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복팔단] 전쟁 중에 평화를 구한 작은 형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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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복팔단] 전쟁 중에 평화를 구한 작은 형제들
  • 짐 포레스트
  • 승인 2017.10.23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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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복의 사다리-23]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이들은 복되도다-2

그리스도의 축복은 바로 평화를 조성하는 사람들에게 내린다. 그분은 평화 조성에 있어 수동적인 역할보다 능동적인 자세를 요구한다. 실상, 평화 그 자체는 역동적인 상태이며, 그냥 조용하고 고요한 상태를 말하는 게 전혀 아니다.

평화는 혼란을 통과한다

그리스도의 평화는 그냥 차분한 것이 아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왔다”(마태오 10,34)하고 그리스도가 말할 때 그 내용은 최고로 역설적이다.

불행하게도, 우리들 대부분은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 이미 가지고 있는 세계관을 약간 개선한 것에 불과한 것을 평화라고 말하고 싶어한다. 우리는 분열을 조장하는 영적 물질적 원인들을 없애지 않고 갈등을 해결하고 싶어 한다.

우리는 복음서에 서술된 사건들을 둘러싸고 엄청난 소용돌이가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그리스도의 평화가 얼마나 불안정한 것인지 볼 수 있다. 악령 들린 아픈 사람을 해방시키면서, 그리스도는 악령을 돼지떼 안으로 들여보내고, 이어 돼지떼는 호수 속으로 달아나 빠져 죽는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 돼지떼의 주인들은 그들을 내버려두고 떠나라고 그리스도에게 호소한다.

많은 열심한 유대인들은 그리스도가 안식일에 사람들을 치유한다고 그분을 반대한다. 주간의 다른 날에 할 수 없는가? 앞 못 보고 마비된 사람들을 치유하면서 구걸로 생계를 유지하던 사람들의 생계수단도 빼앗고 있다. 그들의 매일 양식은 다시는 그렇게 쉽게 오지 않을 것이었다. 예루살렘에서 성전을 정화하면서 그리스도는 환전상들의 탁자를 뒤엎고 성전 밖으로 쫓아낸다. 라자로를 다시 살린 일까지도 마리아와 마르타 그리고 그들 자매와 함께 슬퍼했던 친구들의 저항을 받는다. “무덤을 열지 마세요! 지금쯤 그의 몸은 썩어서 냄새가 날 겁니다.”

 

성 다미아노 십자가

전쟁은 중병처럼, 성 프란치스코의 평화

앗씨시의 성 프란치스코 만큼 평화의 진복과 더 일치한 성인은 없다. 평화를 위한 가장 유명한 기도는 일곱 번째 진복을 반영하는데, 프란치스꼬 성인의 덕분이다: "주님, 저를 당신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정말로 프란치스코가 이 기도를 지었는지 알 수 없지만, 기도 자체는 그의 삶을 요약하고 동시에 기존의 상황에 기본적으로 만족하고 있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평화가 얼마나 혼란스럽게 하는지 잘 조명하고 있다.

젊은 청년으로서 프란치스코는 아버지의 모든 기대를 실현하며 잘 나가고 있는 것 같았다. 프란치스코는 매력적이고, 야망이 있어 동료들 사이에 인기가 높았으며, 너무나 옷이 잘 어울려서 아버지의 상점을 알리는 걸어가는 광고였다. 그러나 그의 삶은 1202년 인근 도시인 페루지아와의 전투에 참여하고 이어 일년동안의 긴 감금생활을 겪고 나서 방향을 바꾸기 시작했다.

프란치스코는 그때 나이 20세였고 그래도 전투에서 많은 사람들이 다치거나 죽은 것에 비하면 행운아였다. 그는 전쟁과 수년동안의 군대생활에서 어떤 영광을 상상했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전쟁의 실체를 보게되었다: 증오는 얼굴들을 공포스러운 얼굴로 변하게 했고, 건강한 정신을 광기로 뒤틀리게 만들었다. 마침내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 나온 프란치스코는 환멸감을 갖고 중병에 걸린 채 집으로 돌아갔다. 그는 수개월 동안 앓았다.

