렘브란트 "하느님 아버지는 어머니를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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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브란트 "하느님 아버지는 어머니를 닮았다"
  • 한상봉
  • 승인 2017.11.26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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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브란트의 ‘볼품없는’ 그리스도-4

탕자의 귀환: 아버지이며 어머니이신 하느님

렘브란트는 말년에 가산을 처분하고 암스테르담을 떠나 로젠흐라흐트에 작은 집을 빌려 이사한다. 그 마지막 10년 동안 렘브란트는 고독과 싸우며 예술혼을 불태웠다. 최소한의 음식으로 만족하고 소박한 옷과 음식으로 살아가며 자화상을 그리는데 집중했다. 영원을 사모하는 인간의 마음을 그리고 싶었다. 그때 제작한 역작이 눈멀고 늙은 아버지가 사랑하는 아들을 가슴에 안으려는 장면을 그린 <탕자의 귀환>(1668)이었다. 루카복음 15장 11-32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비유였다. 그해 1668년 9월 4일에 렘브란트는 사랑하는 아들 티투스를 흑사병으로 떠나보냈다.

탕자를 맞이하는 아버지를 향해 빛이 환하게 쏟아져 들어오지만, 아버지의 눈은 반쯤 감겨있고, 피곤에 절어있다. 아들을 죽기 전에 볼 수 있을지 밤낮 걱정하던 아버지의 모습이다. 망토가 늙고 수척한 아버지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고 있다. 그리고 아버지의 두 손은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는 아들의 어깨를 감싸고 있다. 그런데 오른손은 여인의 손을 연상시키고, 왼손은 전형적인 남자의 손이다. 그 손은 <유대인 신부>(1665)에 등장하는 남녀가 서로 화답하듯 부드럽게 얹고 있었던 손들을 그대로 이 그림에 옮겨놓은 것이다.

 

<탕자의 귀환>, 렘브란트

성경의 하느님은 마초(macho)가 아니다. “해산한 어미가 자식을 잊을지라도 하느님은 자기 백성을 결코 잊지 않는다.”는 말씀처럼, 하느님은 어머니다운 모습이 있다. 그러나 사랑하는 아내와 자녀들을 모두 잃어버린 렘브란트에게는 돌아와 품에 안길 자식조차 없다. 어쩌면 탕자라도 좋으니 돌아와 안길 아들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한편 오른쪽에 나무토막 서 있는 큰아들은 뻣뻣하게 뻗어있는 그의 망토처럼 비정한 모습이다. 그가 들고 있는 지팡이는 권세와 힘을 상징한다. 큰아들은 아버지에게 “동생에게 채찍이라도 들어야 하는 것은 아닌지?” 묻고 있는 것 같다. 동생의 죄를 묻지 않는 아버지를 향한 큰아들의 불만이 수직으로 드리워진 지팡이처럼 긴장감을 드러낸다.

아버지의 품에 안긴 탕자는 외투는커녕 야윈 몸뚱이를 겨우 감쌀 수 있는 속옷 차림이다. 남은 거라곤 엉덩이 쪽에서 덜렁거리며 붙어 있는 칼뿐이다. 모든 자존심이 무너진 가운데서도 명문가의 자식임을 알려주는 것은 이것뿐이다. 그는 아버지에게 종으로 써달라고 청한다. 다 헤어지고 벗겨진 신발, 그리고 상처투성이 발에는 탕자의 모진 삶과 굴욕이 담겨 있다.

그림에서 탕자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종교화에서는 흔히 회개하는 이의 절실한 얼굴을 통해 그가 구원받을만한 사람인지 가늠케 한다. 그러나 <탕자의 귀환>에서 아버지는 아들의 회개 여부와 상관없이 그를 받아들인다. 아버지의 사랑은 회개 여부에 달린 문제가 아니다. 사랑에 조건이 없다. 렘브란트는 이 그림처럼, 죽음을 예감하며 자신도 그 집 나간 탕자처럼 돌아와 하느님 아버지 품에 안길 것을 학수고대하였다.

안재경은 이 그림을 묵상하면서 ‘아버지가 없는 시대’를 발견한다. 자식들은 아버지를 생리적인 끈 정도로만 생각한다. 자식들은 경제적으로 독립할 때까지만 부모에게 어쩔 수 없이 붙어 있다. 사실 자식도 남과 다를 바 없다. ‘자식 부재의 시대’이다. 아버지에게 집은 하숙집이 된 지 오래고, 자식들에게 집은 기숙사가 된 지 오래다. 수십 억 짜리 타워팰리스 아파트에 살아도 마찬가지다. 그러면 하느님 아버지가 계시다는 집은 어떠한가? 그 집은 대궐 같은 집이라서 우리 모두 천국에 가길 그렇게 희망하는가? 그 집은 다만 <탕자의 귀환>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자비로운 아버지’가 계시다는 점에서만 다른 세상이다.

 

<아기 예수를 안은 시메온>, 렘브란트

아버지의 집에는 방이 많다

1669년 10월 4일, 렘브란트가 세상을 떠나던 날, 그의 이젤 위에는 <아기 예수를 안은 시메온>이 미완성인 채로 놓여 있었다. 예루살렘에 살던 시메온은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렸다. 시메온은 결국 성전에서 예수 아기를 안고서 이렇게 하느님을 찬양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루카 2,29-32)

렘브란트는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눈 먼 시메온을 그리면서, 스스로 아기가 되어 하느님 품에 안길 것을 소망하며 눈을 감았다. 렘브란트는 하느님이야말로 자기 자녀가 그분에게 돌아가기만 하면 그 넓은 품으로 안아주시는 분이라고 믿는다. 후회 많은 인생이라도 그분의 품은 따뜻하고 조건 없이 품어준다. 이를 두고 현대 영성작가인 헨리 나웬은 “아버지의 집에는 방이 많다”고 썼다.
 

[참조]
<렘브란트의 하느님>, 안재경 지음, 홍성사, 2014
<렘브란트, 영원의 화가>, 발터 니그, 분도출판사, 2008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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