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항쟁과 천주교] 우리들은 아름다웠고, 인간의 정은 영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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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월항쟁과 천주교] 우리들은 아름다웠고, 인간의 정은 영원하다
  • 이명준
  • 승인 2018.06.25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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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회

6월항쟁 과정에서 천주교계가 한 역할을 정리하면서 다음의 몇 가지를 평가하고자 한다. 우선 천주교회를 이끄는 사제들의 지대한 역할과 노력을 기억해야 한다.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한 많은 주교들 그리고 전국사제단 신부들의 노력이 6월항쟁의 마디마디마다 큰 지렛대가 되고 디딤돌이 되어 주었다. 광주교구 신부들의 단식기도로 시작된 신부들의 저항은 단지 천주교 신자들을 참여하게 한 것에 머물지 않고, 전 국민이 참여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둘째, 천사협을 비롯한 천주교계의 다양한 운동조직들은 자신들의 독자성과 조직적 성과보다는, 민통련 중심으로 적극적인 연대투쟁의 중심이자 지원군으로 자신의 역할을 묵묵히 수행했다. 천사협과 가농의 회원들이 민통련과 국본의 본부는 물론 지역의 각 지부에서 주력부대를 형성했다. 뿐만 아니라 많은 지역에서 신부들이 지부의 의장이나 지도부로 핵심 역할을 했고, 자임하여 권력에 맞서는 울타리가 되어주었다.

셋째, 천주교계는 6월항쟁의 전 과정에서 일반 시민들이 공감하고 참여할 수 있도록 대중투쟁의 구호와 방법을 선도적으로 제시했고 모범을 보여주었다. “동장에서 대통령까지 우리들의 손으로”라는 구호를 천주교계가 최초로 제시한 것이 그 한 예다. 이는 불쑥 아이디어 차원에서 제기된 것이 아니었다. 사제단과 천주교 사회운동 진영에서 운동권 중심의 과격한 투쟁이나 이념 지향적 투쟁 이슈가 아니라 국민이 공감할 수 있는 대중투쟁의 목표와 이슈를 줄곧 고민한 결과이다.

당시 수많은 이슈들 중에서 직선제 개헌을 최소 목표로 구호로 정리하고, 이를 국민적 요구로 통일시켜 가는 데 있어 천주교계의 노력이 큰 몫을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천주교계는 또한 평화시위의 모범을 적극적으로 보여 주었다. 각종 미사를 통해 신자들과 공감하고 수녀들이 촛불행진을 하거나 꽃을 들고 행진하는 등의 비폭력저항운동의 실천적 모범을 보여주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국본 결성과 관련하여 천주교계의 숨은 노력과 역할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양 김을 중심으로 한 민추협과의 연대투쟁을 많은 이들이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던 당시에, 사제단은 치열한 토론을 통해 이를 바꾸는 물꼬를 텄다. 나아가 천주교계 인사들은 시민사회와 정치권의 연대를 통해 전선을 확대하고 국민적 참여를 이끌어 내기 위해 정치권과 개신교계 등과 많은 물밑 노력들을 수행했다.

6월항쟁은 국민이 만든 승리였다. 6월항쟁의 시작과 전개 그리고 그 성공에 있어 유일하게 찬사를 보내야 하는 대상은 ‘민주화 열망을 가진 국민’이라는 역사적 실체뿐이다. 국민이라는 이름이 추상성과 부정형의 통칭이긴 하나, 대다수의 국민이 거리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직선제라는 하나의 기본 권리를 쟁취하여, 이를 기반으로 우리 사회의 민주적 변화를 만들고자 했던 다양한 노력의 총합이 6월항쟁이라 할 수 있다. 우리 모두가 아름다운 혁명의 기획자이자 행위자였다.

국민이 강물이라면 그 속에 포함된 진영, 세력, 정파, 그룹, 조직, 개인은 그 물줄기들일 뿐이다. 그들의 수고와 결단이 모이고 모여 말 그대로 굽이치는 역사의 큰 강물이 되었다. 많은 단체와 개인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다. 공명심도 자찬도 내려놓아야 한다. 우리가 굳이 부문별 역할과 활동상을 기록하는 것은 6월항쟁의 세세한 물줄기들의 실상을 기록하기 위해서 일뿐이다. 역사에 대한 기록의 구체성이 가져올 이점에 대한 기대 때문이다. 누구의 역할이 크고 작았음을 비교하는 것이나 공과 치사의 몫을 분별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앞서 정리하였던 천주교의 활동 또한 이러한 차원에서 기록되었음을 밝혀둔다.

