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나는 하느님을 뵙고야 말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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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나는 하느님을 뵙고야 말리라"
  • 리차드 로어와 죠셉 마르토스
  • 승인 2018.04.30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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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와 욥기-3] 욥

창세기는 행복한 결말로 끝난다. 사실 창세기는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이 하느님을 믿을 때마다 모든 일이 잘 풀렸으므로 여러 번의 행복한 결말이 있다. 그러나 실제 우리 삶은 그렇지 못하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이 비참한 결과를 맞는 경우가 종종 있지 않는가? 또 하느님에 대해 일말의 관심조차 없는 이들이 캐딜락을 몰고 편안하게 노후를 보낸다. 도대체 왜 그런 것일까? 성서가 우리를 놀리고 있는 것인가? 욥기의 저자가 고민한 문제가 바로 이것이다.

이스라엘은 사후세계를 믿지 않았다

욥기가 쓰여진 시대, 즉 유배에서 돌아온 유태인들은 사후 세계를 믿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금도 믿지 않는다). 유대교는 과거는 물론 현재에도 이 세계 중심의 종교이다. 유태인들에게 있어 하느님과 같이 걷는 것은, 주님에 대해 아는 방법은 여기 이 현실에서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이었으며 이 생이 끝난 다음에는 그럴 수 없다고 생각했다. 유대교는 죽은 뒤 천국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 세상에서 한 일을 천국에서 보상받는다는 개념도 없다.

이런 사고 방식의 논리적인 결말은 상과 벌이 다음 생이 아닌 현재의 생에서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죽은 뒤가 아닌 살아 생전에 하느님이 선행에 상을 내리고 악행에 대해서는 벌을 주어야 한다. 잠언과 다른 지혜서에서 히브리 성서는 올바른 자는 번창하고 사악한 자는 악행의 결과로 고통을 받을 것이라고 반복해서 약속하고 있다.

다 좋은 말이다. 이스라엘인들의 일이 잘 풀리는 이상 그들은 이 단순한 도덕적인 교리를 갖고도 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왕국이 파괴되고 그들 민족이 모두 유배를 당하게 되었다. 갑자기 그 체제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게 되었다. 이 선과 악의 단순한 교리가 무언가 상당히 잘못된 것 같이 느껴진 것이다. 죄를 지은 사람뿐만 아니라 무고한 사람들까지도 고통을 받았다. 우상을 숭배하는 무리뿐만 아니라 정의롭고 가난한 이들까지 벌을 받았다.

 

악의 신비, 어떻게 이해할까

이런 설명할 수 없는 고통 앞에서 유태인은 그들의 도덕적 교리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 했다. 욥기의 저자는 악의 신비와 씨름하면서, 어떻게 선한 사람들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는지, 하느님은 진정 정의를 사랑하시고 악을 미워하시는 것인지 의문을 갖게 되었다. 현대 신학자들과 달리 고대의 저자들은 그의 신학을 시로 표현했고 이야기나 연극 형식으로 썼다.

욥기를 희곡이나 연극이라고 생각하고 보면 우리는 욥을 주인공, 하느님을 영웅, 사탄을 악한으로 볼 수 있다. 욥의 세 친구들이 무대를 만들고 연극이 진행되도록 한다. 번갈아가며 그들이 악의 문제에 대한 모든 관습적인 해결 방법을 들고 나오지만 결국 역부족임을 깨닫는다. 결국 하느님이 대화에 끼어 드시어 어떤 이성도 풀지 못한 해답을 그에게 알려주신다.

처음에 욥은 주님의 정직하고 충직한 종으로 나온다. 그는 올바른 생활을 했고 다른 사람들을 정당하게 대했고 건강했으며 부자였다. 그래서 착한 이는 상을 받고 악인은 벌을 받는다는 전통적인 이론이 처음에는 맞는 것처럼 보인다.

이제 악의 옹호자인 사탄이 하느님의 옥좌에 나아가 욥은 하느님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법을 지키면 상을 받기 때문에 선한 일을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렇습니다. 욥은 정의롭고 정직하게 살고 있습니다. 당연히 그는 하느님께 매일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그러나 그것은 당신이 그를 축복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도 그가 당신을 찬양할지 보십시오!”라고 사탄이 말한다.

