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내 나는 종교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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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내 나는 종교의 시대
  • 유대칠
  • 승인 2018.05.03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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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칠의 아픈 시대, 낮은 자의 철학 28]

“역사는 심판에 의하여 구원되는 법이다”

함석헌의 말이다. 맞는 말이다. 심판 없는 역사에 구원은 없다. 역사는 심판에 의해 구원되는 법이다. 심판 받지 않은 죄인이 선인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세상에서 구원을 기대하긴 어렵다. 어쩌면 이것은 상식이다. 누구나 아는 상식이다. 심판 없이 악인이 자신의 과거를 미화하고 왜곡하여 만든 역사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선은 힘을 잃을 것이고, 선한 희망 역시 발하기 어려울 것이다.

설사 잘못이 드러나 책임을 져야 한다 해도 진정한 마음과 올바른 실천 없이 그저 입으로만 ‘미안하다’, ‘죄송하다’, ‘새롭게 태어났다’는 말하는 곳에서도 구원을 기대하긴 어렵다. 그런 곳에선 새로운 삶, 희망이 참으로 기쁘게 자신을 드러내는 그런 새로운 삶을 기대하긴 어렵다. 역사는 심판에 의하여 구원된다. 죄인은 죄를 지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 새로운 삶을 살겠다고 입으로 말한다고 어떤 새로움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온 삶으로 그 새로움을 살아가야 한다. 정말 새로워져야 한다.

 

사진출처=pixabay.com

요즘 종교의 악행을 보면 대단하다. 그리스도교도 불교도 어느 하나 제대로 이 세상 민중의 아픔을 온힘을 다해 안아주지 못하고 있다. 성폭력에서 노동탄압, 인권유린 거기에 비자금 조성까지 참으로 다양한 방식으로 다양하게 사악한 일을 한다. 천상의 가치를 추구한다는 그리스도교 성직자와 참다운 불성을 이루겠다는 불교의 수도자가 말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이런 사람들이 말이다. 이단종교를 조심하라며 참다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가라 소리쳐 외치고 매주 주보에 글을 올리는 가톨릭교회가 말이다.

"설마 그 정도는 아니겠지"라는 작은 희망도 무너뜨리며 참으로 다양한 악행을 다양한 방식으로 한다. 대구대교구의 희망원 사태를 보자. <성경>을 들고 하느님의 사랑을 이야기하는 이들이 사회적 약자를 이용한다. 예수가 가장 먼저 다가가 사랑하고 안아준 이들을 그의 사랑을 본 받아 살겠다는 이들이 이용한다.

그런 가운데 누군가는 외롭게 죽어야했고, 또 누군가는 감금을 당해야 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성서를 들고 하느님의 사랑을 이야기하는 이들로부터 말이다. 이 땅의 ‘가치’가 아닌 하느님의 ‘가치’를 따라 살아간다는 이들로부터 말이다. 지상의 금전이니 명예가 아닌 천상의 가치를 따라 살아가겠다는 이들로부터 말이다. 예수의 길을 걷겠다는 이들로부터 말이다. 바로 그런 이들로부터 사회적 약자인 그들은 철저하게 외로운 고통을 당해야했다. 공감하고 함께 울어줄 것이라 기대한 이들로부터 철저하게 배신당한 셈이다. 그 고통은 생각만으로도 힘들다.

물어보자. 참된 신앙이란 무엇인가? 공감 없이 그저 자신들끼리 모여 앉아 기도하고 묵상하는 것이 참다운 신앙인가? 그런 이기적인 신앙이 참된 신앙이란 말인가? 함석헌은 ‘공감’없는 종교는 상식적이지 않은 종교이고, 절대로 건전한 종교, 올바른 종교가 될 수 없다 한다.

“상식적이지 못 되는 종교는 건전한 종교가 못 된다. 상식적으로 못 된다는 것은 고루한 이른바 고린내 나는 신앙이란 말이다. 그것은 굳어진 종교, 교리적인 종교, 틀에 박힌 종교다. 그런 종교는 일반 사회에 대해 설득력이 없다. 그러므로 사회를 건지지 못한다. 교회당 안에서는 열심이지만 일단 넓은 세상에 나오면 무력하다.”

교회의 밖에 어떤 아픔이 있는지, 자신들의 이기심으로 누가 어떤 눈물을 흘리는지도 모르고 자신들끼리 모여서 천국을 이야기하는 매몰된 종교, 틀에 박힌 종교, 어떤 공감의 힘도 없는 종교, 이러한 종교는 향기가 아닌 고린내가 나는 종교라 비판했다. 맞는 말이다.

대구대교구가 운영하는 대학에 비리가 있어 보인다는 사실이 방송되고, 복지 기관의 비리로 사제와 수녀가 처벌 받는다 해도 교회의 잘못을 비판하는 이들이 많지 않다. 그 악행으로 힘든 시간을 보냈을 이들의 아픔에 대한 공감과 사욕을 채운 종교인에 대한 비판 없이 또 자기들끼리 앉아 공감 없는 기도를 이어간다. 자기들끼리 봉사하고 헌신한다. 교회당과 성당 안에서 그저 열심이다. 하지만 밖에선 무력하다. 교회의 밖에 힘을 쓸 수 없는 복음이 복음인가? 그것이 사랑인가? 그것이 참다운 종교인가? 입버릇처럼 이야기하는 공공선과 복음의 보편성은 그저 말장난뿐인가.

심판 없는 역사엔 구원이 없다. 종교 역시 마찬가지다. 심판 없는 종교에 구원이 없다. 참회 없는 종교에 구원이 없다.

요즘 우리의 종교를 생각한다. 천상의 가치는 어디로 사라졌는가? 자신을 생각하는 ‘이기’보다 우리를 생각하는 공감과 공존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상식에 미치지도 못하는 이들이 공공선을 이야기하고 사랑을 이야기하고 예수의 길을 이야기한다. 지금이라도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는 종교, 교회와 성당의 밖으로 고린내가 아닌 향기를 내는 그런 종교와 신앙이 되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종교는 무신론자가 아닌 스스로의 악으로 무너져 사라지게 될 것이다.

유대칠 암브로시오
중세철학과 초기 근대철학을 공부한다. 
대구 오캄연구소에서 고전 세미나와 연구, 번역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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