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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 로메로] 하느님은 민중의 가슴 속에 계신다오스카 로메로-16

사목작업에 대하여 성찰하면서 로메로 대주교는 언젠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선한 목자가 되기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들은 그들의 권리를 옹호하고 그들의 목소리가 되라는 부름을 받은 사람들을 기꺼이 섬기는 백성입니다. 그래서 나로서는 그런 관대한 칭찬을 가져온 섬김보다 깊은 만족으로 저를 채우는 것이, 의무이며 숙제입니다."(로메로, 1979년 11월 18일 강론에서)

한 걸음씩 백성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면서 로메로는 다른 어떤 영적 훈련도 건드릴 수 없었던 깊은 정신, 영을 자기 안에서 발견하였다. 사람들을 동반하면서, 그는 가는 도중에 삶과 하느님에 대한 그의 가장 근본적인 이해에 도전하는 고통을 발견하였다. 예레미야와 함께 로메로는 말할 수 있었다, “평화를 바랐으나 좋은 일 하나 없고 회복할 때를 바랐으나 두려운 일뿐입니다”(예레 14,19).

로메로는 그 두려운 일, 폭력을 피하려고 하지 않았으며, 피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매 일요일마다 그는 강단에서 붙잡혀 있는 사람들, 실종된 사람들, 살해된 사람들의 이름을 거론하면서 동반의 직분을 공개적으로 보여줄 수 있었다. 또한 그는 고문자들과 살해자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기를 거듭 요청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형제들과 자매들이여, 저는 너무나 자주 말해왔고 라디오에서 말한 것을 되풀이 말합니다. 아마도 수많은 불의와 폭력 행위를 저질렀고, 수많은 가정에 눈물을 가져온 사람들, 수많은 살해로 피의 얼룩을 지닌 사람들, 고문으로 손이 더럽혀진 사람들, 양심이 무디어진 사람들, 장화 밑에서 사람의 그 품격이 실추되고 고통받으며 아마도 죽고 싶은 심정으로 있어도 냉담한 사람들 모두에게 다시 말합니다. 당신들의 범죄에 머무르지 마십시오. 그것들은 추하고 끔찍합니다. …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당신들을 부르시고 용서하십니다."(로메로, 사랑의 폭력에서)

 

영화 <로메로> 중에서

용광로의 시간을 사는 가난한 이들

예레미야처럼, 가난한 사람들은 “용광로의 시간”을 살고 있었다. 죽음이 승리했다, “죽음이 우리 창문을 넘어 들어오고 있다. 죽음은 우리 궁궐에까지 들어오고 거리에서 어린아이들을, 광장에서 젊은이들을 쓰러뜨린다. 너는 말하여라. -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 사람의 시체가 들판의 거름처럼 수확하는 사람 뒤에 남은 곡식 단처럼 쓰러져 있는데 아무도 거두려 하지 않으리라”(예레 9,20-21).

교회에 보내는 서간에 있는 두 개의 다른 이야기들은 전쟁기간에 가난한 사람들이 어떻게 삶과 죽음의 투쟁을 겪었는지 일별하게 해준다. 그리하여 어떻게 가난한 사람들이 죽음의 세력에 저항하는 주창자들이 되었는가를 알려준다. 산살바도르 변두리의 가난한 이웃지역에 살았던 한 나이든 여자 농부 야신타는, 당시의 공포를 회상하였다: “밤이 오면 저는 비둘기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러면 멀리 날아가서 이 무서운 시간에 집에 있지 않아도 되니까요.”

"하느님은 죽었어. 우리가 신이야"

어느 날 밤, 죽음의 분대에서 여섯 남자들이 무기를 찾으려고 야신타의 오막살이에 왔다. 무기를 찾지 못하자, 그들은 가족이 긴 밤에 집을 밝히는데 쓰는 옥수수 껍데기 부대를 엎어버렸다. 그들은 야신타에게 총을 겨누면서 움직이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나서 남편을 보는 앞에서 쓰러뜨리고 발로 밟으며 걷어찼고 목을 부러뜨렸다.

“하느님께서 당신들이 한 짓을 보고 계십니다,” 야신타가 그들에게 말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이 부끄러운 행위에 대하여 당신들이 대가를 치르도록 하실 것입니다.”

“하느님은 죽었어!” 그들 중의 하나가 외쳤다. “이제 우리가 신이야.”