그러나 주님은 욥을 믿었다. 그는 사탄에게 욥이 가진 모든 것-재산, 자녀, 그의 건강까지-을 빼앗게 하셨다. 그러나 욥은 주님을 비난하지 않았다:

“벌거벗고 세상에 태어난 몸
알몸으로 돌아가리라
야훼께서 주셨던 것, 야훼께서 도로 가져가시니
다만 야훼의 이름을 찬양하리라.”

새로 펼쳐질 드라마의 무대가 조성되었다. 욥기의 후반부에서 욥은 악과 대면한다. 그는 자신의 불행을 보고 울부짖는다. 그는 그 모든 불행의 원인에 대한 간편한 설명에 동의하라는 유혹을 받는다. 그러나 그는 유혹을 물리치고 삶의 불합리성과 무의미함에 대해 씨름을 한다.

선을 행하고 옳은 일을 하려는 사람들도 언젠가 이와 똑같은 질문을 갖게 된다. 우리는 악의 신비, 하느님의 신비로움과 삶의 신비에 대해 고뇌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그 신비를 알려고 한다면 오로지 그 신비와 투쟁함으로써 가능하다. 악을 경험함으로써만 악을 알기 시작한다. 하느님이 우리의 힘과 구원의 원천이라는 것을 알기 시작하려면 야곱이 그랬던 것처럼 주님과 씨름을 해야 한다. 삶과 맞서고 우리 자신이 삶의 도전을 받을 때 우리는 비로소 삶이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도덕적, 교리적 해답의 안이함

욥에게 닥친 불행한 일을 들은 친구 세 명이 그에게 동정과 위로를 하러 온다. 그들의 이름은 엘리바르, 소바르, 빌닷이다 - 참 친구 같지도 않은 친구들! 그들이 바로 욥에게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피하라고 충동하는 사람들이며 그것을 이해하려고 더 이상 노력하지 말고, 하느님과 씨름하는 것을 그만두고 그들의 문화와 종교가 제시한 기존의 정답들을 그냥 받아들이라고 하는 이들이다. 그들은 해답, 일의 마무리, 위로를 원했을 뿐, 영혼을 찾아 떠나는 여행을 원한 것이 아니었다.

엘리바르가 먼저 말을 꺼낸다. 그는 욥에게 하느님은 항상 기도에 응답하시기 때문에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는 기도를 하라고 말한다. 하느님은 정의로운 사람에게는 상을 주시고 악한 이에게는 벌을 주신다. 그리고 만일 우리와 하느님과의 관계가 올바르다면 그 분은 우리의 삶을 바로 잡아 주실 것이라고 말한다.

빌닷은 한술 더 떠 욥이 고통을 받고 있는 이상 그가 분명히 벌을 받을 짓을 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욥이 해야 할 일은 자신의 죄를 하느님께 고백하는 것이며 그렇게 하면 모든 일이 다 잘될 것이라고 말한다.

소바르는 사람의 행동과 하느님의 응답 사이에는 반드시 원인과 결과의 공식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하느님은 정의롭기 때문에 욥으로 하여금 아무 까닭없이 고통을 받게 하시지는 않는다. 이 모든 대답들은 모두 다 훌륭한 종교적인 해답들이다. 이 사람들은 모두가 그 지역 기도 모임이나 기타 종교활동 단체의 뛰어난 일원이었을 것이다.

의심할 여지없이 위로하기 위해 찾아 온 세 친구들은 옳은 일을 하려고 했다. 그들은 욥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지적하려고 한다. 그들은 그의 비밀스러운 죄 때문에 이런 불행이 일어났다는 것을 그에게 이해시키려고 한다. 그리고 욥은 순진하게도 그들이 시키는대로 한다. 그는 친구들이 하라고 하는대로 실천하려고 노력한다. 그는 자기가 잘못한 것을 알아내어 고치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전통적인 종교에서 죄라고 인정하는 것을 자신에게서 발견할 수 없었다.

