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빈센트 드 폴, 가난한 이들의 좋은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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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빈센트 드 폴, 가난한 이들의 좋은 친구
  • 브랜든 보트
  • 승인 2018.02.28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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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20대 초기에 가톨릭이 되었고, 그때 나의 삶을 영원히 바꾸어 놓을 한 구절을 복음주의 작가인 샨 클레이본의 책에서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다:

“교회의 거대한 비극은, 부유한 그리스도인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부유한 그리스도인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모른다는 것이다. 가난과 부유함의 세계가 충돌할 때 발생하는 강력한 융합이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다.”

수년 동안 나는 나 자신을 꽤 관대한 녀석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매 주일 본당에 헌금을 했다. 그리고 매달 국제구호기관에 회비를 납부했다. 때때로 길가에 있는 걸인에게 몇 달러씩 주기도 했다. 그러나 샨의 그 구절이 나를 칼로 찌른 것처럼 파고 들어왔다. 내가 멀리 떨어져서 가난하고 취약한 사람들을 도왔다 해도, 실제로는 어떤 가장자리의 사람도 알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부분 나의 친구들도 나처럼 살았다. 견고한 중산층의 삶, 먹을 것, 있을 곳, 혹은 직업에 대하여 결코 걱정해 본적이 없는 삶을 살았다. 내가 행하는 자선은 비인격적이고 직접적인 만남이 전혀 없는 자선이었다.

그러나 도전적인 저 글귀를 읽고 나서 큰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나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만나고 친구가 되는 길을 찾기 시작했다. 우리는 웃음과 먹을 것을 나누었다. 그리고 나서 나는 그들을 이발소에 데려갔는데, 그곳에서 새로운 머리 스타일이 그들에게 엄청난 존엄성을 가져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이발하는 것을 나는 그저 당연한 일로 받아들였는데). 또 다른 때에 나는 올란도의 가장 가난한 지역을 어슬렁거리며 누구를 만나든지 간에 미소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곳에서 내가 만났던 사람들은 돈은 없었으나, 즐거움과 신앙은 꼭대기에 있었다. 나는 왜 예수님이, “가난한 사람들은 복되다.”라고 말했는지 알게 되었다.

이런 의도적인 행위를 통하여 나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그 “강력한 융합”을 표본으로 삼았다. 그렇지만, 그런 핵의 힘을 일생동안 증언했던 어떤 사람을 내가 발견한 것은 그로부터 수년이 지난 후였다.

노예가 된 사나이, 빈센트

그 사람은 빈센트 드 폴(Vincent de Paul, 1581-1660)이다. 그는 1581년 프랑스 남서 지방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부유하지 않았다. 그래서 소년은 많은 시간을 들에서 일하고 돼지를 돌보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읽고 쓰기를 잘 했기 때문에 부모는 14살 때 그를 사제로 만들기 위하여 대학에 보냈다. 빈센트는 학교에서도 뛰어났다. 1년 만에, 그는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하라는 초대를 받았다. 그는 하급품을 받았고 전형적인 프란치스코식 이발을 하는 삭발품을 받았으며, 이후 수년간 신학을 배웠다. 예외적으로 그는 1600년 9월 23일, 20세에 사제품을 받았다.

그러나 젊은 사제로서 수년의 행복한 시기를 보낸 후, 비극은 가장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몰아쳤다. 1605년 7월, 빈센트는 한 오래된 친구가 세상을 떠났고, 그에게 꽤 많은 돈을 남겼다는 소식을 들었다. 빈센트는 돈을 받기 위하여 마르세이유까지 배를 타고 갔다. 그러나 돌아오는 길에, 그의 작은 배는 해적들에게 공격을 받았다. 빈센트는 나중에 회상하기를 무슬림 해적들이 그의 배에 구멍을 내고 불을 질렀다고 했다. 그들은 승객 세 명을 죽이고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혔다. 빈센트도 팔에 화살을 맞았다. 해적들은 오르자 승객들을 붙잡아 튀니지아로 끌고 갔다. 해적들은 이 인질들을 노예로 팔았는데, 빈센트도 노예가 되어 2년 동안 힘든 시기를 보내게 되었다.

