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항쟁과 천주교] 김수환 추기경 "이 봄에 진달래가 환하게 피어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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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월항쟁과 천주교] 김수환 추기경 "이 봄에 진달래가 환하게 피어나듯"
  • 이명준
  • 승인 2018.02.04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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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3호헌조치에 대한 천주교계의 반응-1

1987년 4월 13일 전두환은 호헌조치를 발표했다. 이에 대한 천주교 쪽 저항의 첫걸음을 디딘 이는 김수환 추기경이었다. 김수환 추기경은 4월 19일 부활절 메시지를 발표하였다. 이 메시지는 전두환의 호헌조치를 “무참히 깨어진 개헌의 꿈”으로 맞받으며 천주교회의 직선제 개헌투쟁의 서막을 열었을 뿐만 아니라, 시대의 양심들에게 투쟁의 소명과 용기를 불러일으켰다. 군부독재에 저항하며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오던 김수환 추기경의 이 날의 메시지는 양심과 정의의 부활을 알리는 그야말로 기쁜 소식이었다.

 

김수환 추기경

<김수환 추기경의 첫 메시지>

침묵속의 하느님

“태양이 구름에 가려 빛나지 않을지라도 나는 태양이 있음을 믿습니다. 사랑이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을지라도 나는 사랑을 믿습니다. 하느님께서 침묵 속에 계시더라도 나는 하느님을 믿습니다.”

이 시는 세계 제2차 대전 중 독일의 퀄른 땅에 군사용으로 건설된 지하 동굴 속에 새겨져 있습니다. 우리는 누가 이 시를 썼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시를 쓰신 분이 얼마나 깊은 믿음을 가진 신앙인이었는가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전쟁의 막바지에 어둡고 습기 찬 동굴 속에서도 이 분의 눈은 빛나는 태양을 볼 수 있었고, 이 분의 마음은 따뜻한 사랑에 차 있었고, 마치 하느님이 안 계신 듯 침묵만 지키시는 절망과 공포 속에서도 이 분의 믿음은 하느님을 신뢰하고 하느님께 희망을 거는 것이었습니다.

그 전쟁은 오래전에 끝났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계속되는 또 다른 전쟁들이 있습니다. 민족과 형제를 갈라놓은 사상의 차가운 대립, 인간답게 살기위한 기본권의 뜨거운 투쟁, 먹고살기 위한 생존의 처절한 경쟁,…… 이런 격랑 속에서 우리는 쉽게 좌절을 겪기도 하고 때로는 두려움마저 쌓이기도 합니다.

부활대축일 복음을 보면 예수님이 무죄하면서도 참혹히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묻히신 후, 마리아 막달레나가 누구보다도 먼저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전혀 뜻밖에 휑그렁 비어 있는 무덤을 보았을 때 그녀는 말할 수 없는 두려움과 절망에 빠졌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을 잘 모시고 그분께 대한 마지막 정성으로 향유를 바르고 싶어 했던 막달레나는 망연자실 사도들에게 뛰어가 이렇게 말합니다. “누군가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다 모셨는지 모릅니다.”

주님의 죽은 모습이나마 다시 볼 줄 알았던 마지막 희망, 한 가닥 위안마저 앗아간 듯한 빈 무덤에서 우리는 또한 어둡고 암담한 우리 사회의 현실의 반영을 보게 됩니다.

무참히 깨어진 개헌의 꿈

국민은 있어도 주권은 없고, 신문 방송은 있어도 언론은 없으며, 국회나 정당은 이름뿐이요, 힘만이 있고 정치는 없는 공허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국민의 여망인 민주화가 정략의 도구로 쓰여지고, 보다 밝은 정치의 새 시대를 열 것으로 기대되었던 헌법 개정의 꿈은 기만과 당리의 술수 아래 무참히 깨어졌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는 통치권자의 마음을 비운 결단을 기대하였지만, 막상 내려진 이른바 ‘고뇌에 찬 결단’은 한마디로 말해서 국민에게는 슬픔을 안겨 주었고 생각하는 이들의 마음은 더 큰 고뇌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이 땅 위에는 다시금 최루탄이 그칠 줄 모르고 터지며, 국민의 눈과 마음 속 깊은 곳에는 눈물이 마를 날이 없게 되었습니다.

