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교황이 군사정권에 협력했다는 낭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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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교황이 군사정권에 협력했다는 낭설
  • 한상봉
  • 승인 2018.06.25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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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하는 교황, 파파 프란치스코-16
아르헨티나 군부가 자행한 '아기 납치' 피해자들의 과거 시위 장면

베르골료(현재 프란치스코 교황)는 1967년 성 요셉 신학교에서 신학 과정을 마치고 1969년 12월 13일 부에노스아이레스 대교구 라몬 호세 카스텔라노 대주교에게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는 1973년 4월 22일 평생 예수회원으로 살겠다는 종신서원을 하고, 그해 7월 31일 불과 36세에 아르헨티나 예수회의 관구장으로 임명되었다.

베르골료 신부가 관구장이 되었던 그해 10월, 군부독재가 끝나고 도밍고 페론 대통령이 10월에 다시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페론 대통령이 1974년에 서거하고, 그의 부인이자 부통령이었던 이사벨 페론이 대통령직을 승계했지만, 다시 군부 세력의 영향력이 커져서 1976년 3월 24일 군사 쿠데타가 발생했다.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 장군이 페론 정부를 전복하고 반정부 인사들에 대한 가혹한 탄압을 자행했다. 불과 몇 년 사이에 3만 명이나 되는 사람이 실종되었고, 고문과 납치가 일상화되었다.

이런 파시즘 체제는 아르헨티나가 포클랜드 전쟁에서 영국에 패배한 뒤에 치러진 1983년 10월 30일 대통령 선거를 통해 민간 정부로 이양되면서 무너졌다. 그러나 군부독재가 행한 반인도적 범죄에 대한 청산 작업은 신속하게 이뤄지지 못했다. 군사 쿠데타에 가담한 이들과 군인들에 대한 소송을 금지한 ‘종지부 법’과 명령을 받아 임무를 수행한 사람에 대한 형사 처분을 금지한 ‘복종의무 법’ 때문이었다.

2004년 네스토르 카를로스 키르츠네르 정부가 집권해 이 두 법률을 폐지하고 나서야, 아르헨티나에서 과거 청산 작업이 시작될 수 있었다. 군부독재 시절에 비델라 장군 등 독재자들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임을 자처했고, 실상 몇몇 주교들은 독재 정권에 협력한 것이 사실이다. 군사정권은 공산주의 세력을 물리치고 가톨릭교회를 보호해야 한다는 구실로 폭력을 정당화했다. 당시 군부독재를 드러내고 비판한 주교는 드물었다. 오히려 어떤 식으로든 정치에 교회가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펴는 사람이 많았던 편이다.

카밀로 토레스 신부

그러나 한편에선 “나는 우리나라의 구체적인 상황에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이 길밖에 없다고 생각한다.”면서 콜롬비아의 밀림으로 들어가 게릴라 투쟁을 벌이다 1966년에 37세의 나이에 죽은 까밀로 토레스 신부 같은 이도 있었다. 그는 “사랑이란 단순히 감상적인 태도를 의미하는 게 아니다. 사랑은 사람들에게 비참한 생활 조건을 강요하는 기본적인 경제적 사회적 구조들을 변혁시키려는 의식적이며 지성적인 노력을 의미한다. 신앙은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성취된다. 그리고 사랑은 실제적인 효력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오늘의 세계에서 가난한 자들을 먹이고 헐벗은 자들을 입혀 주고 병들고 감옥에 갇힌 자들을 돌보아 주는 데에는 한 가지 방법만이 있다. 그리스도가 그렇게 하도록 우리를 초대하고 있는데, 그것은 그러한 환경을 매일 만들어 내고 확대하고 있는 사회 구조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혁명이다.” 라고 말했다. 토레스 신부는 사제들이 무장 투쟁에 나서야 할 만큼 납치와 고문, 암살로 얼룩진 당시 라틴아메리카 군부 정권에서 민중이 처한 현실의 가혹함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