가난한 이를 섬기는 법

빈센트의 거친 주인은 그리스도인이었다가 무슬림으로 개종해 세 아내를 거느린 사람이었다. 세 부인들 중 한 사람은 터키 여인이었고, 자주 들판을 방황하다가 빈센트와 친하게 되었다. 어느 날 그 부인은 빈센트의 친절함과 낙천적인 태도에 감명을 받았다. 여인은 그가 가톨릭 사제였다는 사실에 놀라기까지 하였다. 여인은 빈센트가 말했던 신앙에 끌려가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래서 여인은 집으로 달려가 남편을 비난하면서 다시 그리스도에게 돌아가라고 애원했다. 남편은 부인의 간청에 응답하여 참회하였다. 그는 빈센트를 자유롭게 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 북아프리카에서 도망가도록 도와주었다. 두 사람은 나룻배를 타고 가다가 놀랍게도 상선을 만나 1607년 4월 28일 프랑스에 안전하게 도착하였다. 2년 동안 노예살이를 한 끝에 빈센트는 자유인이 되었다.

프랑스에 상륙하자, 두 남자는 각각의 길로 갔다. 이전에 노예 주인이었던 사람은 수도원에 들어갔고, 빈센트는 지역 본당과 수도원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그는 오랫동안 숨어 지낼 수 없었다. 그의 탁월한 덕과 지혜에 대한 소문이 퍼졌고, 어느 날 그는 여왕의 개인 사목자로 일해 달라는 놀라운 초대를 받았다. 빈센트는 수락했고 처음에는 그 자리를 즐겼다. 그가 청하는 것은 식량, 재물이든 모두 주어졌다. 그러나 점차 그는 하느님이 다른 곳으로 자신을 부른다고 느꼈다. 그는 궁의 세속적인 편안함을 넘어 상실되고 잊혀진 이들과 함께 하는 삶을 살고 싶었다. 그는 가난하고 취약한 사람들에 대한 선택을 하기로 결정했다.

처음에 빈센트는 가난한 사람들을 섬기는 데 강력한 힘을 가진 인맥을 이용하는 게 가장 낫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1613년 자신이 여왕을 섬기고 있을 때에 만났던 부유하고 영향력이 큰 곤디 가족을 도와주는 자리를 받아들였다. 곤디가는 빈센트에게 자녀들을 교육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빈센트를 가장 흥분하게 했던 것은 곤디가가 그들의 영지에서 일하는 수많은 소작인들의 사목자로 일해 달라고 또 다른 부탁을 한 것이었다. 빈센트는 가난한 노동자들을 돕는 동안에 참으로 생기가 넘쳤다. 그들은 취약한 사람들을 섬기고 그들의 고통을 가볍게 해주는 데서 소명을 느꼈다. 빈센트는 다시 한번 가난한 이들에 대한 섬김에 온 삶을 바치기로 결정했다.

가난한 사람들의 하인들 또는 애덕의 숙녀들

1617년, 빈센트는 본당 사제직으로 돌아갔다. 본당 사제로 몇 달 봉직한 지 얼마 안 되어, 그는 본당 안에서 엄청난 고난에 직면해 있는 한 가족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가난하고 식량도 떨어졌으며, 무엇보다 가족들 모두가 병에 걸린 상태였다. 빈센트는 본당 신자들에게 호소했고, 그들은 즉각 응답했다. 돈, 식량, 그리고 도움이 쏟아져 이 가족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채워졌다. 그러나 빈센트는 수 주간이 지나면 도움이 줄어들 것이고 가족은 다시 똑같은 문제로 주저앉게 될 것임을 깨달았다. 그때에 한 가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만일 그가 차례로 돌아가며 도움이 필요한 가족들을 돌보고, 정규적으로 그들을 방문하고 보살피고 헌신하는 본당 신자들의 공동체를 조직할 수 있다면, 더 영구적이고 개인적인 형태의 섬김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래서 1617년 8월 20일, 빈센트는 여성으로 구성된 첫 번째 자선행동그룹을 결성했다. 그들은 자신들을 “가난한 사람들의 하인들”(후에 “애덕의 숙녀들”)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많은 본당의 가족들을 이 개인적인 형태의 애덕으로 돌본 후, 빈센트는 곧 이어 그들 구성원의 사명을 확대시켰다. 수년 안에 그는 구성원들에게 선교적인 프로젝트를 시행하도록 했는데, 새로운 병원들을 시작하고, 전쟁 희생자들을 돕기 위한 구호기금을 모으고, 북 아프리카에서 노예들의 몸값을 치루는 일이었다. 빈센트는 그룹을 위한 규칙도 제정했다. 규정에는 그의 영성의 핵심적인 요소를 넣었다. 그것은 가난한 이들을 섬기는 것이었다. 여성들은 다른 공동체들에 영감을 주기도 했다. 얼마 되지 않아, 수십 개의 비슷한 그룹들이 프랑스 전역에서 꽃을 피웠다.

