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복팔단] "늑대는 늙어 죽었으며 사람들이 슬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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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복팔단] "늑대는 늙어 죽었으며 사람들이 슬퍼했다"
  • 짐 포레스트
  • 승인 2017.10.30 0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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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복의 사다리-23]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이들은 복되도다-3

평화조성가인 프란치스코에 대한 일화 가운데 하나는 말년에 앗씨시의 북쪽에 있는 마을 구비오에서 일어났다. 구비오 사람들은 동물만 아니라 사람도 공격하는 거대한 늑대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었다. 사람들은 성밖을 나가기 전에 무장을 해야 했다. 주민들은 마치 구비오 마을이 늑대에게 포위된 것처럼 느꼈다.

프란치스코는 주민들이 그의 생명을 걱정해서 만류했지만 그들을 돕기로 하였다. 양심이 없는 야생동물을 향해서 무장하지 않은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프란치스코는 모든 창조물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 주님께 그의 희망을 두었다. 방패와 투구도 없이 오직 십자가의 징표만 지니고 그는 용감하게 형제와 함께 성을 벗어났다. 그분을 믿는 사람들은 아무 상처 없이 미루나무 옆을 걸어갈 것이라고 말한 주님께 그의 믿음을 둔다면 ... 늑대뿐만 아니라 사자와 용까지도 이길 것이었다.

몇몇 농부들이 두 형제들과 안전한 거리를 두면서 따라갔다. 마침내 늑대가 프란치스코를 보고서 마치 공격하려는 것처럼 달려왔다. 이야기는 계속된다:

성인은 십자가 표시를 하였다. 그리고 하느님의 힘이 ...늑대를 멈추게 했고 느리게 만들었으며 잔인한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그리고 나서 프란치스코가 말을 하였다, “형제인 늑대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는 너에게 나나 그 어떤 사람도 해치지 말라고 명령한다.”

그러자 늑대가 프란치스코에게 가까이 다가와 머리를 낮추고 마치 양이 된 것처럼 그의 발아래 앉았다. 그리고 프란치스코가 늑대의 과거 잔인한 행동들을 비난하였다. 특히 하느님의 모상대로 만들어진 인간들을 죽인 것을 꾸짖고, 전체 도시와 원수지간이 된 것에 대해서도 말했다.

“그러나 늑대 형제여, 난 그대와 그들 사이에 평화를 맺고자 한다. 그렇게 해서 그들이 더 이상 그대에게 해를 끼치지 않도록. 그리고 그들이 그대의 과거 행적을 용서한 후에 어떤 사람도 개도 그대를 더 이상 쫓지 않을 것이다.”

늑대는 승복한다는 몸짓으로 “성인이 말한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지키겠다.”고 응답했다.

 

 

프란치스코는 늑대에게 앞으로 구비오의 사람들이 그가 “살아있을 때까지 매일 먹을 것을 주어서 더 이상 굶주림으로 고통 받지 않게 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 대가로 늑대는 동물과 사람을 공격하지 말아야 했다. “그리고 성 프란치스코가 약속을 받으려고 손을 내밀자 늑대 역시 그의 앞발을 들어서 부드럽고 온순하게 그것을 성 프란치스코의 손에 올려놓고 약속을 했다.”

프란치스코는 늑대를 다시 구비오로 데리고 들어갔고 그곳의 주민들은 시장 광장에서 만났다. 여기에서 프란치스코는 설교를 하였다. 즉 재앙은 우리들의 죄 때문에 하느님께서 허락하시는 것이고 지옥의 불길은 몸만 죽이는 늑대의 이빨보다 더 나쁜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사람들이 “이 세계의 늑대로부터 해방되고 다음 세계에서는 삼킬듯한 지옥의 불에서 해방되기 위하여” 속죄해야 한다고 요청하였다. 그는 사람들에게 그의 옆에 앉아 있는 늑대가 이제는 그들과 함께 평화 속에 살 것이지만 주민들은 그를 매일 먹여야 한다고 다짐하였다. 그는 자신이 ”형제인 늑대의 보증인“이 되기로 선포하였다.

구비오 마을 안에서 2년 동안 평화스럽게 지낸 후, “늑대는 늙어 죽었으며 사람들이 슬퍼했다. 늑대가 마을을 돌아다닐 때마다 늑대의 평화스러운 온순함과 인내가 그들에게 프란치스코의 덕과 거룩함을 상기시켜 주었다.”

이 이야기가 사실일까? 아니면 늑대는 폭력적인 사람들을 칭하는 이야기꾼이 사용하는 은유일까? 두 가지 다 가능하지만, 구비오의 늑대가 실제 있었다는 것을 믿게 하는 근거가 있다. 프란치스코회 수녀이며 친구인 로즈메리 린치는 늑대의 뼈가 구비오의 교회를 복구할 때에 그 안에서 발견되었다고 말해 주었다.

술탄과 늑대와의 만남이 후에 덧칠해졌다 해도, 두 이야기의 어떤 측면들은 이런 윤색에도 불구하고 빛나고 있다. 두 경우 모두 프란치스코는 무기를 거부하는 사랑의 모델을 보여주었다. 그의 용기는 감격적이다. 그는 적들을 위하여 기도할 뿐 아니라 생명을 무릅쓰고 그들을 만났다. 결국 이 세계의 왕들을 위하여 전쟁에서 죽는 것이 수백만 사람들의 운명이었다. 그렇다면 복음을 섬기는 사람들이 하늘나라를 위하여 왜 목숨을 무릅쓰지 못할 것인가?

어떤 의미에서 프란치스코는 어렸을 때 꿈이었던 군인이 되었다; 다른 이들을 위하여 기꺼이 목숨을 바치는 가장 용감한 군인이 되었다. 다만 예전과는 이런 중대한 차이점만 있을 따름이다. 그의 목적이 적의 정복이 아니라 적의 회개라는 사실이다. 이 일은 전쟁무기를 사용하지 말 것을 요구하였다. 왜냐하면 아무도 폭력에 의해 회개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코는 늘 회개를 실제적인 목표라고 생각했다. 하느님이 프란치스코를 회개시킬 수 있었다면, 누구라도 회개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용광로 속으로 뛰어드는 것과 같은­ 그러한 행동들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왕국이외에 아무 것도 더 중요한 것이 없을 때에만 가능하며, 영의 가난으로 시작되고 그리스도의 평화의 사자로 도약하는 제자가 되는 것도 그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프란치스코는 그의 훈계에서 이렇게 썼다. “평화로운 정신과 우리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의 마음을, 이 세계에서 받는 모든 고통에도 불구하고 간직할 수 있는 사람들은 참으로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이다.” 라고 말이다. 


[원출처] <진복의 사다리>, 짐 포레스트, The Ladder of the Beatitudes, Orbis, 1999
[출처] <참사람되어> 2002년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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