 

전두환 대통령

병든 사회 속에서 범죄는 날로 흉포해지고 병든 법치 속에서 인권유린이 다반사가 되어, 드디어 성고문의 충격은 고문살인의 경악으로 이어졌지만, 사회에서나 옥중에서나 인권 보호와 처우 개선의 약속은 허공에 뜬 구호에 그칠 뿐입니다. 또한 UN이 제정한 ‘살 곳 없는 이들의 해’를 맞이하였는데도, 철거민은 재개발의 뒤안길에서 울고, 3저의 호황 속에서도 어제보다도 나은 것 없는 서민의 하루엔 노동의 피로만 겹쳐가고, 생계의 막장이라는 탄광촌의 하늘마저 불황의 검은 구름이 가리고 있습니다. 참으로 진실도 없고, 정의도 없고, 사랑도 없으며, 가난한 자 약한 자에 대한 배려도 인정도 없는 황량한 풍토 위에 우리는 서 있게 되었습니다.

마치 빈 무덤 앞에 선 막달레나처럼 당황과 혼란과 슬픔 속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침묵을 원망하게 됩니다. 주님은 과연 어디 계십니까? 주님을 어디에 모셨습니까?

형제자매 여러분!

그러나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막달레나의 다급한 보고에 접한 두 제자는 무덤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차례로 용기있게 빈 무덤 안으로 들어가 ‘믿게’ 됩니다. 그들이 육신의 눈으로 본 것은 빈 무덤뿐이었습니다. 그곳에는 침묵과 공허만이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거기에서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의 현존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죽은 예수는 부활하여서 그들의 마음을 열어 주셨던 것입니다.……

진실을 단념해선 안 돼

그리하여 빈 무덤과 같은 오늘의 현실 속에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 가운데 살고 있음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오늘의 정치가 아무리 허무하다 하여도 그것이 우리에게 인간다운 삶을 포기할 이유가 되지 못하며, 정의와 진실을 단념하는 이유가 되지 못합니다. 또한 아무리 모두가 이기주의에 흐르고 세파가 몰인정하여도, 우리들마저 사랑을 실천하지 말아야할 이유는 되지 못합니다. 오히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그 같은 세상 속에서 당신의 생명을 바쳐 사랑과 진리를 증거하시고, 모든 이의 구원을 위하여 당신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치셨습니다.

그와 같이 우리가 그분의 제자일진대 오늘의 현실이 허무해 보이면 보일수록 더욱, 이 사회 이 땅 우리나라와 민족의 인간화와 참되고 값진 삶을 위하여 우리 자신을 헌신해야 합니다. 진리를 추구하고 정의를 구현하며 무엇보다도 사랑을 몸소 사는 인간이 되어야 합니다.

…… 현실의 정치가 아무리 허망하고 사회의 모든 현상이 아무리 어두워 보여도, 우리가 실망하지 않고 진리와 정의의 사랑의 불을 지피며 살면 주님은 억압된 민중의 짓밟힌 인간성을 반드시 살려주실 것입니다. 마치 얼어붙었던 산과 바위틈에서 이 봄에 진달래가 환하게 피어나듯이, 그렇게 이 땅에도 인간다운 삶의 꽃이 피어나도록 부활하신 주님은 당신 생명의 물을 주실 것입니다.


[출처] <6월항쟁과 국본>, 민주운동기념사업회, 2017 

이명준
천주교 인천교구 홍보과장 근무 중 민청련 부의장 역임. 민통련 청년위원장,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간사 역임. 1987년 6월항쟁 당시 4인 실무기획팀으로 민주헌법쟁위국민운동분부 결성에 참여. 평민당 기획조정실장, 비서실 차장 역임. 정계은퇴 후 (주)아이마스 회장 역임. 현재 환경재단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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