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은 어떻게 어둠에 스며드는가
상태바
빛은 어떻게 어둠에 스며드는가
  • 진수미
  • 승인 2018.06.25 11:4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나의 아저씨>(tvN 수목드라마 2018.03.21.~2018.05.17)

빛과 그림자는 종교와 예술의 오래된 주제이다. 태초에 빛이 있으라 하자 빛이 생겨났고, 생명을 키우는 근원이자 존재가 드러나게 해주는 조명이 되었다. 그림자는 어떤가. 신은 그림자를 창조하지 않았다. 원 플러스 원처럼 빛과 더불어 생겨난 것. 너무 강렬한 태양 아래서는 생명도 메마른다. 그때 그림자는 구원이다.

세계를 이항 대립적으로 해석하면 그림자의 이러한 긍정성은 사라진다. 그것은 선과 대립하는 악이며 죽음이며 절망이 된다. <나의 아저씨>는 절망과 같은 어둠이 부드러운 빛에 용해되는 과정을 그린 드라마이다. 어둠을 주눅 들지 않게 만드는, 평범하지만 선량한 빛에 대한 이야기.

지안(이지은 분)은 상처 가득한 미성년의 시간을 보내면서 세계를 향한 마음의 문을 걸어 잠근 21살의 여성이다. 6살 때 가출한 어머니를 대신해, 말 못하고 거동이 어려운 할머니 봉애(손숙 분)를 부양하며 살아야 했다. 부고와 함께 어머니 빚이 지안에게 상속되고, 그녀는 사채업자에게 폭행을 당하면서 그것을 갚아왔다. 도움의 손길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녀의 불행을 감싸 안기는 역부족이었다. 중학생 때 할머니를 구타하는 사채업자에게 분노한 지안은 살인을 저질렀고, 이후 어두운 내면의 감옥에 스스로를 유폐한 듯 웅크리고 살아왔다.

40대 아저씨 동훈(이선균 분)은 가난하지만 남다른 가족애를 자랑하는 편모 가정에서 자란 삼형제 중 둘째이다. 그는 구조기술 전문가로, ‘삼안 E&C’라는 대기업에서 건축물 안전을 진단하는 부서의 장으로 일하고 있다. 이 직업은 화려함보다 일상의 균형을 추구하는 그의 성격에 잘 어울린다. 그는 세속적인 것에 욕심을 크게 부리지 않는다. 특유의 안정감을 바탕으로 타인에게 친절을 베풀고 생명을 지닌 존재에게 선량한 빛을 던지며 살아가려 하므로, 따르는 후배가 많다.

 

빛과 어둠의 대위법 같은 사람들

지안과 동훈 캐릭터는 드라마 초반에 빛과 그림자, 선과 악의 대립처럼 형상화된다. 첫 회 무당벌레 에피소드를 보자. 어느 날 사무실에 날벌레 한 마리가 들어오고, 이를 발견한 여직원이 비명을 지르자 모든 사람의 시선이 그리로 향한다. 파견직 사무보조원으로 동훈의 사무실에서 투명인간처럼 생활하던 지안도 눈길을 주지만, 이내 무관심한 표정으로 업무에 집중한다. 벌레가 비행을 멈추자 사람들은 그것이 해충이 아니라 무당벌레임을 알게 된다. 김 대리(채동현 분)가 그것을 때려잡으려고 하자 동훈이 말린다. 그는 벌레를 방생하고 싶다.

지안의 옷깃에 벌레가 앉게 되고, 동훈은 그녀에게 주의를 주며 다가가지만 지안은 아랑곳하지 않고 서류철을 들어 한방에 그걸 때려죽인다. 이 에피소드는 동훈이 생명을 아끼고 사랑하는 빛/선의 편에 서 있다면, 지안은 어둠/악/죽음의 편에 서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우연히 동훈이 잘못 전달된 뇌물 오천만 원을 받는 장면을 목격한 지안은 그것을 훔치려고 한다. 일이 꼬이면서 뇌물 봉투는 회사 쓰레기통에 버려지고, 뇌물수수 혐의로 실직 위기에 처한 동훈은 지안의 행동으로 인해 오히려 청렴한 이미지를 얻는, 전화위복의 상황이 전개된다.