 


그 다음에 일어난 일은 그 세 친구로 대변되는 깔끔한 종교제도가 무너지는 것이었다. 그들은 현실을 어떤 틀 속에 잡아넣으려 하였으나 욥은 현실을 자신의 식대로 다룬다. 그들은 하느님이 누구이며 그 분이 어떻게 행동하시는가를 규정하려고 하나 욥은 하느님의 실재를 그가 경험한 대로 이해하려고 한다. 그들은 악을 해결되어야 할 문제로 보고 있으나 욥은 그것을 살아내야 할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들은 일시적으로 마음의 안정을 줄 수 있는 대답을 해 주었으나 욥은 몸으로 직접 부대끼는, 대답을 얻기 위해서는 직접 경험을 해야만 하는 그런 상황에 있었다.경험 안에서 해답을 구하다

우리 자신을 속이지는 말자. 우리는 욥이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기 때문에 그와 우리를 동일시하곤 한다; 그는 고통을 인내심을 갖고 견디어 낸 선한 사람이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 모두는 욥의 세 친구처럼 살았다. 가톨릭 역시 오랫동안 그와 같았다. 우리는 하느님과 교회에 관한 우리 나름의 교리를 갖고 있다. 우리는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아닌지에 대해 우리 식대로 잘 정리된 정의를 갖고 있다. 우리는 자신만의 도덕적인 처방전을 가지고 옳고 그름을 판단한다. 우리는 로마 교황청이 우리의 도덕적 딜레마를 대신 해결하도록 했다.

성서에 등장하는 주님을 만나면서부터 우리는 현실, 종교적인 현실까지도, 그렇게 단순명료하지 않다는 것을 발견한다. 복음은 성령이 마치 바람과 같다고 말하고 있다 (요한 3,8). 성령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와서 알지 못하는 곳으로 간다. 우리는 성령을 조정할 수 없다. 우리의 좁은 소견으로는 무한하신 하느님을 이해할 수 없다. 우리는 하느님을 말로 정의하고 싶어하나 하느님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으신다. 하느님에 대한 경험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욥이 발견한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성서저자가 욥의 이야기를 쓰면서 다루려고 한 것이 바로 그 점이었다.

옛 전통은 무너지고

이스라엘의 유배 생활이 여전히 생생한 이 성서저자는 고통의 신비스러움에 직면하게 되었고, 그것에 강하게 반발하면서 종래의 경건하고 진부한 해결책을 거부한다. 그리고 그 고통 속에 무엇인가 다른 해결책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는 옛 전통이 무너지는 것을 보았고, 옛 도덕성이 허물어지는 것을 직접 목격했기 때문에 저자는 그 해답을 이 생에서 얻을 수 있을지조차 의심하게 되었다. 욥은 이런 갈망을 14장에서 잘 드러내고 있다:

"나무는 그래도 희망이 있습니다,
찍혀도 다시 피어나
움이 거듭거듭 돋아납니다.
뿌리가 땅 속에서 늙고
줄기가 흙 속에서 죽었다가도
물기만 맡으면 움이 다시 돋아
어린 나무처럼 가지를 뻗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제 아무리 대장부라도
죽으면 별 수 없고
숨만 지면 그만입니다.
이 몸을 저승에 숨겨 두시지 않으시겠습니까?
당신의 진노가 멎기까지
감추어 두시지 않으시겠습니까?
때를 정해 두셨다가 다시 기억해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러나 사람은 제 아무리 대장부일지라도
죽었다가 다시 살 수 없는 일
만일 그렇다면 나도 이 길고 긴 고역의
나날이 지나 밝은 날이 오기를 기다릴 수도 있으련만...
당신께서 불러만 주신다면 나는 대답하겠습니다,
당신이 저를 다시 한번 보시기를 원하셨다고 알면서."
(욥 14,7-15)

욥은 희망에 반하는 것을 희망했고, 이제까지 믿어야 된다고 배운 모든 것을 믿지 않았다. 저자는 삶에는 겉에 보이는 것말고 그 이상의 무엇이 있다는 걸 감지한다. 한 국가로서 이스라엘은 패배를 겪었고 유배를 당해 죽임을 당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은 살아 남았고 재탄생의 희망을 갖고 삶을 이어나갔다.

