적으로 종교적인 색채를 지닌다.

우리는 종교지도자와 성전이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관점에서 매우 중대한 역할을 하였다는 것을 지금까지 보았다.

1세기경 이스라엘의 사회종교적 이념의 근거를 몇 마디로 요약하기는 매우 어렵다. 한 분이신 진실한 하느님께 대한 믿음, 이스라엘 민족의 유일신 사상이 바로 전체 이념체계의 바탕에 깔려 있다 .하느님은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을 이끌었고 이스라엘은 그분에게 충실해야 했다.

부족체제로부터 왕정으로의 변천은 예언문학에서 오늘날 현대용어로 계급사회의 출현이라 할 수 있는 악과 착취의 상징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 시점에서 예언자들의 쇄신의 역할이 두드러지는데 이들은 구세적 희망, 즉 하느님과 백성간의 새로운 계약과 공동체적인 운명의 새로운 예루살렘이라는 희망을 나타내었다.

기원전 2,000년경, 계시문학은 이스라엘의 종교적 이념으로 변화되고 있다. 계시문학은 원래 폐르샤의 영향을 받았으며 점차로 자연질서와 역사적 질서 사이의 연결을 짓고 최후심판, 부활 그리고 전 우주질서의 재창조뿐 아니라 개인적 구원의 개념도 발전시켰다. 이 계시문학은 페르시아의 도시사회 계층으로부터 종교적 이념을 발전시킨 짜라투스투라의 영향을 받았다. 유다교에서 이러한 영향은 특히 마카베오서에서 두드러지고 있다.

왕국에 관한 개념이나 천년왕국설을 강조하는 사상들은 구세주가 자연재앙을 몰고 재림할 것이며, 하느님의 왕국은 최후의 심판 후에 세워질 천국도시로 비유하고 있다.

종교사상의 변화

지금까지 드러난 다양한 사회계층이 지닌 종교적 이념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것도 필요하다. 가장 보수적인 사두가이파는 이스라엘의 법전인 토라에 근거를 두고 부활의 개념이나 종말론적이고 묵시적인 경향에 반대하였다.

한편 바리사이파는 이러한 종말론적이고 묵시적인 철학의 정수를 받아들였으며 어떤 바리사이들은 인간에 관한 비관론적인 사상을 발전시켜 엄격하고도 합법적인 복종으로 얻어지는 내세의 중요성을 강조하기조차 하였다. 이들의 이념은 개인구원에 종교적 중점을 두는 도시계층의 전형적인 이념일 뿐 아니라, 더 낮은 사회계층으로 옮겨가는 계층의 이념으로서 결국 묵시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경향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종교법 제정과 형법의 전문가들인 율법학자들은 유다의 전통에 관한 지식을 독점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대중에 대한 이념적 지배를 좌지우지하였다. 그들은 회당에서 안식일 예식을 집행하였다. 대체적으로 이들은 종말론적인 관점에 동조하였으므로 사제계층과 반대되는 입장에 있었다.

아론의 24지파로 구성되는 사제계층은 상류와 하류계층으로 분리되며 예배를 독점하고 있었다. 이들은 역시 아론의 한 지파인 레위인들의 협조를 받고 있었다. 에세네파는 세상과 고립된 삶을 지향하는 은수자 집단을 이루었다. 마지막으로 젤로트파는 정치적 집단을 이루고 메시아적 다윗왕정의 복고를 이념으로 삼고 게릴라전을 전개하였다.

위와 같은 다양한 사회계층은 하느님이 성전에 거한다는 공통적인 종교이념 아래 이스라엘 사회전체에 하느님 계약의 표지와 실재를 제각기 다양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복음의 사회적 측면

그 당시 팔레스타인과 같은 사회에서는 종교의 역할이 오늘날 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였음이 틀림없다. 초자연적인 것이 어디에나 있었고 신적 현존의 상징과 자리로서의 성전은 또한 정권과 금력의 중심지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본다면 종교적 차원의 행동이란 결코 다른 차원의 행동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이 분명하다. 오늘날 우리가 인간 삶의 다양한 영역에서 세속적인 것과 영적인 것,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는 것은 인류 초기사회에서는 결코 존재하지 않았던 경향인 것이다.

그러므로 현대적 관점에서 예수의 삶을 철저히 종교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잘못이라 하겠다. 그렇다고 예수의 말과 행적이 오늘날의 정치적 행동을 즉각적으로 합리화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성경에 대한 올바른 해석은 예수가 살았던 사회에 관하여 인류학적이며 사회학적인 지식을 파악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예를 들면, 예수가 가난한 이들 편에 섰을 때 우리는 그 당시 팔레스타인의 가난한 이들이 누구였는가를 알아야 한다. 순전히 영적인 해석은 과학적으로 볼 때 잘못이다. 사두가이파나 바리사이들에 대한 거부는 종교적인 태도 이상의 의미가 있는 행위이다. 또한 사도들의 선택은 그 당시 사회적인 상황을 볼 때 매우 중대한 의미를 내포한다.

구세주임을 선포하는 것은 다윗 복고주의 이상을 뜻한다. 종교적 특권을 무섭게 단죄하는 것도 정치적 경제적 차원의 행위를 암시하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가 그랬던 것처럼 상류층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또한 종교적으로 밑에 있는 계층의 안목으로 안식일이나 단식, 새 포도주의 비유 등 그의 종교적 가르침을 깨달아야 한다. 또한 성전의 파괴에 대한 예수의 생각도 성전을 단순히 종교적 상징으로서가 아니라 전체사회의 기본적인 상징으로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전통적이며 선(先)자본주의적 사회에서 이러한 모든 행동은 분명히 어떤 의미가 있다. 그리스도가 근본적으로 종교적 차원에서 행동했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그렇지만 팔레스타인의 사회에서 의미하는 종교적 차원은 오늘날 서양에서 의미하는 것과 매우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예수의 죽음은 로마제국의 권력과 유다사회 엘리트(대사제, 사두가이파 등)의 야합의 결과이며, 바리사이들과 바라바를 택했던 군중들의 야합 때문에 일어났던 사건이다. 예수의 가르침은 이러한 다양한 집단들이 인내할 수 있는 한계를 훨씬 벗어났던 것이며 그의 말과 행적이 의미했던 사회질서의 전복에 대하여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집단들도 이미 분명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의 가르침은 이처럼 종교적인 신앙일 뿐 아니라 기존 질서의 변화와도 관련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가 궁극적으로 지향했던 것은 “유토피아,” 즉 현대적 단어로 표현하자면 계급없는 사회였다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원출처] <예수는 어떻게 살았나-그리스도교적 사회활동>
[번역문 출처] <참사람되어>,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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