“가난한 사람들의 하인들” 그룹에 의하여 발화된 더 유명한 그룹들 중의 하나는 “애덕의 딸들” 그룹이었다. 1633년, 귀족 미망인들과 후에 성인이 된 루이즈 드 마리악과 함께, 빈센트는 우아하고 부유한 파리의 여성들을 설득하여 그들이 한데 모이고, 기금을 모으며, 실질적인 방식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돕도록 하였다. 그는 심지어 이들에게 새로운 그러나 다른 종류의 수도원 모습을 그려주었다. 그는 이 수녀들이 울타리 안에서 봉쇄 생활을 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당시 모든 여성 수도자들은 감히 수도원 담 밖을 넘어 가려고 하지 않고, 수도원 안에서 살고 일하고 기도했다. 그러나 빈센트는 이런 상황이 수녀들의 애덕을 위축시켰다고 믿었다. 육체적 영적 애덕 활동 사이의 깊은 조화를 보면서, 그는 이렇게 적었다:

“당신이 아픈 사람을 돌보기 위하여 기도를 떠날 때, 당신은 하느님을 하느님께 맡기는 것이다. 아픈 사람을 돌보는 것이 바로 기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보다 앞선 로마의 성녀 프란체스처럼, 빈센트는 애덕의 딸들에게 전 세계를 그들의 수도원으로 만들라고 명령했다:

“여러분에게는 아픈 이들의 집이 수도원이고 여러분의 장상의 집입니다. 여러분의 각자 방은 집세를 내는 방입니다. 여러분의 경당은 바로 본당입니다. 여러분의 안뜰 회랑은 도시의 길거리입니다. 여러분의 울타리는 순명입니다. …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이 여러분의 격자무늬 창살이고, 겸손이 여러분의 베일입니다.”

수많은 여성들의 공동체를 만든 후, 빈센트는 선교협의회라는 사제들의 새로운 공동체를 출범시켰다. 구성원들은 공동생활을 하고 교계의 자리를 피하며, 시골 전역에서 설교하고 특히 감옥에서 형이 확정된 사람들과 들판의 소작인들을 섬겼다. 공동체는 활발하게 퍼져나갔고 파리의 대주교는 빈센트에게 교구 신학생들을 훈련시켜 달라고 부탁했다.

빈센트의 명성은 계속 퍼져나갔다. 해외에서도 노예들과 죄수들에게 복음을 전해 달라는 요청이, 가난한 노동자들과 함께 일해 달라는 요청이 빗발쳤다. 17세기, 세속적으로 팽창해가는 프랑스에, 빈센트는 너무나 절실하게 요구되는 이타적 애덕의 모범이 되었고, 그의 제자들은 그 모범을 세계로 가져갔다. 한 장면이 빈센트의 높은 명성을 알려준다. 죽음에 임박한 루이 13세 왕이 빈센트에게 방문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가 도착하자 왕이 말했다. “오, 빈센트 신부님! 내가 다시 건강을 회복한다면 어느 주교도 당신과 3년을 함께 지내지 않으면 주교로 임명하지 않을 겁니다.”

귀족계급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라

“가난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돌보면, 하느님께서 항상 당신이 필요로 하는 도움을 마련해 주실 것이다”

빈센트는 사회의 가장 취약한 사람들, 고아들과 장애 아동들에 대한 특별한 사랑을 갖고 있었다. 그 당시에, 우리 시대에도 그런 것처럼, 어떤 가족들은 남에게 동정심을 유벌하고 기부금을 더 많이 끌어내기 위하여 실제로 그들의 아이들을 불구로 만들었다. 또한 어떤 부모들은 그들의 장애 자녀들을 시립수용소에 버려서, 그곳에서 아이들은 보통 심하게 다루어지거나 굶주림 때문에 죽어갔다.

이런 상황이 빈센트와 그의 부유한 자매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그래서 그들은 이런 잊혀진 아이들에 대하여 사실상 “선택을 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무작위로 12명의 소년과 소녀들을 뽑아, 그들을 키우고 돌보기 시작했다. 후에 애덕의 여성들은 4명의 간호원들과 함께 아이들을 위한 전용집으로 옮겼다. 그후 3년 동안 그들은 4천명 이상의 소년들과 소녀들을 돌보았다.