한 사람의 이스라엘인으로 저자는 그들이 집단적인 삶의 차원에서 겪은 일이 개인적인 삶 속에서도 가능한지에 대해 궁금하게 생각하였다. 사람에게는 진실로 죽은 뒤 살 수 있는 방법이 있는가, 또 하느님의 정의가 참으로 실현될 수 있는 장소가 정말 존재하는가? 욥기의 저자가 이 질문에 대해 확신을 갖고 있었다는 구절이 한 군데 나오는데:

"나는 믿는다, 나의 변호인이 살아 있음을!
나의 후견인이 마침내 땅 위에 나타나리라.
나의 살갗이 뭉그러져
이 살이 지그러진 후에라도
나는 하느님을 뵙고야 말리라
나는 기어이 이 두 눈으로 뵙고야 말리라
그 생각을 하면 내 가슴이 떨리는구나."
(욥 19,25-27)

이 귀절에서 욥은 믿음의 도약을 한다. 그는 주님과 이 만큼이나 걸어왔다. 그는 자기가 고통 중에 있음을 안다. 그의 삶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주님을 경험한 후 그는 의미를 찾았고 진실한 그 무엇을 느꼈고, 영원히 지속될 수 있어 보이는 무언가를 느꼈다. 그래서 그는 그것을 믿었다. 그 안에 믿음과 희망이 함께 어우러져 있다는 것을 믿었으며 그래서 느껴지는 약속에 대한 말없는 확신 속에 머물렀다. 그는 죽은 후에도 주님과 함께 걸어 갈 수 있다는 것을 믿었다.

 

윌리엄 블레이크의 욥과 그의 딸들 , William Blake, Job and his Daughters , 1823-26, Copper engraving, 217 x 170 mm

사라지지 않는 고통, 하느님께 도전하며

이러한 믿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고통을 사그러들지 않았다. 계속해서 그는 고통의 신비와 씨름하고 있다. 그는 정의와 구원을 원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것을 희망하는 것뿐이다. 그러다가 29장과 31장에서 그는 부당하고 이해할 수 없는 불행과 관련해 자신의 결백함을 다시 한번 주장하게 된다. 그는 하느님께 응답해 주실 것을 간청한다. 그는 하느님을 잔인하고 무자비하다고 말하면서 불경스러워지기까지 한다. 그는 대답을 강요하였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하느님이 숨어 계신 곳으로부터 나와 자신이 바라는 대답을 해 주실 것이라고 바랬다.

어떤 이가 감히 이런 기도를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런 기도가 진짜 기도이다. 이런 기도는 생각과 입술에서 나오는 기도가 아니라 가슴과 뼛 속 깊은 곳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는 하느님의 곁에서 자신이 어디쯤 와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을 받을 만한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평생 하느님을 믿었고 그래서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말이 주제 넘어 보여도 하느님은 자신의 마음이 순수하다는 것을 아실 것이라고 믿었다.

우리는 하느님에 대해 결코 지나칠 정도로 생각할 수 없다. 우리는 하느님께 결코 지나칠 정도로 청할 수 없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하느님을 지나칠 정도로 크신 분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우리가 그분을 지나칠 정도로 신뢰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우리를 지나칠 정도로 사랑해 주십사하고 청할 수 있을까? 하느님은 언제나 우리가 생각한 것 그 이상이다. 하느님은 우리가 그 분께 바라는 것 그 이상으로 우리를 사랑하신다.

자유로운 삶을 얻기 위해

고통의 와중에, 부활의 희망을 안고, 욥의 여정은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올라야 할 골고타 산의 표상이 되었다. 그가 겪은 일들은 우리 모두가 한 번씩은 겪어야 할 것들이다. 중요한 것은 욥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거기서 도망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비록 그러고 싶지 않더라도 우리는 그것과 부닥치고 헤쳐나가야만 한다. 이런 시련을 거치고, 신비를 직접 체험함으로써 우리는 구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부활을 발견하는 곳은 다름 아닌 십자가 위에서다. 생명을 포기함으로써만 우리는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다.