내 집이 무너져 내리고 있다

프란치스코의 영혼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알아차리게 된 것은 성 바깥에서 말을 타고 있을 때 전쟁으로 모든 재산을 다 잃어버린 한 젊은 청년을 만난 사건이었다. 그들에게 남은 것은 무너진 탑뿐이었다. 젊은이는 누더기를 걸치고 있었다. 프란치스코는 말에서 내려 입고 있던 번쩍이는 옷을 그에게 주었다.

그런 후, 하루는 프란치스꼬가 산 다미아노 성당에 기도하려고 갔다. 성당 건물은 무너지기 직전이었으나 십자가 처형 때처럼 거대한 십자가가 고대의 성상학적인 전통에 따라 칠이 입혀진 채로 여전히 남아 있었고, 그래서 그리스도의 고통보다는 자신을 무상으로 내어준 그리스도를 더 강조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영광의 전쟁에 대한 꿈을 포기하였고, 돈을 버는 것과 그냥 돌아다니는 것도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하느님이 자기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말해주는 어떤 징표를 간절히 원했다. 그러자 성당의 어둠 속에서 그는 마치 이콘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가 자신에게 속삭이는 것을 들었다: 프란치스코야, 가서 내 집을 구하여라, 보다시피 그 집이 무너져 내리고 있다.“

그 말을 그대로 받아들인 프란치스코는 아무도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지 않는, 그 성당을 보수하는 어려운 일을 하려고 나섰고, 아버지의 가게에서 비싼 것들을 팔아서 비용을 충당하려고 했다. 그러나 허락을 받지 않은 이런 행동이 아버지의 분노를 폭발시켰고 마침내 앗씨시의 시장 한 가운데에서 아버지는 주교에게 아들을 고발하였다.

프란치스코는 그의 잘못을 시인하고 아버지의 돈을 돌려주었을 뿐 아니라 입고 있던 옥을 다 벗어 아버지한테 내놓으며 이렇게 말한다, “지금까지 나는 당신을 지상에서 아버지라고 불러왔으나 이제 나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말합니다.” 깜짝 놀란 주교는 서둘러 프란치스코를 자신의 겉옷으로 덮어주었다. 이처럼 프란치스코는 그의 초기 생활을 지배해왔던 야망들과 그를 연결시켰던 마지막 줄들을 끊어버렸다.

복음에 따라 사는 삶

이제 프란치스코는 단 한가지의 야심만 가졌다: 복음에 따라 사는 것이다. 그는 이런 삶이란 돈 없이, 걸인들이 입는 누더기를 입는 것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 부러워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폭력을 쓰게 할지도 모르므로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는 것이라고 이해하였다. 그는 가장 보잘것없는 자, 가난 속에 살아가는 작은 형제가 되고 싶었으며, 큰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가장 놀라운 일은 프란치스코를 감싸고 있는 것이 기쁨의 정신이었다는 점이다. 그가 만난 사람들에게 하는 보통의 인사는 “pace e bene”­ “평화와 선함”이었다. 오래지 않아 12명이 프란치스꼬에게 합류하였고 새로운 모임의 핵심을 구성했는데, 그들은 작은 형제들(Minores)였다. 작은 형제들은, 그때 도시를 다스리고 전쟁을 조직했던 큰 형제들(Majores)과 비교되었다.

그들은 단순히 가난할 뿐 아니라, 그가 설명한 대로 가장 아름다운 신부, 가난부인과 결혼하였다. 앗씨시의 주교는 그들을 승인하지 않았다. “적어도 당신들은 자신들을 약간 존중받을만하게 해주는 것들을 마련해야 합니다”라고 주교가 프란치스코에게 말했다. 프란치스코는 “만일 우리가 소유물을 갖게되면 그것들을 보호할 무기가 필요할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1210년 형제들은 로마로 걸어가서 교종 인노센트 3세로부터 단순한 삶의 규율을 승인 받았다. 처음에 교종은 그러한 절대적 가난을 프란치스꼬가 규칙으로 정하는 것은 비실천적인 것이라고 충고했다. 그런데 전설은 인노센트 교종이 꿈을 꾸었는데, 프란치스꼬가 누더기를 입은 채 로마의 으뜸교회가 무너지는 것을 막고 있었다고 설명해준다.