이 격동의 시절에 아르헨티나 예수회 관구장을 맡았던 베르골료 신부가 군부독재에 저항하지 않았고, 심지어 독재자들과 결탁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2005년 콘클라베가 열리기 직전에도 한 인권변호사가 베르골료 신부가 1976년에 있었던 사제 납치 사건에 연루되었다고 비난하며 부에노스아이레스 법원에 고소장을 제출하기도 했다. 그해에는 <파기나 21> 기자였던 베르비츠키가 예수회 사제 두 명을 군부 정권에 넘겨준 장본인이 베르골료 신부라고 주장하는 <침묵>이란 책도 출간되었다.

베르골료는 이 사건에 대해 입을 열지 않다가 2010년에 가서야 법정 증언을 통해 진상을 밝혔다. 당사자인 예수회 사제 요리오 신부와 얄릭스 신부는 1974년부터 ‘가난한 이를 위한 우선적 선택’이라는 정신에 따라 빈민촌 바조 플로레스에서 활동했는데, 그 두 사람은 공산주의 사상을 유포하고 반정부 활동을 선동한다는 혐의를 받고 있었다. 1976년 3월에 아르헨티나에서 군사 쿠데타 소문이 퍼지자 당시 예수회 관구장이었던 베르골료 신부는 두 신부에게 예수회 공동체로 피신할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이들이 가난한 이들을 두고 혼자 몸을 피하는 게 도리가 아니라는 이유로 거부하자, 베르골료 신부는 두 신부에게 몸조심 하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아르헨티나 군부독재자 호르헬 라파엘 비델라 장군과 그 측근들 / 사진=위키피디아

당시 요리오 신부와 얄릭스 신부는 예수회를 떠나 다른 공동체를 세울 계획을 가지고 있었는데, 당시 예수회 총장이었던 페드로 아루페 신부가 거취를 결정하라고 통보하여, 결국 두 신부는 1976년 3월 예수회에서 공식 탈퇴했다. 그런데 얼마 후인 5월 23일 아침, 국가 정보기관 요원들이 요리오 신부와 얄릭스 신부를 강제로 연행했다. 이 두 명의 사제는 5개월 동안 수갑을 차고 눈을 가린 상태로 구금되었다가 석방되었는데, 그사이에 예수회에서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했다는 배신감에서 베르골료 신부를 원망했다. 그리고 베르골료가 두 신부를 군부에 밀고한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했다.

그러나 1976년 9월 중순, 베르골료 신부가 얄릭스 신부의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베르골료가 두 사제의 석방을 위해 갖은 애를 썼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얄릭스 신부의 석방을 위해 여러 번 정부에 로비를 했지만, 지금까지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희망은 있습니다. 저는 이 사건을 ‘제 문제’처럼 여기며, 반드시 해결할 것입니다. 제가 신앙 문제로 얄릭스 신부와 이견을 보인 것은 사실이지만, 현재 상황에서 그건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위르겐 에어바허 <교황 프란치스코>재인용)

베르골료 신부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비델라 대통령과 리오 마세라 해군 사령관도 여러 차례 만났다. 이런 노력 끝에 10월 23일 5개월 만에 그들이 석방되었다. 요리오 신부는 다시 예수회에 입회하지 않았지만, 그 후 얄릭스 신부는 예수회에 재입회하여 활동했다.

베르골료가 교황으로 선출된 뒤에 이 논란이 다시 불거지자 얄릭스 신부는 2013년 3월 15일과 3월 20일 이 사건에 대해 적극 해명하는 글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 해명서에서 얄릭스 신부는 “베르골료 신부에 의해 우리가 감옥에 구금되었다는 주장은 거짓”이며, 자신들이 구속된 것은 게릴라 활동에 가담했던 어느 여성 교리교사의 밀고 때문이었다고 고백했다. 

[출처] <행동하는 교황, 파파 프란치스코, 한상봉, 다섯수레, 2014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일꾼> 편집장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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