32장에 가서 엘리후라는 젊은이가 새롭게 등장한다. 그는 어른들이 말씀하실 때 물러나 있었지만 이제 자기도 한마디하고 싶다고 말한다. 사실 엘리후는 나이는 어리나 고통에 대해 다른 이들 보다 성숙한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영적인 지혜는 나이와는 관계가 없다; 어른들도 종종 아이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운다. 영적 지혜는 고통을 겪고 고통을 생각할 때 얻어진다. 고통을 많이 겪은 아이들이 고통 없이 살아온 어른 보다 훨씬 성숙할 때가 있다.

엘리후의 경우가 그러했다. 우리가 고통을 올바로 이해만 한다면 고통은 우리를 영적으로 성장시킨다. 고통이 우리 자신을 정화시키도록 허락한다면 우리는 자신의 삶과 삶의 동기에 관해 다시 생각할 수 있게 된다. 억울한 고통을 많이 당한 사람들은 종종 상당히 심오한 지혜, 대단한 인내, 사랑의 힘들을 갖게 된다. 그들은 남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들은 당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태세가 되어 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들을 받들어 모시라고 요구하면서 살지 않는다: 그들은 도와줄 기회를 찾는다. 그들은 자기 소유물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기가 가진 것을 선물로 생각한다.

그러나 고통이 자동적으로 우리에게 그런 작용을 하지는 않는다. 많은 이들이 고통을 맛보며 비참해진다; 그들은 인격을 상실하고, 고통을 겪으면서 편협해지고 자기 중심적으로 변한다. 다시 말해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사건에 대한 우리의 태도와 응답이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를 진정 자유롭게 만드는 것은 믿음에 의한 응답과 자아 포기뿐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과거에 대한 걱정과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우리는 자신의 상처를 다스리면서 앙갚음하려는 마음에서 자유로워진다. 그리고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으로 인해 현실을 왜곡하지 않은 채, 있는 그대로 마주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매 순간 순간을 완전하게 살 수 있을만큼 자유로워진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영혼의 자유이며 이것은 고통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으며,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잃음으로써 온다. 우리가 자신에게서 자유로워지는 만큼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우리의 행복을 위해 필수적이라고 생각되는 모든 것을 잃고 난 후에야 우리는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있는 위치에 도달하게 된다. 가진 것이라곤 주님 밖에 없는 상황에서 우리는 주님 밖에 필요치 않음을 깨닫게 된다. 이런 것은 듣거나 책을 읽어서 알게 되는 것이 아니다; 체험을 통해서만 배울 수 있는 것이다.

욥이 들은 것은 위로가 아니었다

38장에서 욥은 삶의 소용돌이 가운데서 주님이 그에게 하시는 말씀을 듣는다. 그의 마음은 삶의 고통으로 혼란스럽고, 머리는 이런 저런 충고들로 빙빙 돌 지경이다. 그런 와중에 욥은 하느님을 경험한다; 그 폭풍우 속에서 드디어 주님은 그에게 말씀하신다.

욥이 들은 것은 위로가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이 직접 그 모든 것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아무 위로도 되지 않는 말이었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
그렇게 세상물정을 잘 알거든 말해 보아라!
누가 이 땅을 설계하였느냐?
네가 언제고 동이 틀 것을 명령해 본 일이 있느냐?
빛의 전당으로 가는 길을 아느냐?
어둠이 도사리고 있는 곳은 어디냐?
너는 흰 눈을 저장해 둔 곳에 가본 적이 있으며,
우박 창고에 들어가 본 일이 있느냐?
비를 만들어 본 일이 있느냐?
네가 “나가라”고 명령하면
“알았습니다” 하며 번갯불이 번쩍 퉁겨 나가느냐?
네가 산을 만들고 계곡을 만들었느냐?
어떤 동물이 지상에서 살아 돌아다니고 그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네가 결정했느냐?"
(욥 38-39)

하느님은 창조의 선함을 모두 설명하시면서 계속 말씀하신다. 욥은 자기의 지혜가 하느님의 지혜와는 비교도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압도된다:

"아, 제 입이 너무 가벼웠습니다.
무슨 할 말이 더 있겠습니까?
손으로 입을 막을 도리 밖에 없습니다.
한 번 말씀 드린 것도 무엄한 일이었는데
또 무슨 대답을 하겠습니까?"
(욥 40,4-5)

그리고 나서 하느님께서는 욥에게 모든 것, 세상의 선 뿐만 아니라 악까지도, 당신의 손 안에 있음을 상기시키신다. 악이 만연할 때라도, 인간이 그것을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하느님은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해하고 계신다.

