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침묵이신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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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침묵이신 그리스도
  • 미건 맥켄나
  • 승인 2018.08.16 11: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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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기 전에
나는 나의 입술에 침묵의 천을 짠다,
나의 머리에 침묵의 천을 짠다,
나의 마음에 침묵의 천을 짠다.

그리스도는 이사야서의 침묵하고 고통받는 종의 모습이다. 그분은 겸손하고, 비폭력적이며 기꺼이 십자가를 지고 벗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 삶에서 아버지 하느님과 친구들을 사랑하고, 십자가 처형, 죽음, 그리고 시간을 초월하여 사랑하는 존재이다.

그렇지만 그리스도는 권력 앞에서 당당하게 서있고 그분의 현존 자체가 육화한 진리이며 박해, 고문 혹은 죽음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분이다. 헤로데 앞에서, 빌라도 앞에, 산 헤드린 앞에서 침묵하나, 유다전통에 의하면 “침묵 중에 외치는” 존재이다.

희생자들을 위하여, 지상에서 고통받는 무죄한 이들을 위하여 말하는 모든 사람, 모든 순교자 옆에서, 모든 예언자와 진리를 증언하는 모든 사람들 옆에 그들과 함께 계시는 분이다. 하느님의 고통받는 종인 그리스도의 제자요 친구로 판정받으면 무엇이 결과로 따라오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분이 그리스도이다. 고통과 영광이 함께 있는 것이다.

 

Sacred Heart, 1905, George Desvallieres

이사야서에 나오는 '거룩한 침묵이신 그리스도'를 야훼 하느님이 어떻게 묘사하는지 귀를 귀울여 보자: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이,
내가 선택한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 그는 민족들에게 공정을 펴리라.
그는 외치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며
그 소리가 거리에서 들리게 하지도 않으리라.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그는 성실하게 공정을 펴리라.
그는 지치지 않고 기가 꺾이는 일 없이
마침내 세상에 공정을 세우리니
섬들도 그의 가르침을 고대하리라."
(이사야 42,1-4)

요한 복음에 의하면 유다와 로마 군인들의 무리가 그분을 체포하러 왔을 때 그리스도는 정원에 있다. 그리고 앞으로 나서며 예수님은 말한다: “누구를 찾느냐” 그들이 “나자렛 사람 예수요”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나다”하고 말씀하셨다(요한 18,4). 질문하는 대사제 앞에 서 있는 분이 예수님이다. 예수님은 대사제에게 차분하게 말한다, “나는 세상 사람들에게 드러내 놓고 이야기 하였다.”

그리고 잠시 후 곁에 서 있던 성전 경비병 하나가 예수님의 뺨을 치며 비난하였을 때, 예수님은 그에게 돌아서며 말했다: “내가 잘못 이야기 하였다면 그 잘못의 증거를 대 보아라 그러나 내가 옳게 이야기하였다면 왜 나를 치느냐”(요한 18,19). 다른 사람들이 그분을 비난하며 사형선고를 내리기 위한 구실을 찾고 있을 때, 빌라도 앞에 서 있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다.

그리고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왕이 아닌가 물었을 때, 그분은 진리의 말씀으로 대답한다, “내가 임금이라고 네가 말하고 있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요한 18,37). 오로지 진리만을 말할 수 있는 거룩한 침묵 그리스도이시다.

마태오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체포되어 산헤드린으로 끌려갔고 거짓으로 비난을 받았다. 그리고 대사제가 일어나 예수님께 “당신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소? 이자들이 당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는데 어찌 된 일이오” 하고 묻는데도(마태 26,62) 예수님은 입을 다물고 계셨다. 로마 제국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던 헤로데 왕 앞에 끌려갔을 때에도, 헤로데는 이것저것 물었지만 예수님에게서 아무런 대답을 얻지 못했다(루카 23,6-9).

