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익환 목사의 '히브리 민중사' 다시 읽다
상태바
문익환 목사의 '히브리 민중사' 다시 읽다
  • 유형선
  • 승인 2018.04.12 11:5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유형선 칼럼]

스무살 때 읽었던 문익환 목사님의 <히브리 민중사>를 마흔 다섯에 다시 읽었습니다. 문익환 목사님 탄생 100주년 기념으로 ‘정한책방’에서 지난 1월에 복간한 책을 이제서야 구해 읽었습니다.

대학교 가톨릭학생회 동아리방에서 읽었던 책입니다. 초ㆍ중ㆍ고등학생 시절 열심히 성당을 다녔었기에 나름 성경을 자주 접했다고 여겼었는데, 문익환 목사님의 <히브리 민중사>를 읽으며 신앙관이 송두리채 뒤집히는 경험을 했습니다. 스물다섯 해가 지나 이제 다시 읽었습니다. ‘성서는 가슴으로 외치는 이야기’라는 진실을 다시한번 체험하면서 기뻤습니다.

이 책을 읽는 시간은 평화롭게 독서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거친 광야에서 모세를 따라걷는 체험이며, 다윗과 함께 전쟁터로 달려가는 체험이며, 피를 토하며 울부짖는 예언자 에레미야의 육성을 듣는 체험입니다. 문익환 목사님의 문체는 독특합니다. 일상어와 경어체가 어우러집니다. 동시에 평면적인 기술을 거부하면서 기술과 기교가 아니라 가슴으로 읽히는 생생한 체험을 선사합니다. 무엇보다 성서를 해석하는 시각이 철저하게 밑바닥 민중들의 눈높이입니다.

 

문익환 목사. 사진출처=통일맞이


거듭되는 투옥의 와중에서도 <생활성서>에 연재하셨던 글을 엮은 게 <히브리 민중사>입니다. 사실 문익환 목사님은 구약성서 전문가입니다. 민주화 운동 제일 앞자리에서 서시기 전에 가톨릭과 개신교가 공동으로 성서를 번역하는 작업에서 구약성경 번역실장을 8년동안 역임하셨습니다. 문익환 목사님은 1980~90년대 민중운동을 구름기둥과 불기둥처럼 이끌었던 분입니다. 박정희와 전두환 군사독재정권 아래서 끊임없이 감옥살이를 하셨습니다. 1976년 3월 첫 번째 투옥부터 1994년 선종하실 때까지 18년 동안 6번 투옥되시면서 총 11년 이상을 감옥에서 보내셨습니다.

성서번역은 단순히 기술적인 차원을 넘어서는 문제입니다. 번역된 성서를 읽는다는 것은 지금 시대 사람들을 직접 성서가 쓰여진 시대로 안내하여 그 시대 사람들이 느꼈던 생생한 세계에 직접 부딪치게 하는 일입니다. 저 시대 사람들이 느꼈던 생명의 힘을 지금 이 시대 사람들에게 문자로 전달하는 일이 바로 성서번역 작업입니다. 요컨대 문익환 목사님의 <히브리 민중사>는 공동성서 번역 작업에서 무르익은 성서에 관한 깊은 통찰력과 문장력이 민주화 운동과 반복되는 투옥이라는 경험치가 한데 만나 어우러진 작품입니다.

용어정리부터 해보겠습니다. ‘히브리’라는 단어는 출애굽기에 등장하는 ‘하비루’에서 유래합니다. 하비루는 이집트 및 근동지역에서 어떤 이유에서건 삶의 터전에서 밀려나 광야를 떠도는 이들입니다. 전쟁포로, 노예, 강도떼, 혹은 전쟁을 직업으로 하는 용병이 하비루 입니다. 이런 하비루들이 섬기는 하느님이 바로 ‘야훼’입니다. 요컨대 야훼는 이스라엘 민족신 이기 이전에 억압받는 천민들의 신이었습니다.

문익환 목사님의 글을 읽고 있으면 지식의 차원이 아니라 삶의 방향성이 움직이는 체험을 합니다. 묵직한 기운이 심장에서 퍼져 나와 온 몸을 뜨겁게 휘어 감는 것도 같습니다. 하느님 믿지 않는다고 아무도 욕하지 않는 시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 믿어보겠다는 소망이 얼마나 두렵고도 험난한 길인지, 가슴 벅차 오르는 놀라운 일인지를 이 책은 증언합니다.

책 중간 중간 문익환 목사님의 시를 종종 만날 수 있습니다. 야훼를 따르는 하비루, 즉 민중들의 꺽이지 않는 저항 정신을 노래한 문익환 목사님의 시를 옮겨보겠습니다. 제목이 ‘난 발바닥으로’ 입니다. 

하느님
이 눈을 후벼 빼 보시라구요
난 발바닥으로 볼 겁니다
이 고막을 뚫어 보시라구요
난 발바닥으로 들을 겁니다
이 코를 틀어막아 보시라구요
난 발바닥으로 숨을 쉴 겁니다
이 입을 봉해 보시라구요
난 발바닥으로 소리칠 겁니다
단칼에 이 목을 날려 보시라구요
난 발바닥으로 당신을 생각할 겁니다
도끼로 이 손목을 찍어 보시라구요
난 발바닥으로 풍물을 울릴 겁니다
창을 들어 이 심장을 찔러 보시라구요
난 발바닥으로 피를 콸콸 쏟으며
사랑을 할 겁니다
장작더미에 올려 놓고
발바닥째 불질러 보시라고요
젠장 난 발바닥 자국만으로 남아
길가의 풀포기들하고나 사랑을 속삭일 겁니다

부디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이 <히브리 민중사>를 꼭 만나시기를 빕니다. 이스라엘 왕궁사의 폐허를 파헤쳐 민중의 역사를 찾아내고, 민중의 역사 한 가운데 깊이 새겨 있는 하느님의 발자국을 펄펄 뛰는 문체로 증언하시는 문익환 목사님을 만나실 수 있을 겁니다.

유형선 아오스딩
<가족에게 권하는 인문학> 저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