그들은 제일 큰 두 딸들을 밖으로 끌고 나갔다. 세 남자가 딸들을 때리고 나서 강간했다. 그들이 일을 끝냈을 때, 야신타는 총으로 위협하는 그들에게 물을 주어야 했다.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 만일 말을 하면, 우리가 밤에 와서 모두 죽일 거야.”

제일 어린 다섯 살짜리 딸은 일어난 모든 일을 목격하였다. 그 이후 아이는 거의 말을 하지 않고 울기만 한다. 야신타의 두 딸들은 임신을 했고, 남편은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며 야신타는 공포에 질려 있다.

잔혹한 신과 투쟁하는 로메로

이런 광경들이 전쟁 전 엘살바도르 전역에서, 가난하고 힘없는 수백의 백성들이 사는 곳에서 밤마다 되풀이 되었다. 이런 상황의 3년 동안, 로메로 대주교는 새로운 “신들”과 대면하기를 결코 멈추지 않았다. 로메로와 가난한 이들의 교회는 비밀경찰이 그들의 M-16 총, 폭탄, 그리고 고문실로 말소시킬 수 없는 한 공간을 유지하기 위하여 투쟁했다. 그곳은 증언의 공간이었다.

만일 가난한 이들의 교회가 생명을 지킬 수 없다면, 국가가 절대적인 복종을 요구한다 해도, 적어도 그들은 생명의 신성함에 대한 증언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었다. 로메로는 백성들을 보호할 수 없었다. 군대에 탄압을 중지하라는 명령은 실패했다. 그렇지만 그가 실패하지 않았고, 그의 백성이 넘어지지 않았던 자리는 복음에 대한 충실함의 자리다.

야신타는 옳았다. 하느님은 여전히 현존하셨다. 비록 그의 딸들이 끌려 나가 강간을 당하고, 남편의 목이 부러졌어도 그분은 함께 계셨다. 죽음의 신들은 생명의 하느님을 죽일 수 없었다. 야곱처럼, 백성들이 하느님께 대한 그들의 믿음을 유지하는 한, 고문과 십자가 처형 가운데에서도, 권력가들은 승리를 차지할 수 없었다. 어떤 인간의 논리로도 엘살바도르의 백성들이 견디었던 비참과 공포를 납득할 수 없다. 악은 설명될 수 없고, 다만 저항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밀려난 사람들의 복음은 세상의 논리를 뒤엎는다. 낙오된 이들은 역사에 드러난 하느님의 얼굴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결단입니다. 즉 육화하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느님인 그리스도가 비천한 인간이 되었고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살았고 십자가 위에서 죽기까지 했다면, 우리의 그리스도교 신앙 또한 같은 길을 살아내야 합니다. 가난한 이들과의 연대라는 투신을 살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감히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로메로, 사랑의 폭력에서)

그들은 영성을 말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떤 영성이 기초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을 활성화시키고, 그들을 동반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구체적으로 표현되는가? 그들은 어떻게 신앙을 지키고 서로를 격려했는가? 사람들은 어떻게 가난한 사람들을 동반했는가? 그들의 영성은 어떻게 로메로에게 영향을 미쳤고 엘살바도르의 교회에 충격을 주었는가?

살바도르 농민들과 노동자들은 “영성”에 대하여 말하지 않았다. 영성은 성직자들을 위한 것이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가난한 살바도르 사람들은 그들 자신을 결코 영적 교사로 보지 않는다. 그러나 만일 정의에 대한 그들의 열정에 불을 밝힌 “영성”에 관하여 말해야 한다면, 그들은 미스티카(신비)에 대하여 말할 것이다.

미스티카는 사람들을 서로 일치시키는 볼 수 없는 결속을 가리킨다. 우리를 서로 형제자매라고 부르도록 허용하는 하나된 마음의 결속을 의미한다. 미스티카는 공동체의 영이다. 미스티카는 개인을 넘어서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이 모여 있는 그곳에 내재한다. 해방과정의 미스티카는 공동체에서 드러나는데, 그것을 가난한 사람들은 하느님 현존의 표징으로 봉헌한다.