 

호두알처럼 단단한 어둠

미성숙한 시기에는 선악을 가늠하는 절대적인 기준이 있다고 생각한다. 지안도 그랬다. 지안은 자신을 도와주는 사람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것처럼 군다. 딱 네 번. 그 이상의 친절은 없었다. 그 수치에 근거해서 지안은 도움을 주려고 다가오는 이들이 그녀의 어둠을 통해 자신의 빛을 돋을 새김하려 했다고, 세상의 친절과 선량함은 위선적이고 얄팍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아마 자존감이 형성되던 시기, 누군가의 친절에 기대야 살 수 있는 현실을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살인을 저지른 후에는 그것이 자신 내부에 도사린 흑점 같아서 마음을 열자면 사실을 말해야 했고, 그걸 알고 나면 사람들이 대부분 등을 돌렸기에 그녀는 내면의 어둠에 더 깊은 굴을 파고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전쟁터 같은 현실에서는 어두운 참호만이 기대어 쉴 수 있는 장소가 되는 것이니까.

할머니 봉애가 자신을 업고 골목을 올라 계단 끝 집에까지 데려다 준 동훈을 보고 “좋은 사람이지?”라고 묻자 지안은 경직된 표정으로 “잘 사는 사람들은 좋은 사람이 되기 쉽다.”고 내뱉는다. 하지만 잘 사는 모든 사람이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은 아니다. 또 지안을 돕는 동훈의 삶도 쉽지만은 않다. 그는 실업자가 된 형제들과 어머니를 부양하는 책임을 안고 있는 것이다.

성숙해지면서 우리는 확장된 세계를 만나게 되고, 도덕을 자신의 기준으로 수용하면서 선과 악에 대해 다시 사유한다. 동훈은 지안에게 그러한 생각의 길을 열어주는 어른이다. 지안이 자기방어처럼 네 번 이상 자신에게 잘해준다는 사람은 없다고 말하자, 동훈은 한 번도 안 한 사람에 비하면 그것도 착한 것이라고, 세상의 행위를 상대화하면서 관용하는, 성숙한 시선이 필요하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그러나 딱딱한 어둠 속에서 오랜 시간을 살아온 지안은 쉽게 자신의 생각을 바꾸지 않는다. 자신을 향해 내미는 도움의 손길에도 그녀는 감사하다는 표현을 하지 않는다.

성숙한 어른의 세계: “인간은 한 겹이 아니야”

지안에게 처음 울림을 준 말은 ‘착하다.’라는 한 마디였다. 지안의 거칠고 비사교적인 언행을 미루어볼 때 착하다는 말이 그녀의 것인 적이 거의 없었을 것이다. 지안은 삼안 E&C의 대표이사 준영(김영민 분)이 동훈의 아내 윤희(이지아 분)와 밀회를 즐긴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그에게서 거액의 돈을 받고 동훈을 회사에서 쫓아내는 일을 돕기로 한다. 사채업자 광일(장기용 분)에게서 벗어나는 것이 제1목표일 뿐, 타인의 삶은 안중에 없다. 이를 위해 그녀는 동훈의 핸드폰에 도청장치를 심고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고 그의 말을 녹음한다.

동훈은 마트에서 쇼핑카트를 훔치는 것처럼 밀며 달려가는 지안을 발견하게 되는데, 사회 규범을 위반-마트에는 카트를 가져 말라는 안내문이 있었다-하는 이러한 행위가 할머니에게 달구경을 시켜주기 위한 마음 때문인 것을 알게 된다. 그녀의 진심을 한 조각 읽게 된 동훈은 “착하다.”라고 중얼거린다. 핸드폰에 녹음된 이 말을, 지안은 반복해서 들으면서 위로를 얻는다. 이는 위악적인 태도로 어둠에 고립되려는 지안에게 ‘네 안에도 선한 빛이 존재하고 지금과 다른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고요히 알려주는 목소리였다.

회식자리에서 지안은 준영의 비열한 행동과 동훈의 어려운 처지를 목격한다. 이에 김 대리가 취중에 동훈의 무능력을 탓하자 “드러운 새끼!”라고 내뱉으며 그의 뺨을 때린다. 이들의 트러블을 중재하려고 동훈이 자초지종을 묻자, 지안은 김 대리의 말을 그대로 전달한다. 그러자 동훈은 인간이 한 겹이 아니므로, 자신도 남의 뒷이야기를 하는 때가 있다고, 그러므로 알아도 모른 척해주는 것이 예의라고 가르쳐준다.

지안은 “그러면 누가 알 때까지 무서울 텐데.”라고 대꾸한다. 이 말은 살인을 한 자신의 과거에 대한 말이지만 위선적인 태도로 부도덕한 행위/불륜을 일삼는 어른 세계의 폐부를 찌르는 말이기도 하다. 동훈은 그래도 나를 위해 때려준 건 고맙다고 말함으로써 사건의 해석 역시 한 겹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후 동훈이 김 대리와 감정을 풀고 사건을 정리하는 과정을 도청하면서 지안은 괜찮은 어른들의 세계를 하나씩 발견하게 된다.

