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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도 난민이 있어요”난민 활동가 유시환 요한을 만나다

[난민 활동가 유시환 요한을 만나다]

아직 미군부대가 남아있는 동두천, 보산역 인근에 ‘난민의 집’이 있다. 주변은 온통 빌라촌인데, 아주 오래전부터 슬럼화 되었는지, 행인도 거의 없는 을씨년스러운 골목에 자리한 빌라 2층에서 대표활동가인 유시환 요한 씨를 만났다. 여기서는 그를 ‘알렉스’라고 부른다.

유시환 씨는 말레이시아에 유학을 떠났다가 주저앉아 9년 동안 유학원과 여행사 등을 운영하며 잘 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허리가 아파서 수술 하러 한국에 왔다가 병역기피 등 여러 가지 문제로 꼬여서 출국금지 당하고, 결국 다 포기하고 의정부에 자리 잡았다. 그러다 만난 사람들이 이주노동자들이었다. 의정부교구 광적성당에는 필리핀 노동자들이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다.

 

유시환 요한. 사진=한상봉

난민들 처음 만나 

유시환 씨는 영어 실력 때문에 여기서 큰 도움이 되었고, 사제가 되고 싶어 예비신학교에도 다녔다. 그렇지만 “신학교는 나이도 많고 말도 잘 안 들어서인지 문 앞에서 잘렸다.”고 했다. 그래서 본격적으로 일하게 된 곳이 이주노동자들을 돕던 ‘의정부 엑소더스’였고, 이 활동 중에 동두천 지역의 ‘난민’들을 알게 되었다. 지금은 아예 동두천으로 이사 와서 자기 집을 ‘난민공동체’의 공용공간으로 내놓았다.

“내가 이주노동자들을 처음 만난 것은 광적성당에서였어요. 여기 필리핀 공동체에는 등록인원이 400명 정도나 됩니다. 이 근처에서 처음으로 영어미사 하게 되면서 필리핀 사람들이 몰려 왔어요. 거기서 대표봉사자로 일하면서 의료진료 할 때는 영어통역 봉사를 했어요. 이 친구들한테 배울 게 많더라고요. 하루 14시간씩 힘들게 노동자로 일하면서도 주일 날 너무 기쁘게 미사 하고, 신앙 안에서 놀더라고요. 그런 모습 보면 함께 일하지 않을 수 없어요.”

지금 유시환 씨가 살고 있는 ‘난민의 집’ 근처는 동두천 옛 시가지이다. 지금은 예전부터 살던 나이 드신 분들만 거주하는데, 이분들은 미군이 철수하면서 가옥을 쪽방으로 개조해서 난민들에게 월세 방을 내주고 있다. 이곳은 주로 아프리카 출신의 영어권 나라 난민들이 대부분이다. 유시환 씨는 의정부 엑소더스에 있을 때 아동구호단체인 ‘세이브 더 칠드런’의 제안으로 동두천 난민들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고, 당시 조해인, 배존희 신부 등이 난민활동을 적극 지원해 주었다.

“저도 난민은 이때 처음 경험했어요. 처음엔 시리아 사람들이 여기까지 왔나, 했어요. 그런데 알고 보니 종교난민이 가장 많고, 주로 라이베리아, 나이지리아, 우간다, 케냐, 가나 등 아프리카 영어권 나라 사람이었죠. 불어권 사람들은 안산으로 간다고 해요. 그중에서 나이지리아 사람들은 여성할례 문제 때문에 고향에서 도망친 사람들이 많아요. 여성들이 부족 전통에 따라 생식기 일부를 잘라내다가 감염이나 과다출혈로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던 모양입니다. 할례를 거부하면 죽임을 당하기도 해요. 그 사람들은 현지 한국교회의 도움으로 한국에 오는 경우가 많아요.”

난민 인정, 전체 1% 

아프리카 난민들은 돈 한 푼 없이 달랑 비행기 표 한 장 쥐고 오기 때문에, 한국에서 생활하는데 어려움을 많이 겪는다. 한국에선 난민신청 시스템이 잘 되어 있어서, 일단 입국하면 출입국관리소에서 영종에 있는 난민센터로 보낸다. 6개월 동안 한국문화도 가르치고 기술도 배운다고 하는데, 6개월 동안은 약간의 보조금도 받는다. 현재 한국에 유입된 난민 신청자가 3만 명 정도인데, 이곳 동두천 보산동에 머무는 난민 신청자만 300여 명이나 된다.

그렇지만 이들의 난민 신청을 돕는 무료 법률사무소가 있지만 인력이 턱없이 모자라 거의 도움이 안 된다. 난민심사 하는데 소송비용만 200만 원 정도 들고, 대법원 판결까지 4년 정도 걸린다. 이들은 유엔 규약상 강제출국은 당하지 않지만, 여러 가지 정치적 이유로 실제로 난민 인정을 받는 사람은 전체의 1%밖에 되지 않는다.