미스티카는 예언자가 되기를, 심오한 공동체의 기도, 그리고 자기-이익을 변화시키고 정화시키는 모두의 필요에 대한 의식을 요청한다. 미스티카는 다른 사람들이 살 수 있도록 공동체가 자기를 무릅쓸 수 있게 만든다. 미스티카는 당신 자신을 가난한 사람들의 명분에 내어놓는 능력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해방 과정의 이러한 차원은 모라잔의 기초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했던 성찰에 분명하게 자리 잡고 있다. 이 공동체는 그들의 영성을 묘사하기 위하여 불타는 오코테 가지의 빛을 사용하였다. 여기 그들의 삶을 살아있게 만든 영성, 미스티카에 관한 성찰이 있다:

"죽은 것 같은 석탄에 어떤 사람이 수차례 바람을 불어 넣으면 석탄은 빛을 내기 시작하고 숨을 계속 훅훅 불어대면 오코테 나무에 불길이 일어납니다. 우리의 삶에도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숨길이 오고, 바람은 우리에게 밤을 깨뜨리는 빛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공동체는 살아있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오셨고 가난한 사람들은 다른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믿음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 이 책은 또르띠야를 뒤집는 것 같이 전복적입니다. 왜냐하면 왕들과 제국들의 질서를 뒤집어 가난한 사람들을 위에 자리 잡게 하기 때문입니다. … 우리가 성서를 발견하는 것은 지진이 일어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 후, 로메로 대주교가 왔습니다. 그는 탄압 한 가운데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그의 예언자적 목소리는 오코테 나무에 바람을 불어 넣었습니다. 붉은 석탄은 불꽃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한 것은 대주교님입니다. … 우리는 그리스도교 신앙이 또한 과제이며 의무라는 것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여 우리 가난한 남자 여자들은 바깥사람들, 위대하고 강력한 사람들의 가짜 약속들을 믿는 것을 그만 두기 시작하였고, 우리의 이웃에게 돌아서, 그들과 함께 성찰하고 함께 조직하며, 함께 믿었습니다. … 하느님을 믿으면서 그리고 우리의 형제자매들을 믿으면서, 우리는 우리의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미스티카, 신비의 시간은 그들 안에서

미스티카는 역사에 관한 모든 것과 관계한다. 이런 의미에서 가난한 사람들의 영성은 개인주의적이고, 지식 있는 사람들의 영역에 속하고, “진보적인” 수도승들의 관상적 영성이라는 우리의 개념을 뒤엎는다. 미스티카는 역사의 일상적인 사건들 속에 있는 특별한 것들을 드러낸다. 미스티카는 안으로부터 하느님의 소리를 개인적으로 듣는 것보다는, 우리 가운데 있는 가난한 사람들의 울부짖음과 작은 속삭임 속에 드러난 하느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라고 요구한다.

살바도르 농민들과 노동자들은 그들이 고문자들을 대면하는 시간, 가혹한 고립의 때가 온다는 것을 알았다. 엘살바도르의 가난한 사람들은 영혼의 어둔 밤을 잘 알았다. 그들은 비유적으로 그리고 실제로, 벌거벗고 홀로 하느님 앞에 서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고 이해하였다. 매일 같이 그들은 정화, 깨우침, 그리고 관상적 일치라는 전통적 영성의 단계들을 살았다.

그들은 고문을 당하면서 단지 육체의 정화를 경험했을 뿐만 아니라, 수치를 당하고 괴로워할 때 아무리 울부짖어도 세계가 외면했을 때에 여전히 하느님께 매달리며 영혼의 심연 속에서 정화를 경험하였다. 그러면 하느님의 말씀은 그들에게 응답하며 그들의 투쟁에 빛을 비추었고, 특히 순교자의 영에 스며있을 때 공동체의 결속은 깊은 친교감을 주었다.

미스티카는 사람들로부터 높이 그리고 멀리 떨어져 있는 갈멜산으로 올라가는 것보다는 함께 생명과 희망과 사랑을 간직하는 일상의 과제 속에 스며드는 것이다. 이 미스티카가 로메로를 변화시켰다. 세상의 가슴과 그리스도 교회의 가슴은 교회 건물이나 교회법에 담기지 않는 신비다.

"하느님은 역사 속에서 구원하십니다. 각자의 삶, 각자의 역사는 오시는 하느님을 만나는 자리입니다. 그분을 만나러 사막으로 갈 필요가 없으며, 세상의 특별한 곳으로 갈 필요가 없다는 것이 얼마나 만족스러운 일입니까. 하느님께서는 여러분 자신의 가슴 속에 계십니다."(로메로, 사랑의 폭력에서)

[원출처] <오스카 로메로-삶과 글에 관한 성찰(1917~1980)>, 마리 데니스, 레니 골든, 스코트 라이트
[번역문 출처] <참사람되어> 2017년 11월호

[ 가톨릭일꾼 www.catholicworker.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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