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되기에 우리는 너무 “바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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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되기에 우리는 너무 “바쁘다”.
  • 죠안 치티스터
  • 승인 2017.11.21 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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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은 두 형제가 한 나이든 수도승을 방문하였다. 매일 음식을 드는 것이 그 수도승의 습관은 아니었다. 그러나 두 형제들을 보았을 때 수도승은 그들을 기쁘게 환영하면서 말했다: “단식은 그것 자체로 보상을 얻으나, 사랑을 위하여 먹는다면 여러분은 두 가지 계명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의지를 포기했고 또한 다른 이들에게 활기를 주라는 계명을 실천한 것입니다.”

대부분의 우리들이 인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단식”이나 삶에 대한 어떤 훈련같은 것, 일을 쉬지 않고 한다든가, 과제, 책임, 사업, 생산성에 몰두하는, 이런 완고한 방식은 그 자체로 보상을 받는다. 보는 사람들에게 아무리 어렵게 보여도 우리가 일을 맹렬하게 할 때에는 비밀스럽게 느껴지는 만족감 같은 것이 있는 것이다.

나이든 친척들을 방문하거나 아이들과 놀며, 개인적인 편지를 쓰고 개를 산보시키는 것, 낚시를 하거나 소풍을 가는 것 등등으로 일상생활을 포기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어렵고 덕스러운 태도로 여겨진다. 우리는 심각한 사람들이며 중요한 일들에 지나치게 빠져있다. 인간이 되기에 우리는 너무 “바쁘다”.

그래서 우리는 단조롭게 삶을 계속해 나간다. 넝마가 된 감수성을 그대로 걸치면서. 우리는 새로운 사고의 영역에서, 새로운 경험과 새로운 아름다움의 순간들 속에서 우리의 정신을 자유롭게 놔두지 못하고 매일 똑같은 일 속에 우리의 정신을 밀어 넣는다. 우린 그저 똑같은 일들을 계속 반복할 따름이다. 최악의 경우는 이렇게 살면서 우리자신이 영적으로 고귀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덕이 이처럼 우리 영혼에게는 눈가리개가 된다. 우리는 전에 본적이 있는 자리만 보고 다른 자리는 절대로 보지 않기 때문에 모든 곳에 계시는 하느님을 볼 수가 없다.

 

사진출처=pixabay.com

쉼, 거룩한 여가는 관상적 영혼에게 대들보이고 안식년의 신학은 모퉁이 돌이다. 성서는 “일곱번째 날에 하느님이 쉬셨다”고 말한다. 이 단 하나의 이미지와 함께, 성서의 단 한 줄 때문에 성찰, 창조적 영의 재충전, 초월, 우리가 하는 것보다 더 커지려는 권리는 거룩해지는 것이다. 일이 더 거룩하고 하느님보다 더 가치가 있다는 가정 아래 쉬는 것, 노는 것, 잠시라도 여유를 갖는 것을 거부하는 것은 관상의 뿌리를 흔드는 것이다.

삶은 일 그 이상에 대한 것이다. 일은 그 목적이 왜곡될 때에 소용이 없으며 심지어 파괴적이기조차 하다. 일을 순수하게 유지해주는 것은 진리에 대한 관상가의 눈이며, 하느님이 좋다고 하신 모든 것들을 관상가가 포용하는 때일 뿐이다. 쉼은 영혼을 기지개 펴게 하는 행위이다. 우리가 경주를 중단할 때, 굴레에 갇혀 돌아간다는 것을 마침내 깨달을 만큼 충분히 오랫동안 생산성의 회전목마에서 내려와 있을 때에 우리는 우리자신의 인간성을 조금 다시 회복하게 된다.

쉼의 목표는 영혼의 안식년을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과거에 한 일에 대하여 평가해 볼 시간이 필요하다. 하느님처럼 우리도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참으로 모든 사람에게 “좋은것”인지 물어야 한다. 나 자신을 위하여? 내 후대를 위하여?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세계를 위하여?

우리는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삶에 우리의 일상적인 일이 미치는 영향을 평가해야 한다. 우리의 삶에서 하고 있는 일들 그리고 그것을 해 가는 방식이 우리자신의 삶이나 우리가 만나고 있는 사람들의 삶을 대가로 치룰 만큼 참으로 값진 것인가 자신에게 물어봐야 한다. 안식일만이, 오로지 쉼만이 나에게 뒤로 물러나 생각할 기회를 줄 것이며, 눈을 들고 가슴을 열어 삶을 걸어가며 새롭게 열고 새롭게 변화되어 가며 나의 체험의 인간적인 측면을 확장시키는 기회를 줄 것이다.

삶은 음산한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삶은 견디어야 할 시험이 아니다. 삶은 우리가 그렇게 만든다면, 삶일 따름이다. 삶이 즐거움으로의 소풍이라는 것을 어떻게 우리는 확신할 수 있는가? 그것은 단순하게도 즐길 것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포구에서 낚시하는 것, 산 위에서의 풍경, 언덕의 열매들, 거리의 춤, 좋은 책, 본당 바자회, 도시의 문화, 가족의 재결합 등.

삶을 즐기는 것을 거부하는 종교 전통은 생명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러나 생명(삶)을 거부하는 종교는 결코 종교가 아니다. 그런 종교는 지금의 거룩한 것과 그 이상의 거룩함과의 연결에 실패하는 것이다. 관상가가 되기 위하여 우리는 모든 생명이 우리에게 하느님을 중재 할 수 있도록 우리 자신에게 생명을 가져와야 한다. 


[원출처] <Illuminated Life, Monastic Wisdom for Seeker of Light>, Joan Chittister
[출처] <참사람되어> 2000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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