사진=한상봉

“그렇게 난민 많아도 출입국 관리소에서 이 일을 맡는 사람은 30명밖에 안 된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난민 인정 과정이 오래 걸리고, 나라에선 난민들이 대량으로 유입될까봐 공식적으로 난민 인정을 가능한 해주지 않으려고 해요. 그러다 보니, 난민들은 소송비용 대랴 생계유지 하랴 너무 힘들어요.

처음 6개월은 취업이 불가능하고, 그 다음부터는 비자 연장을 통상 한 달 단위로 해서, 난민들이 공장 취업하기도 어려워요. 결국 이주노동자들도 위험하고 힘들어서 떠난 열악한 공장에 난민들이 들어가거나, 아니면 대부분 일용직에 종사합니다. 일하면서 불만이 생겨도 난민 신청에 문제가 생길까봐 말도 못하죠.”

난민들의 자립 공동체

유시환 씨도 이들을 위해 무얼 할 수 있는지 몰라 당황했다. 처음엔 방송국을 연결해 달라고 해서 도와주었는데, 서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하다가 다툼이 생기고 말았다. 이때 영감을 받은 게 정일우 신부가 판자촌에 들어가서 만든 주민조직이었다. 여기서도 외부인에게 생활적 도움을 받는 것보다 자치조직을 만들고 자립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유시환 씨가 이곳에 들어와 살기 시작하면서 이런 생각이 구체화 되었다. 일단 공간이 생긴 것이다.

“본래 동두천에는 보수단체밖에 없었는데, 마침 동두천에 의식 있는 시민단체가 하나 생겼어요. 대표 되시는 분이 직원을 구한다고 저한테 전화를 했어요. 사람 구해 달라고. 그래서 ‘제가 하면 안 될까요?’ 물었죠. 이미 의정부 엑소더스 그만두고 이곳에 들어왔으니, 저도 생활 문제를 해결해야 했거든요. 다행히 그쪽에서 반상근할 사람을 구하는 바람에, 시민단체 일도 하고, 난민활동도 할 수 있게 된 거죠. 이래저래 걱정이 많았는데, 필요하면 하느님께서 채워주시더라고요.”

처음 이곳에 이사 왔을 때는 제일 걱정이 ‘난민들이 나를 환영해 줄까?’였는데, 그분들이 와서 청소도 해주고, 이삿짐도 날라주었다. 지금은 이 ‘난민의 집’이 유시환 씨 거처이며, 난민공동체 회의실이며, 공동육아를 하는 놀이터가 되었다. 이 지역에 먼저 들어와서 주민조직에 관심을 갖던 난민 가족들이 나서는 바람에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이들은 먼저 지역사회에 잘 자리 잡고 사는 게 중요했다.

그래서 첫 번째 활동으로 정한 게 ‘청소’였다. 단체로 ‘동두천 난민공동체’라고 쓰여 있는 반팔티를 맞춰 입고 보산역에 나가서 청소부터 시작했다. 젊은이들이 거의 없는 이 지역에는 눈이 와도 쓸어내는 사람이 없다. 겨울에 난민들이 거리에 나와 눈을 치우는 것은 적절한 아이디어였다. 다른 단체복이 없어서 겨울에도 반팔티 위에 외투 걸치고 나가서 청소를 한다. 이렇게 주민들과 관계를 먼저 트자는 거였다.

“소요산역에서도 청소했어요. 일요일 오후 네 시경이면 등산객들이 술 취해 산에서 내려오는 분들 많잖아요. 우리가 청소하고 있으면 사람들이 ‘이쁘다.’ ‘고맙다.’ 해요. 그러다 갑자기 신이 나면 아프리카 사람들이라 음악 틀고 춤을 추기 시작해요. 그러면 등산객들도 따라서 춤을 추고 .... 이렇게 놀면서 일을 하는 거죠.”

지난 2월 10일에는 의정부교구장 이기헌 주교가 ‘난민의 집’ 축복식을 해주고, 다른 난민가정을 방문했다. 이 주교는 라이베리아 출신 아미아타 씨, 가나 출신 플림퐁 씨, 나이지리아 출신 기프트 씨 집을 직접 찾아가 “한국에선 난민 지위를 얻기 너무 힘들다.”는 호소도 들었다. 이기헌 주교도 “교구 차원에서 경제적 지원은 물론 행정 절차 및 제도 개선 등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지금 ‘난민의 집’에 등록된 난민은 80여 명이나 된다. 이들은 종교와 국적이 서로 다르지만, 서로 도우며 삶을 공유하고 있다. 의정부교구는 올해 교구 차원에서 ‘1본당, 1난민 가정 돌보기’ 사업을 펼칠 예정이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 가톨릭일꾼 www.catholicworker.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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