이 일이 성공한 후, 빈센트는 또 다른 잊혀진 그룹에게 관심을 돌렸다. 그들은 장애인이며 집 없는 이들이었다(노숙 장애인). 어떤 사람들은 이들에 대한 섬김이 17세기 가장 위대한 애덕 활동들 중의 하나였다고 간주한다. 빈센트는 새로운 보호소를 세웠는데, 이곳에서 수년 동안 약 4만 명의 가난한 사람들이 머물렀다. 당시의 다른 보호소들과 달리, 빈센트의 보호소에서는 거주인들에게 필요한 물질을 제공하는 것에 더해서 유용한 일을 할 기회를 제공했다. 이것은 노동의 존엄성과 노동자들의 권리를 보장하는 또 다른 가톨릭의 사회적 원칙을 확인하는 자리가 되었다.

이러한 예들은 빈센트의 가난한 이들에 대한 섬김의 다양한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병원들을 세우고, 보호소를 건설하며, 귀족계급의 마음을 부드럽게 함으로써 자선을 베풀게 했다. 한편 빈센트는 밑바닥 문제를 말하고 그의 손을 더럽히는 데에 거리낌이 없었다. 예를 들면, 가난한 사람들이 죽고 장례를 치를 가족이 없으면 빈센트는 직접 그들의 묘를 팠다. 그는 거리와 광장을 쓸었고, 매일 15,000명 이상의 사람들에게 무료로 음식을 공급하였다. 그는 다른 봉사자들과 함께 음식을 자주 나누었으며, 언제나 방문객들을 미소로 환영하였다.

빈센트는 북아프리카의 가난한 노예들을 돕는 일에 특히 열정적이었다. 그들과 같은 운명을 직접 겪었기 때문에, 그는 노예들의 고통에 더욱 연민을 느꼈다. 대강 25,000명의 죄수들이 굴레 속에 살고 있었고, 그들 대부분은 그리스도인들이고 터키의 해적들에게 잡혀서 가족과 떨어진 사람들이었다. 포획자들은 이들을 동물처럼 취급했으며, 어떤 육체적 혹은 영적 보살핌도 없이 가혹한 노동을 견디도록 강요당했다.

이런 상황에 대하여, 빈센트는 노예들의 굴레를 가볍게 하고 그들의 자유를 확보하기 위하여 쉬지 않고 일했다. 그는 정기적으로 선 교사들을 파견하여 잡힌 사람들을 가르치고 성사를 주도록 하였다. 그는 개인적으로 노예들의 가족과 연결하고 비밀로 소식들을 주고받도록 도와주었다. 그와 애덕의 딸들은 또한 몸값을 모아서 그가 죽을 때 즈음에는, 약 12,000명의 노예들에게 자유를 선물할 수 있었다.

빈센트, 교회의 얼굴을 바꾸어 놓다

1656년, 빈센트는 떨쳐 버릴 수 없는 열병에 걸렸다. 그는 심한 고통을 느꼈으며 다리에는 종기가 생겨 걸을 수가 없었다. 이후 수년 동안 궤양은 더욱 악화되었고, 빈센트는 마침내 의자에 앉아서 죽었다. 때는 1660년 9월 27일이었다. 빈센트의 장례미사를 주례했던 주교는 강론에서 빈센트가 비록 시골 출신이지만 전혀 “단순한 시골뜨기”가 아니었다고 말했다. 일생동안 빈센트는 “교회의 얼굴을 바꾸어 놓았다.” 또 다른 전기 작가는 이 점을 더 예리하게 말했다: “빈센트가 죽었을 때, 파리의 가난한 사람들은 그들의 가장 좋은 친구를 잃었다.”

지역에서 빈센트를 기리는 신심이 빨리 퍼져나갔다. 그는 죽은 지 일 년이 지난 후 복자가 되었고 4년 후에는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그리고 1885년에, 교종 레오 13세는 그를 모든 애덕활동의 수호성인으로 명명했다. 지금까지도 빈센트의 유산은 계속 되고 있다. 그의 유산은 성 빈센트 드 폴 회의 실천적인 애덕을 통하여 나타나는데, 수천 개의 본당에서 적극적으로 행해진다. 그리고 두 개의 전 세계적인 수도회에서 분명하게 보이는데, 빈센시안회(미션수도회)와 애덕의 딸들회이고, 이 회는 또한 성 빈센트 드 폴의 애덕 수녀회로도 알려져 있다.

