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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처럼, 말만 착한 것이 더 나쁘다

[유대칠의 아픈 시대, 낮은 자의 철학 -25]

참된 행복이란 무엇인가? 그저 ‘홀로 있음의 행복’이 참된 행복일까? 아니면 ‘더불어 있음의 행복’이 참된 행복일까? 많은 철학자들이 오랫동안 고민한 문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사회적 동물이라 했다. 결국 인간은 ‘더불어 있음’이 본질이란 말이다. ‘홀로 있음’보다 ‘더불어 있음’이 더욱 더 인간다운 그러한 존재 말이다. 그러니 당연히 ‘홀로 있음의 행복’보다 ‘더불어 있음의 행복’이 인간에게 더 적절해 보인다.

어찌 보면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더불어 산다’는 것이고 ‘인간답게 행복하겠다’는 것도 ‘더불어 살며 행복하겠다’는 말이다. 이리 생각하면, 종교가 이야기하는 행복도 결국 더불어 살며 이루어지는 행복일 것이다. 종교 역시 인간의 문제이니 말이다. 그러나 이것이 쉽지 않다.

 

사진출처=pixabay.com

우리는 매우 흔히 이기적으로 행동한다. '함께' 보다는 나만의 욕심으로 홀로 이기고 소유하며 사는 것이 편하다. 그렇게 우린 너무나 쉽게 실수한다. 엉뚱한 짓을 한다. 인간답지 못한 짓을 한다. 에디트 슈타인은 아래와 같이 말한다.

“매일 모든 일을 엉뚱하게 하는 것은 당신만의 일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인내하시고 동정하십니다.”

맞는 말이다. 우리는 너무나 쉽게 실수한다. 우리 인간은 완전하지 않다. 실수가 일상이다. 그러나 기억해야 한다. 그 실수로 나 아닌 누군가는 심한 아픔에 눈물 흘리기도 한다. 그 눈물 앞에 나는 부끄러움에 고통스러워하기도 한다. 그 고통이 나 자신의 삶을 더욱 더 돌아보게 한다.

실수가 부끄러움이 되고, 부끄러움이 고통이 되고, 그 고통이 더욱 더 착하게 한다. 무엇이 더 착한지 고민한다는 것은 이미 도덕적 주체로의 삶을 결단했다는 것일지 모른다. 도덕적 주체는 자기 실수로 아픈 남의 고통을 그냥 두지 않는다. 부끄러워서 말이다. 그것이 고통스러워서 말이다.

요즘 종교가 사람을 아프게 한다. 성범죄, 인권유린, 노동탄압, 금전비리 등 온갖 죄악으로 사람을 아프게 한다. 종교가 아프고 약한 이와 더불어 있지 않고 그저 홀로 있으려 한다. 홀로 기쁘고자 한다. 이런 저런 종교의 언어로 ‘더불어 있음’을 강조하는 듯하지만, 실상 ‘더불어 있음’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삶을 살아간다. ‘말’만 착하다. 그런데 말만 착한 것이 더 나쁘다. 자기 종교를 위한 일이라면 누군가의 고통과 아픔은 어쩔 수 없다 생각하는 듯하다. 더불어 있음의 행복을 모른다. 말로는 더불어의 삶을 이야기하지만 철저하게 홀로 있음의 행복, 그것만을 보며 산다.

안다. 아직도 많은 종교인들은 착한 삶을 살아간다. 하지만 일부 종교인의 실망스러운 모습은 너무나 절망스럽다. 스스로도 부패한 삶을 살아갈 뿐 아니라, 수많은 이를 아프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이 시대의 독이 되고 있다. 누군가는 이런 종교의 모습을 모른체 하고 그저 넘기려 한다. 대부분의 종교인들은 여전히 더불어 있음의 행복 속에 살아간다면서 말이다. 그런데 기억해야 한다. 세균에 의한 죽음은 아주 작은 감염에서 시작된다. 조심해야 한다.

종교에게 독은 부끄러움을 모르며 ‘홀로 있음의 행복’에 빠져 살아가는 이들이다. 이들이 결국 종교를 죽인다. 종교는 무신론자에 의하여 죽는 것이 아니라. 이들에 의하여 병들어 죽을지 모른다. 본질을 망각한 종교는 이미 종교가 아니다. 본질을 망각한 그리스도교도 이니 그리스도교가 아닐지 모른다.

에디트 슈타인은 그리스도교인이란 "하느님의 보편적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라 했다. '사랑의 밖'을 두지 않고 사랑 가운데 모든 인간을 하나 같이 사랑하는 하느님의 그 사랑, 이방인을 두지 않는 사랑, 그리스도교인은 바로 이런 보편적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다. 간단히 말해 ‘더불어 있음의 행복’을 온 삶으로 살아가는 이들이다.

“누군가 하느님 가운데 더욱 더 깊이 들어가게 되었다면, 그는 더욱 더 밖으로 나와야 합니다. 하느님의 삶을 따라 전파하며 세상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보편적 사랑은 말이나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다. 말만 착한 것이 무슨 선행인가? 보편적 사랑을 온 삶으로 살아야 한다. 세상으로 달려 들어가 그곳에서 이루어지는 그런 삶이어야 한다. 종교의 사랑은 더불어 있어야 한다. 그 더불어 있음으로 고통이 온다 해도 물러서지 않아야 한다. 에디트 슈타인은 보편적 사랑으로 당하게 되는 아픔은 고통이 아니며, 오히려 하느님의 보편적 사랑의 질서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참된 고통이라 했다. 이쯤에서 문익환 목사의 글이 떠오른다.

“그릇된 종교가 얼마나 사람을 악독하게 만들 수 있느냐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보기가 아니겠습니까? 독선적인 종교가 얼마나 철면피하게 될 수 있느냐를 좋은 보기가 바로 기독교 2천년 역사라도 해도 되는 것 아닐까요?”

홀로 있음의 종교는 사람을 악독하게 만든다. 독이다. 에디트 슈타인이 이야기하듯이 고통의 길에 선 종교는 이미 독선적인 종교일 뿐이다.

요즘 종교가 사람을 아프게 하고 있다. 슬프다. 스스로 고통이고 타인에겐 독이 되어가고 있다. 더불어 있음의 행복, 그 인간 존재의 참다운 행복에 어울리는 종교가 되기 위해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대단한 무엇이 아니다. 어쩌면 부끄러움이다. 부끄러움을 알기 바란다.

유대칠 암브로시오
중세철학과 초기 근대철학을 공부한다. 
대구 오캄연구소에서 고전 세미나와 연구, 번역을 하고 있다

[ 가톨릭일꾼 www.catholicworker.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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