 

공기 중에 풀어지는 어둠의 빛깔

동훈은 서서히 스며드는 빛과 같은 존재이다. 그는 자신의 인생론을 건축의 비유로 피력한다. “인생도 어떻게 보면 외력과 내력의 싸움이야. 무슨 일이 있어도 내력이 세면 버티는 거야.” 지안이 내력은 어떻게 만들어지냐고 묻자 그는 모른다고 답한다. 하지만 <나의 아저씨>는 빛과 어둠의 조화로운 만남으로 답을 제시하는 것 같다.

동훈이 발광하는 빛을 더 극단으로 가져가면 종교를 만나게 된다.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려고 출가한 겸덕(박해준 분)이 그 자리에 있는 것이다. 겸덕은 깊은 사유와 통찰을 주는 사람이겠으나 세속과 거리를 두었기에 우리 삶의 현실에 직접 침투하기 어렵다. 반면, 동훈은 어둠 속을 우리와 함께 뒹구는 세속의 이웃이다. 그의 빛은 일상의 어둠을 뚫고 나온 것이기에 어쩌면 더 성숙한 것일지도 모른다. 지안의 어둠을 풀리게 한 것은 강렬함과 선명도를 지닌 빛이 아니다. 그녀는 공기처럼 일상에 스며, 적당히 때가 묻고 부드러워진 빛에 이끌린 것이다.

말하자면, 카라바지오(Caravaggio, 1593-1610)의 강렬한 빛/어둠의 대비는 우리 시선을 강렬하게 붙잡지만 다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년)의 <모나리자>가 보여주는, 공기 중 빛과 어둠의 경계가 무화된 듯한 터치는 은근함과 부드러움으로 우리를 매료시킨다. 이 매혹은 세속적 경험에서 비롯된 성숙함에 기반한 것이 아닐까. 이처럼 <나의 아저씨>를 보는 시간은 성숙함에 대해 사유하는 흥미로운 시간이기도 했다.

좋은 여성 캐릭터 부재, 퇴행적 공동체 지향

<나의 아저씨>는 방영 중에 다양한 논란에 휩싸였다. 한 방송인이 드라마에 대한 호감을 SNS로 표현했다가 사과하는 사건까지 있었을 정도였다. 그 불만의 첫째는 ‘아재 미화’ 논란일 것이다. 대중의 판타지를 반영하는 것이 대중문화의 속성이니만큼 아저씨 세대를 겨냥한 드라마에 그에 대한 판타지가 나타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럼에도 이 논란이 끊이지 않는 것은 그만큼 이 드라마에 좋은 여성 캐릭터가 없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한다. 지안을 비롯해 정희(오나라 분), 유라(나라 분) 등, <나의 아저씨>의 여성들은 대개 남성에 대한 집착과 의존도가 강하거나 미성숙함을 특징으로 한다.

드라마가 강조하는 공동체가 혈연, 학연, 지연으로 묶인, 퇴행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점도 짚고 넘어갈 부분이다. 공동체가 터전으로 삼는 동네 명칭 ‘후계’는 드라마가 진보적/전위적인 가치를 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보여준다. 지안이 평안에 이르는 과정이 감동을 준 것은 그녀가 젊은 여성이어서가 아니라 주변부적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녀의 어둠에 빛이 되어준 아저씨의 스토리는 감동적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감동의 정체를 성찰해야 한다. 아저씨 삼형제와 지안이 환하게 웃으며 소파에 가족처럼 앉아있는 포스터는 이 드라마의 감동을 의심스럽게 하는 지점이다.

아저씨들의 친절을 한 몸에 받는 존재, 지안이 그들의 가족이 될 수도 있는 젊은 여성을 대표하는 것인지 우리 사회의 주변부적 존재를 대표하는지가 모호해지는 것이다. 나는 작품의 선의를 믿고 싶은 쪽이다. 그러므로 <나의 아저씨>를 불편해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작품의 긍정적 힘을 더욱 강하게 하기 위해서는, 전통적 연(聯)을 넘어 사회의 주변부 존재를 공동체의 카테고리에 묶어내는 작업이 좀 더 강조되었어야 하지 않나 싶다. 그러한 세계에서야 우리는 자신의 빛으로 스스로의 어둠을 밝히는 존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진수미 카타리나
글쟁이. 더불어 잘사는 세상 연구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