바로 이분이 예수님이다. 그리고 십자가에 매달려서 백성들, 그분 조국의 지도자들과 종교지도자들, 군인들의 조롱을 받았지만 여전히 침묵하고 오로지 하느님께만 울부짖었던 분이 바로 예수님이다.

성 주간 동안에 읽는 예언자 이사야의 노래들은 깜짝 놀라게 하고, 소름끼치며 피 흘리는 모습의 나자렛 예수님, 하느님의 그리스도가 참으로 누구인가를 보여준다. 모든 판관들이 그 현존 앞에 일어서는 이 분은 침묵이시다. 언제 말하고 언제 서서 침묵으로 진리를 증언하며 악, 죄, 불의의 존재가 참으로 무엇인가를 밝혀야 하는지 알고 있는 존재의 심연이다. 그분은 한 마디 말도 없이 진리를 울리고 있다:

"학대받고 천대받았지만,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털 깎는 사람 앞에 잠자코 서 있는 어미 양처럼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
(이사 53,7)

 

거룩한 침묵 그리스도는 그분의 삶으로, 현존으로 말씀한다. 그리고 마지막 말씀으로 죽음의 침묵을 흔들어 놓는데, 그 마지막 말씀은 바로 그분의 죽음 자체이다. 그분의 죽음은 결코 반대할 수 없는 선언이다. 그분의 죽음 속에, 그분의 침묵 속에 그분의 충만한 생명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 거룩한 침묵은 언제 말하고 언제 말하지 말아야 하는가를, 언제 자기 자신을 보호하지 말아야 하는 때인지 알고자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영원히 현재 존재하는 실재이다.

거룩한 침묵 속에 혹은 거룩한 침묵을 친밀하게 알고 있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거룩한 침묵에 귀를 기울여보자: <묵상집>에서 도로시 데이는 말한다: “가톨릭일꾼의 입장은 여전히 똑같다. 우리는 그리스도교 평화주의자들이고 완전해지라는 권고를 따르려고 한다. … 우리는 이러한 신앙으로 인해 고통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고통이 우리의 다른 어떤 말들보다 더 결실을 맺을 것임을 안다.

혹은 시에나의 가타리나 성녀의 삶을 살펴보자. 14세기 이태리에서 가타리나는 사회문제들에 관하여 크게 말했다. 가난한 이들의 곤경과 전염병에 걸린 사람들에 관하여 말했다. 그리고 신학적 문제들에 관하여도 말했다. 교황과 주교들에게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에 대한 복종, 책임과 초대를 기억하고 교회의 부패를 드러내라고 말했다.

가타리나는 필요할 때 교회의 지도자들을 변화시키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로마에 말하러 갔을 때에도 그는 교황 우르바노 6세의 얼굴에 대고 말하였다: “세상은 침묵에 의하여 무너지고 있습니다.” 가타리나는 거룩한 침묵 그리스도를 알았고, 어떤 침묵들이 죽음을 가져오고 거짓인지 알았다. 반드시 말해야 할 때를 발견하는 것, 주위에 침묵을 격려해야 한다고 느끼는 것 그리고 진리라고 알 때에는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 침묵은 신앙을 키워주고 내적인 힘을 가져온다.

우리는 거룩한 침묵 그리스도 앞에 서서 기도한다. 그리고 우리는 교회의 오래된 기도 안에서 우리가 받은 세례를 기억하게 된다:

"당신은 하느님 앞에
그리고 천사들의 주인이신 분 앞에 서 있습니다.
거룩한 성령은 그분의 봉인을
여러분 각자의 영혼에 새기려고 합니다.
여러분은 위대한 임금의 섬김 안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움직이지 않고 그곳에 서서 머물며 하느님의 거룩한 침묵이 우리 정신, 영혼, 마음 속에 깊숙이 스며들게 해야 한다. 그렇게하여 우리의 삶과 행위가 이 진리, 이 거룩한 침묵과 용기로 물들어야 한다.

[출처] <자비가 넘치는 그리스도>, 미건 맥켄나
[번역문 출처] <참사람되어> 2011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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