이제 마지막으로 개인적 소회를 밝히고자 한다.

돌이켜보면 6월항쟁은 민주화라는 큰 물줄기를 바꾸긴 하였지만, 국민이 손에 쥔 민주화의 열매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과정은 혁명적이었지만 결과는 혁명적이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6월항쟁은 정치권 중심의 헌법개정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대선패배로 인해 민주주의 공고화는 우리들에게 두고두고 시간과 분투를 요구했다. 30년이 지난 2017년, 우리는 민주주의 혁명을 다시 만났다. 바로 촛불혁명이다. 6월항쟁과 투쟁의 방법, 조직, 이슈, 참여자들 모두가 판이하게 달랐지만 민주주의를 향한 국민적 열망은 한결같았다. 현직 대통령을 탄핵으로 몰아냈던 촛불혁명의 승리에 우리는 자부심 가득한 마음으로 만족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도 해본다. 아직은 해야 할 일은 태산이고 갈 길이 멀기 때문이다. 민주적인 문재인 정부가 들어섰기에 촛불의 성과도 촛불의 아름다운 과정처럼 한결같기를 기도해 본다.

성유보, 이명준, 황인성, 김도현 네 사람이 의기투합하여 이 책을 기획했던 애초의 문제의식은 사실 근현대사에서 몇 안 되게 성공적이었던 전선체로서의 국본의 실체를 생생하게 기록하는 것이었다. 그 중에서 특히 국본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어떤 노력들과 헌신적 고뇌들이 있었는지를 충실히 드러내고 싶었다. 국본의 역할과 6월항쟁이라는 주제는 다양한 각도에서 조명될 터이나, 국본을 결성하는데 최선을 다했던 사람들의 기억과 회고를 통해 국본의 결성에 있었던 역사적 헌신들을 기록하는 것을 자임한 것이었다.

애초의 기획의도가 원고에서 잘 정리되었는지 걱정이다. 무엇보다도 이 책을 마무리해야 했던 성유보 형이 초고를 남기고 유명을 달리하였다. 애초의 기획의도와 각자의 글에 대한 평가와 우리들이 자임했던 작업의 평가를 형과 함께 할 수 없다는 사실이 한스러울 뿐이다.

아, 성유보. 돌이켜 보면 1975년 겨울 서대문구치소에서 통방을 통해 한수 한수 바둑을 두며 시작된 인연이었다. 그렇게 바둑 한 판을 두면 하루가 가던 시절의 추억은 이후 50년 동안 더 뜨겁게 이어졌는데, 촛불로 세상은 바뀌었고 이렇게 책도 나오게 되었는데, 그는 가고 없다. 국본 결성의 여러 고비마다 형은 늘 말했다. “군대만 안 나오면 우리가 이긴다.” 그의 국민에 대한 굳건한 믿음, 그리고 통 큰 전략적 판단, 국본의 운영과 전술을 총괄하던 그의 헌신을 역사는 꼭 기억하리라 믿는다. 형이 세상을 떠나기 1주일 전에 안국역에서 헤어지며 “겨울 되니 건강 조심 합시다”라고 건네 말이 마지막 인사였다. 세월은 무상하나 인간의 정은 영원하다는 걸 믿으며 존경과 그리움으로 그를 가슴에 간직할 뿐이다.

또 한 사람, 6월항쟁의 과정을 기록하면서 특별히 김승훈 신부님을 떠올려 본다. 그분은 민주화운동 진영이 하려고 했던 모든 것을 도와 주셨던 분이다. 싸움에 앞장 서 달라면 앞장섰고, 돈이 필요하면 돈을, 몸을 숨겨 달라면 거처를, 진실이 필요할 때 폭압정권에 맞서 두려움 없이 폭로를 해주셨다. 그분의 도움을 알게 모르게 받은 사람들은 여전히 그의 근사한 풍채와 미소를 떠올리며 가슴 뜨거움을 느낄 것이다. 그분도 세월을 따라 잊히고 있다. 기념사업에 특별한 관심을 두지 않는 천주교계의 탓도 있으려니 짐작되지만 안타깝고, 또한 사무치게 그립다.

[출처] <6월항쟁과 국본>, 민주운동기념사업회, 2017 

이명준
천주교 인천교구 홍보과장 근무 중 민청련 부의장 역임. 민통련 청년위원장,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간사 역임. 1987년 6월항쟁 당시 4인 실무기획팀으로 민주헌법쟁위국민운동분부 결성에 참여. 평민당 기획조정실장, 비서실 차장 역임. 정계은퇴 후 (주)아이마스 회장 역임. 현재 환경재단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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