실제로 주님은 욥에게 “나는 하느님이고 너는 인간일 뿐이다. 이것이 내 대답이다” 하고 말씀하신다. 하느님이 그에게 앞으로 들려줄 대답 역시 그것 뿐일 것이다. “나는 하느님이고 너는 인간이다. 내가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할 자격이 네게는 없다.” 그것이 신앙이 지니는 통찰력이다. 이런 통찰력은 하느님의 선하심을 한껏 체험한 후 얻게 된다. 이런 통찰력은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의 벌거벗은 몸을 감싸고 있다는 자각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빈털터리가 되어 고통을 당하는 경험을 함으로써 순화되고 다듬어진다.

그리하여 욥은 하느님의 신비 앞에 머리 숙여 절을 한다:

"알았습니다. 당신께서는 못하실 일이 없으십니다. 계획하신 일은 무엇이든지 이루십니다. 부질 없는 말로 당신의 뜻을 가리 운 자, 그것은 바로 저였습니다. 이 머리로는 헤아릴 수 없는 신비한 일들을 영문도 모르면서 지껄였습니다.... 당신께서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소문으로 겨우 들었었는데, 이제 저는 이 눈으로 당신을 뵈었습니다. 그리하여 제 말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티끌과 잿더미에 앉아 뉘우칩니다."(욥 42,2-6)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인정한다는 것

욥은 지금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그는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인정한 것이다. 하느님은 온전히 초월적이고 우리를 능가하신다. 그 분의 무한한 지혜는 우리의 유한한 마음을 능가하신다. 그런 관계를 받아 들일 수 있다면 우리는 구원받을 수 있다. 그것은 주인과 노예의 관계가 아니다. 오히려 그런 관계를 받아들임으로써 우리가 온전하게 되고 우리 자신의 거룩함을 체험할 수 있다.

주님과 그런 관계를 맺게 되면 우리는 천국이 더 이상 낯설지 않게 되는데, 그것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과 친구가 되어 천국을 거닐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관계 속에서도 하느님은 여전히 하느님이시고 우리는 여전히 우리 자신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추상적인 관계가 아니다. 이것은 현실적인 관계이며 인격적인 관계이고 아주 절실하게 느껴지는 관계이다. 이 관계를 통해 우리는 우리 실존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의미를 향한 인간의 탐구>란 책에서 빅토르 프랑클은 유태인들이 나치 강제 수용소에서 정신적 육체적 고통에도 불구하고, 인생을 살아 볼만한 가치가 있게 만든 어떤 의미를 발견함으로써, 그 모든 공포를 이겨내었다고 설명했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자신을 사랑했던 주변 사람들을 기억함으로써 이 의미를 발견했다. 사랑의 관계 속에 머물렀던 것이 그들을 자살로 치닫지 않게 했다; 그것이 그들에게 살아야 할 이유를 제공했으며 모든 것을 박탈당한 삶 속에서도 그들에게 목적, 방향, 희망, 갈망을 부여해 삶을 지속시킬 수 있게 만들었다. 프랑클은 25세기 전 욥기의 저자가 발견한 것을 20세기에 발견했다. 즉 우리가 사랑 받고 있다는 깨달음이 무너지는 세상 속에서 우리 자신을 파멸시키지 않도록 한다는 것이다.

