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서] 신자들만, 아니,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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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서] 신자들만, 아니,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
  • 리차드 로어와 죠셉 마르토스
  • 승인 2018.03.27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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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 철저한 전통주의자들-5

성전은 하느님의 힘으로 영광스럽게 된다

새 예루살렘의 영상에 고무된 예언자 하깨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유배민들에게 하느님만이 완전하시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다른 것은 모두 변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연스레 좀더 실질적인 문제에 관심을 갖고 싶어했으며, 자신들이 살 집을 짓고 성전을 건립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하깨는 그들이 야훼를 모든 것 위에 두기만 한다면 그 분께서 그들의 피난처와 방패가 되어 주실 것이라는 점을 상기시켰다. (하깨의 활동과 예루살렘을 재건하고 성전을 복구하려는 유대 지도자들의 노력은 에즈라와 느헤미야의 역사서에도 기록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들이 온 힘을 다 바쳐 재건한 성전을 보고 실망을 금치 못했다. 가난 때문에 그들의 성전은 과거 솔로몬 왕 시대의 웅대함을 갖추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하깨를 통해 성전의 진정한 영광은 금과 은으로 된 장식에 있지 않고 그 안에 현존하시는 주님을 통해 드러난다고 말씀하셨다.

그 말씀은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큰 문제로, 우리는 교회를 아름답게 꾸미는데만 정신이 팔려 교회의 참된 영광이 멋진 외관에 있지 않고 하느님의 성령, 그 곳에서 기도를 드리는 사람들의 정신에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곤 하기 때문이다. 교회는 사람의 손이 아니라 하느님에 의해 영광스러워진다.

 

사진출처=pixabay.com

메시아를 희망하다

예언자의 저서에 나타나는 마지막 테마는 메시아이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메시아가 당연히 예수를 지칭한다고 생각한다. 히브리어의 메시아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는 그리스어로 “기름 부음을 받은 자”란 뜻이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란 말 그대로 “메시아이신 예수” 아니면 “기름 부음을 받은 예수”라는 뜻이다. 그러나 그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를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 궁극적으로 어떻게 완성될지 모르고 있었다.

기원전 5세기경, 유배로부터 돌아온 이후 즈가리야와 말라기 같은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의 더 큰 중흥을 꿈꾸게 되었다. 유배로부터 풀려나오긴 했어도 그들은 여전히 가난했고 외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그들은 야훼 자신이 직접 오시든지, 아니면 하느님의 성령으로 충만한 이를 대신 보내시어 자신들을 완전히 자유롭게 하시고 구원사업을 완수해 주시기를 바랬다. 그리하여 그들은 메시아를 희망하게 되었고, 기름 부어진 자, 그 분이 어떤 방식으로 등장할 지 상상하게 되었다:

"수도 시온아, 한껏 기뻐하여라.
수도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보아라, 네 임금이 너를 찾아오신다.
정의를 세워 너를 찾아오신다.
그는 겸손하여 나귀, 어린 새끼나귀를 타고 오시어
에브라임의 병거를 없애고
예루살렘의 군마를 없애시리라.
군인들이 메고 있는 활을 꺾어 버리시고
뭇 민족에게 평화를 선포하시리라.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큰 강에서 땅 끝까지 다스리시리라."
(즈가리야 9,9-10)

오늘날 이 예언의 말씀 속에서 우리는 이 세상에 진리의 왕국을 건설하시는, 그것도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메시아 예수의 이미지를 쉽게 그려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2000년간의 심사숙고와 기도 끝에 알게 된 것이다. 초기의 예언자들은 다만 하느님께서 이 세상의 평화와 정의를 세우기 위해 당신의 영광을 아직 드러내시지 않고 계시다는 것만을 알 뿐이었다.

그들이 자신들의 상상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생각해낸 야훼의 모습은 이스라엘의 원수들을 물리쳐 주시는 승리의 왕이었다. 그것은 온전한 모습이 아니었지만 장차 나타나실 분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에 집중하고 그것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을 아주 천천히 배우듯이 이스라엘의 자녀인 유대인들도 천천히 그것을 배워 나갔다.

유대인들은 이제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가나안을 정복하고 그곳의 주민들을 모두 죽이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던 때부터 많은 세월을 흘려 보냈다. 여호수아 시절 이후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왕국을 폭력이 아니라 정의의 다스림으로 세우고 싶어하신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이를 자기 식대로, 자기들의 관점에서 이해하면서 그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까지 그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편협함에 사로잡혀 있어, 메시아는 그들만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실 것이고, 그 분이 예루살렘을 만민 위에 세우셔서 하느님을 대신해 이 세상을 통치하게 하실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언젠가는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나라가 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요나 이야기, 하느님의 너른 품