애덕의 작업

도로시 데이는 이렇게 주장한 적이 있다. “세례 받은 사람이 매일 하는 모든 일은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육체적 영적 자비의 활동과 연결되어야 한다.” 애덕, 자비의 활동은 가난하고 취약한 사람들에 대한 선택을 살기 위한 구체적 방법들을 제시하는 14가지 특정한 연민의 행위를 의미한다. 이 열네 가지 행위들은 전통적으로 두 범주로 모아진다.

육체와 관련이 있기 때문에 육체적(신체적) 애덕 행위는,

❣ 굶주린 사람들을 먹이는 것
❣ 목마른 이들에게 마실 것을 주는 것
❣ 벌거벗은 이들에게 입을 옷을 주는 것
❣ 집 없는 이들에게 있을 곳을 마련해 주는 것
❣ 아픈 사람들을 방문하는 것
❣ 갇힌 이들을 자유롭게 하는 것
❣ 죽은 이들을 매장하는 것

영적인 애덕행위는,

❣ 무지한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
❣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상담해주는 것
❣ 죄인들을 타이르는 것
❣ 잘못된 것들을 인내하며 견디는 것
❣ 위반, 공격을 기꺼이 용서하는 것
❣ 괴로워하는 사람들을 위안하는 것
❣ 산 사람들과 죽은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

도로시 데이의 금언을 따르면서, 우리는 매일 아침 그날에 우리가 할 수 있는 특정한 애덕의 활동방식에 대하여 성찰하면서 시작할 수 있다.

성 빈센트 드 폴이 주는 교훈들

빈센트 성인의 삶을 공부해 볼 때에 우리는 거의 끝이 없는 영감을 얻게 된다 – 그리고 놀랍다. 그가 했던 모든 일을 성취하려면, 그의 매일 매일은 백 시간이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수많은 교훈들 중에서 우리는 세 가지 특별한 이삭을 주을 수 있다.

먼저, 빈센트는 가장 효과적인 애덕의 형태는 개별적이라고 보여준다. 이것이 그의 가장 중요하고 지속적인 메시지라고 논할 수 있다. 초기의 본당 공동체시절부터, 노예들 사목, 그가 출발시킨 회에 이르기까지, 빈센트는 가난과 부의 세계가 충돌하는 중에 발생하는 그 “강력한 융합”을 강화시켰다. 그는 우리가 어떤 사람한테 더 가까이 갈수록, 그들의 필요에 더 응답하고 섬길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것은 우리의 친구들과 가족구성원의 경우도 사실이고 가난하고 취약한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진실이다.

그러나 빈센트의 교훈은 단지 개인적인 관계가 우리로 하여금 가난한 이들을 섬기도록 돕는다는 것만이 아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또한 우리를 변화시킨다.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우리는 단출함의 가치와 흔들리지 않는 신앙의 증언을 배운다. 우리는 가장자리에 있는 사람들과 당신을 일치시킨 그리스도 그분을 만난다. 가난한 이들과 친구가 되는 것은 이처럼 모든 사람에게 유익한 것이다.

두 번째로, 빈센트는 우리에게 “가난한 이들에 대한 선택”은 단지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것뿐만 아니라, 또한 다른 이들로 하여금 가난한 이들을 돕도록 영감을 준다고 가르친다. 일생동안 빈센트는 부유하고 안락한 사람들이 그들의 삶을 섬김에 바치도록 돕기 위하여 자기의 영향력과 관계들을 지렛대로 사용하였다. 그는 혼자서, 수천 명의 사람들을 먹이거나, 수백 명의 아프리카 노예들을 결코 해방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관대한 기부자들과 친구들의 도움으로, 그는 놀라운 공적을 이룰 수 있었다.

가난하고 취약한 사람들에 대한 선택은 개인적인 추구가 아니다. 그것은 공동의 사명이므로, 우리가 서로를 더 섬길수록, 더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빈센트의 일은 “가난한 이들에 대한 선택”이 수많은 다양한 차원에서 작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빈센트는 노예제도에 대하여 싸우고 실업자들이 일을 찾도록 도움으로써 가난의 제도적 문제들을 말했다. 그러나 그는 또한 식량이나 있을 곳 등 사람들의 즉각적인 필요에도 응답했다. 가톨릭의 사회적 가르침은 가난에 대항하는 것은 정의와 애덕, 제도적 구조적 개혁과 개인의 연민 모두가 포함되는 일이라고 견지한다. 빈센트는 이 양날의 접근을 탁월한 모범으로 보여주었다. 

[원출처] <성인들과 사회정의-세상을 변화시키는 길잡이>, 브랜든 보트
[출처] <참사람되어> 2017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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