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뤠잇’과 ‘스튜핏’, 탈식민 사회의 언어 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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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뤠잇’과 ‘스튜핏’, 탈식민 사회의 언어 놀이
  • 진수미
  • 승인 2017.10.23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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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수미의 문화칼럼] 

유행어를 보면 그 사회가 보인다. 사회 구성원들이 지향하는 가치가 언어에 응축되어 나타나기 때문이다. 라캉은 무의식이 하나의 언어로서 구조화되어 있다고 했다. 이른바 무의식의 윤리, 규범적 구조가 그것이다. 유행어에는 해당 사회의 무의식의 구조와 가치가 투영된다.

한국 사회에서 가장 ‘핫’한 유행어는 김생민의 ‘그뤠잇’과 ‘스튜핏’이다. 이 표현은 유연한 조어 가능성을 자랑한다. 이 단어 앞에는 문장이 올 수 있다. “무용지물! 시간이 지나면 깨닫는다. 스튜핏”. 단어도 올 수 있다. “효도 그뤠잇”. 절이 올 수도 있다. “(나더러) 어쩌라고 스튜핏”. 이러한 유연성은 언어의 놀이 가능성을 극대화한다.

대개 유행어는 규범의 일탈적 사용으로 이루어진다. 전통의 더께가 내려앉은 규범의 억압 속에서 언중은 유행어를 통해 해방과 자유를 만끽한다. ‘그뤠잇’과 ‘스튜핏’의 언어 놀이는 순우리말은 순우리말끼리, 외래어는 외래어끼리라는 한국어 규범에서 벗어나 있다. ‘일 년(一年)’, ‘한 해’와 달리, ‘일 해’, ‘한 년’이 부적절하게 느껴지는 것도 이러한 언어의 순혈(?) 규범 때문이다.

사회의 전 영역에서 벌어지는 규범과 일탈의 헤게모니 다툼을 여기서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당신은 어떤 쪽을 지지하는가. 나는 규범에 대한 이해도 중요하지만 언어의 변화 가능성을 수용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김생민의 영수증] '스튜핏' 유행어 활용법.avi 캡처 화면

언어는 고정된 현실이 아니다. 사회적 맥락 속, 쓰임에 따라 변화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를 고정된 그림처럼 이해했던 초기 이론을 수정하고 후기에는 언어 게임이론을 제안했다. 그는 언어를 설명하기 위해 공놀이의 비유를 사용한다. 그는 “놀이를 해나가면서 규칙을 만들어가는 놀이 혹은 놀이를 해나가면서 규칙을 바꾸는 상황”을 제시한다. 나는 언어가 이러한 종류의 게임에 속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게임의 제왕은 가장 흥미로운 규칙을 만들어내는 자일 수 있다. 김생민의 영어 사용법도 이러한 반열에 들 수 있을 것이다. <김생민의 영수증>에서 통장요정 김생민은 시청자가 보내온 월별 영수증을 받고 자신의 관점에서 소비 패턴을 분석한다. 그리고 좋은 소비에는 ‘그뤠잇’, 그렇지 않다고 판단되면 ‘스튜핏’을 외친다. 그는 왜 “좋아요” 대신 외국어 “그뤠잇”을 선택한 것일까.

아마도 그 말을 한국어로 표현했다면 부담스러운 직설화법으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소비 행동이 곧 정체성과 연결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에 대해 훈수를 듣는 것은 사생활 침해로 간주된다. 아직도 우리는 면전에서 수입과 지출에 대해 상세히 묻는 것을 무례한 일로 생각한다. 그런데 그것을 유치원 수준으로 단순화된 외국어로 듣게 된다면 웃어넘길 수 있다. 불편함이 유머로 상쇄되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 완곡어법은 한국적 예절과 엔터테인먼트의 생리와도 잘 호응된다. 그는 어르신의 소비 행태를 지적하는 것이 부담스러웠는지 ‘두 손 스튜핏’이라고 새로운 조어법을 선보인다. 아이돌 그룹의 ‘덕질’에는 ‘조심조심 스튜핏’이라는 표현으로 팬덤의 심기를 다스리는 언어 신공을 발휘한다. 김생민의 화법은 우리 사회의 소통이 의미에서 뉘앙스, 어감을 중시하는 언어 쪽으로 변화하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렇게 본다면 외국어는 우리말의 뉘앙스를 풍부하게 만들고 다각화시켜주는 요소라 볼 수 있다.

한국어 규범에서 영어는 이질적 요소를 탈피하는 과정 중에 있다. “전설이라기보다는 레전드”라는 말이 보여주듯, ‘레전드’는 단순히 ‘전설’을 대체하는 영어 번역어가 아니다. 전설을 넘어선 어떤 영역을 ‘느낌적인 느낌으로써’ 지칭한다. 이러한 현상을 탈식민주의의 맥락에서 비판적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문화 제국주의 속에서 일상을 사는 우리에게 순혈적 민족주의만이 그에 대항하는 행동이라 할 수 없다.

식민지 역사는 안타깝지만 바꿀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러나 미래는 변화시킬 수 있다. 규범과 전통의 이해 또한 우리 삶에 필요한 것이지만 식민지 역사를 가진 시민이 탈식민적 주체로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언어의 모방과 재창조 놀이가 그 일환이 될 수 있다고 본다. 나는 김생민의 유행어에서 이러한 면모를 발견했다. 어떤 선택이 ‘그뤠잇’하고 또 ‘스튜핏’한지는 두고 볼 일이다.

 

진수미 카타리나
글쟁이. 더불어 잘사는 세상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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