결국 욥기가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점은 하느님께서 고통이라는 문제 자체에 대한 해답을 주시기보다는 고통 가운데서 우리가 의미를 깨닫도록 하신다는 것이다. 논리나 이성으로는 악의 신비를 설명할 수 없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고통을 받는 이유나 왜 착한 사람이 억울한 고통과 시련을 겪어야 하는지는 누구도 설명할 수 없다. 욥기는 그 문제를 설명해보려고 하는 아주 적절하며 손쉬운 대답들의 가면을 벗기는데 상당부분을 할애한다. 끝에 가서 저자는 하느님은 해답을 주시지 않으시고 다만 그 의미를 깨닫게 하시며 그렇게 함으로써 능력을 부여하신다고 결론짓고 있다.

하느님 한 분만이 선하시다

욥은 진리를 받아들이고 진리의 오묘함 앞에 고개를 숙인다. 그는 참회한다. 이는 그가 마음과 가슴으로 회심함을 뜻한다: 자신이 잃은 것에 대해 불평하기 보다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하느님의 아들-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 자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깨달음으로써 그는 자기 존재, 자기 삶의 의미를 자각한다. 이런 깨달음의 빛 속에서 나머지 문제들은 다 퇴색하고 말았다.

그는 자기중심적이고 자신을 정당화시키는 태도로부터 자유로워져 자신의 인간성을 용납할 수 있게 되었고 자신의 고유한 삶을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자유로워졌다. 하느님 한 분만이 선하시다.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은 선물이다. 주님이 주시고 주님이 가져가신다.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된 욥은 계속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의 삶에는 의미가 부여되었다.

이것을 깨닫게 되면 잃었던 그 모든 것을 다시 찾은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이것을 욥기에서는 마지막 장에서 하느님이 욥에게 처음에 갖고 있던 모든 것을 돌려주시는 장면으로 표현하고 있다. 시적인 이야기는 시적으로 끝나기 마련이다.

성서의 시들은 여러가지 면에서 추상적인 신학과는 거리가 멀다. 신학자들은 대개 악이라는 문제에 대해 골똘히 생각한 후 아주 지적이며 모양새 좋은 해답을 내놓곤 한다. 그러나 이런 대답들은 우리의 슬픔을 달래줄 수 없고 고통을 경감시키지 못한다. 이런 해답은 명문화되어 다른 이들을 가르칠 수는 있으나 우리를 회심시키지는 못한다. 아마도 그 대답이 너무 쉽게 주어져서 그럴지도 모른다. 이런 문제는 우리의 마음으로 이해해야만 한다.

욥은 그 대답을 쉽게 얻지 못했다. 그는 해답을 얻기 위해 싸워야 했다. 그는 삶의 소용돌이 속에서 생생한 답을 얻기 위해 슬픔을 헤치고 싸워야 했다. 그는 폭풍우 속에서 살아 계신 주님을 찾아야만 했다. 그는 찾아 헤맸고 하느님과의 아주 개인적인 관계 속에서 개인적인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우리 각자도 우리가 경험하는 고통 속에서 그런 관계를 찾아야 한다. 그 고통은 직업이나 가정의 상실일수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일수도 있으며, 부모님이나 자식이 우리를 거부하는 것일 수도, 결혼의 파탄, 제도적인 불의, 사회적 폭력 등 그 무엇이든 될 수 있다. 고통 중에서 의미 있고 생생하며 자유를 주는 대답을 얻을 때 그것이 매우 개인적인 대답임을 알게 된다.

이런 종류의 대답을 늘 말로 표현할 수는 없다; 또한 늘 글로 표현할 수도 없다; 그것은 가르침을 구하는 학생들이나 가족들에게조차 설명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당신이 알고 있는 대답이다. 그것은 내면 깊이 온통 파고드는 확신이다. 그것을 통해 당신은 이제까지 안전하다고 느꼈던 것들이 사실은 불안전함을 알게 된다. 아무도 안전함을 당신에게 줄 수는 없다; 아무도 그것을 당신에게서 빼앗아 갈 수도 없다. 그것은 선물이다. 그것은 주님을 발견하고 그분을 믿는 사람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원출처] <성서의 위대한 주제들-구약>, 리차드 로어와 죠셉 마르토스, 1987
[번역본 출처] <참사람되어>, 2001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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