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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하는 인간, 디스토피아를 구원할 수 있을까<레디 플레이어 원>(2018, 스티븐 스필버그)

[진수미의 문화칼럼] 

스필버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레디 플레이어 원>의 상영관. 극장 출구로 향하는 복도에서 초등학생 아이의 손을 잡고 걸어가던 한 여성이 말했다. “봤지? 게임을 너무 많이 하지 말라고 영화에서도 그러잖아.” 영화가 저 아이에게는 게임 하나만 열심히 해도 성공할 수 있다는 메시지로 읽힐 수 있을 텐데, 뒤에서 나는 중얼거렸다. 생각해보면 이것이 바로 스필버그의 매력이다. 세대를 초월하여 공감을 이끌어내는 대중성.

요새 스필버그가 좋아지고 있어. 언젠가 한 시인이 쑥스럽게 웃으며 고백한 적이 있다. 대중추수적 경향을 경계하며 감각의 날이 날카롭게 벼려진 시를 쓰는 그에게 그 변화는 뭔가 간지럽고 멋쩍은 느낌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스필버그에게 기울어지는 그 마음이 너무 잘 이해가 되어서 동의의 뜻으로 나도 조금 웃었다. 그건 우리가 나이가 들어가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으니까.

스필버그 영화의 대전제인 가족 해체와 동심의 세계는 젊음이 사라지고 있다는 느낌을 가진 나이대의 사람들을 매혹한다. <레디 플레이어 원>은 어느덧 70대 중반의 나이에 이른 감독 스필버그가 그러한 매력을 다시금 과시한 영화이다.

가상현실이냐 실재냐, 그것이 문제로다

<레디 플레이어 원>은 가상현실 블록버스터라 명명되는 SF 영화이다. 배경은 2045년. 대기업을 중심으로 한 부의 편중은 극단적으로 심해지고, 현실에 환멸을 느낀 사람들은 가상현실 오아시스에 접속하여 현실의 시간을 오락으로 소진하고 있다. 빈민촌에서 이모와 함께 사는 웨이드 와츠(타이 쉐리던 분) 역시 오아시스 창시자 제임스 할리데이(마크 라이언스 분)를 숭배하며 가상현실에서 ‘파시발’이라는 이름으로 게임을 즐기는 인물이다.

할리데이는 자신의 후계자를 오아시스에 제시된 미션을 해결하는 사람으로 지목하는 유언을 남겼다. 미션의 힌트는 할리데이의 삶이 담긴 전시관에 흩뿌려져 있고 웨이드는 그 퍼즐을 찾아가며 문제를 해결해 간다. 오아시스의 소유권을 얻어 가상현실계의 최강자가 되고자 하는 거대기업 IOI는 웨이드가 획득한 이스터 에그를 빼앗으려고 살인도 불사하는 위협을 가한다. 이러한 상황은 웨이드를 개인플레이에 의존할 수 없게 몰아가고 그는 가상현실에서 만난 아르테미스/사만다(올리비아 쿡 분), 에이치/헬렌(리나 웨이스 분), 다이토(모리사키 윈 분), 쇼(필립 자오 분)의 도움을 받으면서 미션에 몰두한다.

영화는 가상현실과 실재의 이원적 구조에 의지하고 있다. 오아시스 안에서 미션을 해결해 나가는 것은 파시발과 아르테미스 등이고, 실재의 웨이드와 사만다는 파시발과 아르테미스의 승리를 위한 조력자 역할을 하는 것이다.

영화 <아바타>(2009, 제임스 카메룬)에서 제이크 설리(샘 워싱턴 분)의 아바타가 나비족의 네이티리(조 샐다나 분)와 함께 판도라 행성을 위해 싸우는 상황을 떠올리면 된다. <아바타>는 제이크가 판도라 행성에 남기로 결심함으로써 실재에 대한 가상현실의 우위를 보여주었다. 반면 <조작된 도시>(2017, 박광현)는 현실의 살인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모인 게이머들의 활약을 그린다. 영화에서 가상현실은 이들을 집합시키기 위한 설정으로만 기능한다. 이처럼 두 현실을 오가는 이원구조 영화는 양자를 결합시키는 방식, 그리고 어느 쪽에 비중을 둘 것인가의 문제가 서사의 핵심적인 방향키로 작용한다.

<레디 플레이어 원>는 가상현실에 무게를 더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IOI의 수장 놀란 소렌토(벤 메델슨 분)는 사업가이지 가상현실을 즐기는 플레이어가 아니다. 그에게 가상 세계는 돈벌이를 위한 수단이지 애정의 대상이 아니다. 웨이드의 승리를 저지하기 위해 그는 수십 년에 걸쳐 구축된 가상현실의 매트릭스를 파괴하려고 한다. 이 결정은 그가 고용, 그를 대신해서 웨이드와 싸우는 아이록(TJ 밀러 분)을 비롯, 가상현실을 사랑하는 많은 IOI 직원을 당혹스럽게 한다.

