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든 세상, 더 치열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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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든 세상, 더 치열하게
  • 유대칠
  • 승인 2018.02.14 16: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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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칠의 아픈 시대, 낮은 자의 철학 -23]

힘든 세상이다. 정의로운 삶이 무엇인지 혼란스러운 세상이다. 정의를 이야기하고 싸울 것 같은 이들이 너무나 당당히 악을 행하고 손쉽게 처벌을 피한다. 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당당히 정의를 이야기하며 살아간다. 힘든 세상이고, 혼란스러운 세상이다.

언론을 통하여 접하는 종교의 모습을 참 서글프다. 하느님 사랑 속에서 이웃 사랑을 실천하겠다며, 교회가 운영하던 곳에선 불법감금이 있었다. 약자의 옆에서 약자의 눈물이 되겠다는 이들이 그 약자의 인권을 무시해 버렸다. 심지어 공익을 위하여 조성된 돈을 횡령하고 비자금을 조성했다 한다. 하느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거짓되이 사용하며 그것으로 이웃의 것을 탐한 참으로 절망적인 죄악이다.

그 절망적인 죄악을 만든 이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이 땅 위에 희망으로 만들겠다는 이들이다. 희망을 이야기하며 절망의 세상을 만들어간 그들의 위선이 답답하고 슬프다. 힘든 세상이다. 참 아픈 세상이다. 도대체 이 세상은 무엇이기에 이리도 ‘절망’스러운 것인가? 두렵기도 하다. 신앙을 이끌어 준다는 이들의 삶이 저러한데, 과연 그 신앙이란 것은 도대체 무엇이고 하느님의 사랑은 도대체 무엇인가 답답하고 의심스럽다.

칼 라너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일종의 상호조건적 관계에 있다.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알 수 있으며,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조건 없이 내어 주며 자기를 위한 수단으로 삼지 않게 된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이와 같이 상호조건적이라는 칼 라너의 말은 더욱 더 이 비참한 현실을 아프게 느끼도록 한다. 더욱 더 절망적으로 느끼게 한다. 그의 말은 이 현실에서 가능할까?

키르케고르의 ‘신 앞에선 단독자’란 이야기도 생각난다. 단독자란 매우 고독한 일이다. 무리를 떠나 홀로 자신의 모습을 돌아봄을 뜻한다. 하느님 앞에서 무엇 때문에 살아야하고 또 죽을 수 있을 것인지 치열하게 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 고독한 대결 이후 타자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그 치열한 자기 죄에 대한 고백 이후 타자를 향해야 한다.

고독의 작은 기도의 공간에서 끝나는 것이 신앙이 아니다. 신 앞에선 단독자의 참된 모습이 아니다. 결국 단독자의 고독은 이웃을 만나기 위한 준비 과정이다.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보며 고개 돌리는 것은 하느님을 자기 삶에서 몰아내 버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키르케고르의 이야기도 자기 죄에 대한 치열한 고백도 없고, 이웃에 대한 사랑도 없는 이들 앞에서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한 이기적 생존을 고상한 신학의 언어로 포장하는 이들의 앞에선 더욱 더 큰 절망으로 다가온다. 이 비참한 현실을 더욱 더 비참하게 느끼도록 한다.

 

그림=김화

어떻게 살아야하는 것일까? 이 비참한 현실 속에서 신앙을 자기 삶의 목표로 삼고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도 이러한데 과연 어떻게 살아야하는 것일까? 위선과 독선으로 가득한 종교의 모습 속에서 과연 어떻게 살아야하는 것일까?

오른 손이 편한 나의 친구는 굳이 왼손으로 성당 그림을 그린다. 전문적인 솜씨도 아니다. 홀로 익힌 서툰 솜씨다. 오른 손으로 그리면 금방 끝날 그림을 떨리는 왼손으로 한 획 한 획 참으로 조심스럽게 오래 그린다. 그렇게 조심스럽게 벽돌 하나를 그려도 비뚤비뚤 어설퍼 보인다. 집중에 집중하고 고민에 고민하며 그린 한 획인데 말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어설픈 비뚤비뚤 벽돌이 모이고 모여서 예쁜 성당이 된다. 오른 손으로 전문가가 그린 그림에 비하여 여전히 어딘가 어설프지만 제법 예쁜 성당이 된다.

어찌 보면 우리네 삶이 그렇다. 서툰 왼손으로 한 획 한 획 힘들 듯이 우리 삶도 매순간 힘들다. 치열하게 고민하고 고민하여 선택했지만 돌아보면 비뚤비뚤 어설프다. 어설픈 모습이라도 치열한 고민들이 모이면, 어느 순간 하느님을 향한 참 아름다운 삶이 그려져 있다. 매순간 단독자가 되어 치열하게 고민한다. 매순간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하여 나름 힘들게 노력한다. 하지만 어설픈 비뚤비뚤 모습의 벽돌 한 장을 드린 것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어설픈 벽돌 한 장이 끝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주변의 위선적인 이들의 위선적 신앙이 자신의 신앙을 흔들어도 꾸준히 쉼 없이 고독자가 되어 고민하고 고민해야 하고, 이웃을 위하여 자신의 삶에게 치열하게 고민해야 한다. 그렇게 그려진 벽돌이 어설퍼도 그렇게 서툰 벽돌이 모이고 모여 하느님을 향한 자기만의 아름다운 삶이 그려진다.

현실은 힘들다. 그러나 떨리는 서툰 왼손으로 그리는 그림이 어느 순간 아름다운 자기만의 그림이 되듯이 매순간 치열한 우리 삶의 고민과 실천이 비록 서툴러도 결국은 하느님을 향한 저마다의 아름다운 그림이 될 것이라 믿는다. 비록 이런 저런 현실의 위선이 자신의 신앙을 힘들게 해도 말이다. 어쩌면 떨리는 손으로 서툴게 그려가는 그 왼손의 노력이 신앙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오늘도 나는 나의 삶에서 나의 그림을 서툴게 그린다.

아무리 위선적인 이들의 위선이 나의 신앙, 나의 왼손을 흔들어도 나의 그림은 쉬지 않는다. 더욱 치열하게 하느님을 고민하고 더욱 치열하게 이웃을 돌아본다. 힘든 세상이 내 왼손 그림을 쉴 이유는 아니기 때문이다. 

유대칠 암브로시오
중세철학과 초기 근대철학을 공부한다. 
대구 오캄연구소에서 고전 세미나와 연구, 번역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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