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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나 교회나 '홀로 주인공'에서 벗어나야 한다

[유대칠의 아픈 시대, 낮은 자의 철학 -21]

나는 누구일까? 이 물음을 던진다. 나는 누구일까? 자신이 누구인지 온힘을 다해 궁리하고 궁리하면 스스로의 힘으로 이 험한 세상을 이겨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나는 누구일까? 이 물음, 즉 자신을 해명한다는 것은 이렇게 그저 한 사람이 누구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살아갈 세상과 그 자신의 관계를 설정하게 한다. 그가 어떤 세상을 살아가는지 결정짓는다.

자신이 누구인지 결정하면, 그 누구인가에 의하여 자신의 생각과 의지로 세상을 이겨간다. 자유인이 된다는 말이다. 자유인이 되기 위해선 자기 삶의 주인공이 되어야하고, 주인공이 되기 위해선 그 주인공이 누구인지 규정되어야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첫 물음이 던져진다. 나는 누구일까?

하지만 이렇게 얻은 답에서 남은 없다. “‘나’는 누구인가”란 물음의 답에서 ‘너’는 없다. 이렇게 얻은 ‘자기 존재’의 자유, 즉, ‘나’란 존재의 자유에서 ‘남’은 없다. ‘너’의 자유도 존재도 없다. 그냥 ‘나’란 존재만이 있다. 인생이란 무대에 나만 있다. ‘남’으로 존재하는 ‘너’는 그저 ‘나’를 위한 여러 배경과 도구의 하나일 뿐이다. 진정한 의미의 이웃도 아니고, 벗도 아니며, 더욱이 ‘우리’라는 이름으로 불러질 수 없는 그런 존재일 뿐이다. ‘나’에게 ‘남’으로 존재하는 ‘너’는 말이다.

 

사진출처=pixabay.com

‘홀로 주인공’이 되어 살아간다는 것, 어쩌면 그것은 주인공으로 있는 ‘나’란 존재의 외부에 존재하는 수많은 ‘남’으로 존재하는 ‘너’들을 지우고 배제하며 얻은 부정의 자유를 전제하고 있다. 참으로 잔인한 자유로 얻은 ‘홀로 주인공’된 ‘나’의 존재다. 이런 삶과 생각에서 ‘나’의 밖 ‘남’은 ‘나’와 다투는 존재이며, 한자리에 앉아 서로의 존재를 긍정하고 기뻐하는 참된 의미에서 ‘우리’가 될 수 없는 존재다.

요즘 종교의 타락이 그저 보고 있기 힘들 지경이다. 그들에게 묻는다. 누군가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한다. 자신의 조직을 위한 일이었다 한다. 자신의 조직, 그 종교의 유익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한다. 자신을 위한 좋은 일에 어떨 수 없이 발생한 선의의 나쁨일 뿐이라 한다. 서글픈 종교의 한 모습이다. 자신의 내부에서 자신만이 주인공으로 있으려는 ‘홀로 주인공’인 종교의 한 모습이다. 

그 종교의 밖에 존재하는 남으로 있는 너의 아픔과 고통은 어쩔 수 없다 한다. 남들의 눈에 악으로 보여도 자신들의 종교를 위해 스스로 힘든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이라며 홀로 주인공으로만 살아가는 잔인한 종교의 모습을 두고 예수의 삶이라 미화하고, 그 미화 앞에 누군가는 눈물을 흘리며 함께 한다. 그 예수의 삶과 눈물 앞에 남으로 존재하는 너의 그 힘겹고 외로운 아픔은 무엇인가? 자신들의 주인공 됨을 위해 무시되고 배제되는 아픈 시대 낮은 자의 아픔은 무엇인가?

‘홀로 주인공’인 삶의 외로움과 잔인함이 아닌 ‘더불어 주인공’으로 있는 행복은 어떠한가? 홀로 자신의 방에서 ‘나’는 무엇이고 ‘나’는 ‘나’의 길에서 ‘남’들을 이겨내면 그만이란 외로운 다툼보다 문을 열고 나와 밖에 수많은 ‘나’들, ‘남’으로 존재하는 ‘너’들과 ‘더불어 있음’은 어떠한가? 더불어 주인공 됨은 어떠한가 말이다.

만남이란 부름과 응답의 더불어 있음이다. 부름만 있고 응답이 없으면 더불어 있을 수 없다. 만날 수 없다. 너와 나, 이 둘이 서로 부르고 응답하며, 남의 모습으로 다가오는 나, 나의 모습으로 다가가는 남, 이 나와 남이 서로 우리라는 이름으로 존재하게 될 때, ‘홀로 주인공’이 아니라, ‘더불어 주인공’으로 살아가는 삶, 우리가 주인공인 삶이 될 때, 어쩌면 세상은 지금보다 덜 외롭고 더 평화로운 공간이 될지 모른다.

서로가 서로의 희망이 되고 서로가 서로의 존재론적 긍정이 될 때, 나란 존재가 너를 만나 서로의 존재를 긍정하며 우리가 될 때, 나는 외로운 ‘홀로 주인공’의 틀에서 벗어나 우리라는 이름의 새로운 더욱 더 큰 주인공으로 이 힘든 세상을 더불어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교회도 사제도 그리고 수도자도 지금 ‘홀로 주인공’으로 있으려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평신도 역시 마찬가지다. 서로가 부르고 응답하여 우리의 모습으로 존재해야 한다. 그때 정말 ‘우리’라는 이름의 더불어 주인공이 가능하다. 종교의 내부와 외부도 마찬가지다. 만나야 한다. 서로가 부르고 응답해야 한다. 홀로 주인공으로 살아가려는 외로운 삶이 일상의 평범함이 되어가는 요즘, 더불어 주인공으로 살아가는 조금 더 큰 세상을 그려본다. 남을 이기고 살아가는 자유만이 긍정되는 요즘, 더불어 우리 됨의 자유를 그려본다. 

유대칠 암브로시오
중세철학과 초기 근대철학을 공부한다. 
대구 오캄연구소에서 고전 세미나와 연구, 번역을 하고 있다.

 

[ 가톨릭일꾼 www.catholicworker.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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