성서에서 우리는 이런 편협한 시각을 수정하게 만드는 이야기를 발견한다. 요나서는 성서의 이야기 중 오늘날 단편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과 가장 유사한 형태의 이야기일 것이다. 비록 이스라엘의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하지는 않았지만 그 이야기는 고대 종교인들과 현대의 우리들에게까지 보편적인 메시지를 전하고 있으며 바로 그로 인해 하느님의 계시를 담은 책에 포함되게 되었다. 이 메시지는 하느님께서 자신들을 선택하셨다는 것이 다른 이들을 배제하셨다는 뜻이 아님을 전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니느웨 사람들을 회개시키기 위해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보낸 한 유대인 예언자의 이야기다. 요나는 “야훼는 우리의 하느님이시다. 저런 이교도들이 어떻게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특권을 가질 수 있단 말인가?”라고 중얼거렸다. 그리하여 그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항하였으나, 결국 그 분으로부터 달아날 수가 없었다. 그는 배를 타고 도망치려 했으나, 거센 폭풍우 때문에 배는 뒤집어지고 만다. 야훼는 거대한 물고기로 하여금 그를 삼키게 한 뒤 마른 땅에 뱉어 놓게 하셨다. 예언자가 도착한 곳이 어디였겠는가? 그는 하느님께서 처음에 그를 보내시려고 하셨던 니느웨의 해안가에 떨어져 있었다!

투덜거리며 요나는 니느웨로 가게 된다: “좋습니다, 주님, 당신이 그렇게 원하신다니! 제가 안갈 수 없죠.” 그러나 그는 그들이 자신의 말을 믿지 않기를 내심 바란다. 그는 이스라엘의 복음, 하느님의 길이 곧 생명의 길이라는 소식을 그들이 체험하지 않게 되길 바랬다. 어쨌든, 그는 니느웨의 시내로 가 그에게 전달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알다시피, 니느웨 사람들은 그것을 믿는다! 그들은 회개하고 하느님께로 돌아갔다.

요나는 잔뜩 화가 났다! “야훼께서는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이교도들에게 당신의 말씀을 전하시게 하시고, 계약의 백성들에게 마땅히 돌아가야 할 것을 나누어 주게 만드시는가?” 그는 뜨거운 태양 밑에 앉아 분노로 끓고 있었다. 그러나 야훼는 마음 내켜하지 않는 당신의 예언자를 여전히 사랑스럽게 바라보시고는 그가 앉아 있는 지점에 키가 크고 잎이 무성한 나무를 자라게 하시어 그늘을 드리워 주셨다. 그 덕에 요나는 열을 조금 식혔으나 다음날 그 나무가 죽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잎사귀는 모두 비틀어져 있었다. 요나는 더욱 더 화가 치밀어 올랐다!

영감으로 가득찬 이 이야기는 주님이 이 예언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것으로 끝맺는데,

"요나야, 내가 누구에게 은총을 주고 누구를 사랑해야 한다고 따지는 너는 누구나?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았어도 나는 너를 사랑하지 않았느냐? 내가 단 하루만 산 이 나무에게 생명을 주었듯이 내가 원하는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내 사랑을 주겠다. 내가 사랑하는 것에 왜 그렇게 화를 내느냐? 내가 관대하다고 네가 왜 그렇게 아까워 하느냐?"

제한 없는 사랑

언제나 그렇듯이, 복음은 믿기 어려울 만큼 좋은 소식으로 차 있다. 우리는 그 모든 것이 그처럼 쉽지는 않을 것이라고 불평한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아니면 적어도 사랑을 받을 자격을 갖춰야 한다고 믿고 있다. 우리는 하느님이 그 무한정한 사랑을 우리 자신에게만, 법을 준수하는 사람들에게만, 우리가 인정할 수 있는 종교를 갖고 있는 사람 아니면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에게만 부어 주신다고 생각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하느님은 당신의 예언자들을 통해, 우리가 성서라고 부르는 영감의 말씀을 통해, 그리고 우리의 가슴 안에서까지 말씀하신다: “내 사랑을 제한하지 말아라. 나의 관대함은 끝이 없다. 나는 네가 한 행위 때문에 너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사랑 그 자체이기 때문에 너를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 시대에 와서도 제도 종교는 여전히 “정상인”에게만 정당성을 부여하려고 하고 있는데, 그 정상인이란 같이 어울리곤 하는 사람들, 성직자, 세례 받은 이들, 교회에 나가는 사람들, 이성애자들과 제도 종교라는 체제를 유지하는데 공헌하는 다른 모든 사람들을 말한다. 우리는 여전히 이단자를 만들어 내고 미워하기를 좋아한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과 보편적인 사랑에서 도망친 회개하지 않은 요나다.

예언자들의 시대를 통틀어, 왕정의 시작으로부터 유배지에서 되돌아오기까지, 주님은 당신 생명의 말씀을 이스라엘에게 주셨다. 그들은 항상 실수를 저질렀다. 그들은 언제나 단편적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그 말씀이 그 시대를 위한 말씀이라는 것도 이해하게 되었다. 그 말씀은 그 순간의 역사를 위한 말씀이었고, 그들 자신의 상황과, 그들 자신의 삶을 위한 말씀이었다.

그 말씀은 불가피하게 적어져 내려왔다. 그리고 항상 종교적인 전통에 얽매이게 되었다. 그것은 여지없이 제도화되었고 그 시대에 합당치 않은 것으로 변화되었다. 그러나 예언자들을 통해 우리에게 오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가슴속에 그 분이 그토록 하고 싶어 하셨던 메시지를 들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원출처] <성서의 위대한 주제들-구약>, 리차드 로어와 죠셉 마르토스, 1987
[번역본 출처] <참사람되어>, 2001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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