그때 프란치스꼬는 스물 아홉 살이었고, 앞으로 16년이라는 짦은 시간을 살 것이지만, 짧은 삶속에서 우리는 어떤 사람이 세계의 폭력 앞에서 온 존재의 힘을 다해 그리스도의 평화를 살려고 노력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날수 있는지 보여주는 보물 같은 이야기들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술탄을 만나는 프란치스코. 도메니코 기를란다요 작품

무슬림과 맺은 우정

프란치스코의 삶에서 가장 사실이라고 입증되는 이야기들 중의 하나는 1219년 그리스도교에 대한 가장 유명한 반대자들 중의 하나인 술탄 말리크­알­카밀과의 만남이다. 그때는 제5차 십자군 전쟁 시기로, 나일 삼각주 주변의 다미에타 항구도시(지금은 두미아트)에서 십자군 승리가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였다.

이유가 어떻든지 간에 모든 죽이는 일에 반대했던 프란치스코는 술탄에게 복음을 설교하러 가기 위하여 십자군의 담당 사목자였던 추기경의 축복을 청하였다. 추기경은 모슬림들이 무기만 받아들이므로 그리스도인이 할 수 있는 유일한 한 가지 일은 그들을 죽이는 것이라고 프란치스코에게 말했다. 마침내 추기경은 그의 뜻을 양보하면서 프란치스코와 일루미나토 형제가 순례자로 죽게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두 사람은 십자군 진영을 떠났고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하고 시편을 노래하며 갔다.

술탄 군대의 군인들이 그 둘을 체포하고 때리고 난 후 말리크­알­카밀 앞으로 데리고 갔다. 술탄은 그들에게 모슬림이 되길 원하느냐고 물었다. "예"라고 하면 목숨을 구할 것이었다. 프란치스코는 그들이 술탄의 회개를 위하여 왔다고 대답했다. 만일 그들이 실패하면 목을 베도 좋다고 했다. 전설에 의하면, 프란치스코가 그리스도 복음의 진실을 증명하기 위하여 화로 속으로 들어가겠다고 제의했다고 한다. 그가 실제로 그런 제안을 했는지 안했는지는 모르지만, 무장을 하지 않고 적의 요새로 들어가는 것 자체가 불 속에 뛰어드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한 달 동안 프란치스코와 술탄은 매일 만났다. 비록 양쪽이 서로를 회개시키지 못했지만, 술탄은 두 손님들을 따뜻하게 대접하여 그들의 목숨을 살려주었을 뿐만 아니라 무슬림의 점령 하에 있는 그리스도교의 성지를 방문할 수 있도록 여행 허가서를 주었고, 프란치스코에게 아름답게 조각된 상아나팔을 주었다. 이 나팔은 앗씨시의 대성전에 성인의 유물로 보관되어 있다. 기록에 따르면, “두 사람(프란치스코와 말리크­알­카밀)은 형제로서 헤어졌다”고 한다.

우리는 무슬림들이 적을 죽이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을 만났다는 것이 얼마나 다른 역사인가를 그 당시 상황을 되돌아보면서 알 수 있다. 1099년 1차 십자군 전쟁 때 그리스도인들이 예루살렘을 점령했을 때, 도성의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다. ­남자, 여자들 그리고 아이들마저 난도질당하여 죽었는데, 역사서는 십자군이 탄 말들이 피바다를 건넜다고 기록한다. 초기 삼 세기 동안 그리스도인들이 비폭력의 삶을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13세기에 이르면 아무도 비폭력을 말하지 않았다. 그때 프란치스코는 광야에서 외치는 외로운 소리였다. 서구의 그리스도교는 전쟁의 신성함을 가르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원출처] <진복의 사다리>, 짐 포레스트, The Ladder of the Beatitudes, Orbis, 1999
[출처] <참사람되어> 2002년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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