디스토피아, 희망은 변화에 있다

<레디 플레이어 원>의 결말은 가상현실 쪽으로 기운 무게 중심을 실재 쪽으로 살짝 이동시킨다. 실재와의 균형과 조화를 강조하는 결말이라 해야 할 것인데, 이와 동시에 영화는 그것이 많은 이들에게 호응 받지 못했음을 고백한다. 기존 현실이 전복되어 새로운 세계가 열리지 않는 한, 사람들은 비참한 실재보다 가상현실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현실의 비참함은 IOI에서 노예노동에 종사하는 이들을 매개로 재현된다. 이들은 기계의 일부로 취급당하며 노동을 강요당하는 한편, 이동과 휴식의 자유를 박탈당했다. 봉준호의 <설국열차>(2013)에서 엔진 칸의 부품을 대체하던 어린아이의 노동이 필수적이었던 것처럼 가상현실계에서도 기계와 보조를 맞춰 일하는 인간의 노동이 필수적인 것이다.

 

기계처럼 일하다 사망했던 아버지에 이어, 사만다가 IOI에서 노예노동에 종사하게 되는 상황은 빈곤의 세습화를 상징한다. 소수 기득권자를 제외한 사람들은 현실에서 탈주할 의지가 거의 없다. 가상현실로의 도피만이 이들에게 선택지로 열려있는 것이다. 웨이드도 이러한 인물이었으나 반군을 조직한 사만다와 만나면서 저항 정신과 희망을 아는 인물로 성장한다.

여기서 드는 의문 한 가지. 사만다의 반군이 전복하고자 하는 대상은 누구인가. 자유로운 창조 정신이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는 오아시스와 대조적으로 IOI는 관료적이고 야만적 폭력을 행사하는 권위적 집단이다. 그러나 성격이 다르다 해도 가상현실 비즈니스를 다루는 기업이라는 점에서 두 회사는 차이가 없어 보인다. 사만다의 반군은 오아시스의 소유권을 노리는 IOI에 반대하며, 파시발을 지지하는 게이머 집단에 가깝다.

영화는 복잡한 실재 관계를 정교하게 구축하는 데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영화가 추구하는 것은 가상현실계의 속도감 있는 액션이다. 그리고 1980년대에 젊음을 보냈던 기성세대 관객을 가상현실 서사에 끌어들이는 것이다. 이 점에서 영화는 성공했다. 1980년대 문화의 아이콘을 출현시키거나 재현함으로써 복고적 재미와 뭉클함까지 선사했으니 말이다.

영화라는 놀이와 스필버그의 대중성

디스토피아에 희망을 찾으려는 스필버그의 세계는 19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옴니버스 영화 <환상특급>(1983)에서 그는 ‘꿈을 심어주는 노인’이라는 단편을 만들었다. 여기에서는 퇴직한 노인이 모여서 비타민 치료 강연과 TV를 보며 무기력하게 일상을 보내는 서니베일 양로원이 디스토피아로 제시된다. 노화된 문명과 가족에게서 소외된 삶. 그런데 어느 날 작은 깡통에 마법을 넣어다니는 블룸이라는 노인이 나타난다. 그는 노인들에게 깡통차기 놀이를 제안한다. 이들은 놀이에 빠져들면서 활기찼던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경험을 한다. 영화는 관객에게 희망이 없으면 인생도 없으며, 놀기 시작할 때 젊음이라는 희망을 갖게 된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레디 플레이어 원>은 가상현실의 놀이가 실재를 잠식하는 디스토피아를 배경으로 하지만 결국 희망은 놀이에 있다는 루덴스적 세계관에 근간을 두고 있다. <환상특급>의 깡통이 필름을 담는 깡통을 연상시키는 것처럼 스필버그에게 영화는 현실을 견디게 하는 마법이고 희망이고 놀이이다.

스필버그의 영화는 우리의 쓰디쓴 현실을 당의정으로 감쌈으로써, 현실을 좀 더 견딜 만한 것으로 보이게 하는 마법이다. 혁명은 하지 못하고 방만 바꾸었다는 어느 시인의 탄식처럼 그의 영화는 서사 주체의 변화에만 초점을 맞춘다. 하지만 실재 현실이 우리에게 그러한 주인공 자리를 호락호락 내어주지 않는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리하여 그에 대한 매혹을 고백하는 나조차도, 이 순간, 조금은 겸연쩍다.

진수미 카타리나
글쟁이. 더불어 잘사는 세상 연구자

 

[ 가톨릭일꾼 www.catholicworker.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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