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 게바라와 교황… 아직도 높고, 외롭고, 먼 당신
상태바
체 게바라와 교황… 아직도 높고, 외롭고, 먼 당신
  • 한상봉
  • 승인 2017.10.16 11:4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상봉의 [모든 삶은 장엄하다]-24
존 레논과 체 게바라

아름다운 혁명가, 체 게바라

“지금 세계 여러 지역의 민중들은 저의 보잘것없는 노력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쿠바 최고 지도자로서의 책임감 때문에 당신은 하지 못하는 일을 나는 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이 온 것입니다. 물론 당신도 내 마음을 아시겠지요.

한 사람의 혁명 전사로서 나의 가장 순수한 희망을 여기 두고 떠납니다. 그것은 내가 사랑하는 것들 중에서 가장 소중한 것입니다. 그리고 나를 친자식처럼 받아 주었던 쿠바 민중을 두고 떠납니다. 나는 당신이 가르쳐 준 신념, 우리 민중의 혁명 정신, 그리고 제국주의가 있는 곳이면 그 어디든지 가서 싸워야 한다는 가장 성스러운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는 사명감, 이런 것들을 가지고서 새로운 전장(戰場)으로 떠납니다.

내가 만약 다른 하늘 아래에서 나의 최후를 맞게 된다 할지라도 내가 마지막 순간까지 떠올리는 것은 쿠바 국민, 특히 당신에 대한 생각일 겁니다. 당신의 모범적인 행동과 가르침에 대해 감사 드리며 나는 내 행동에 따른 최후의 결과에 충실하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영원한 승리를 향해 끝없는 투쟁을! 자유 조국이 아니면 죽음을!”

체 게바라(Che Guevara)가 1965년 쿠바를 떠나면서 피델 카스트로에게 보낸 편지다. 그는 바티스타 군사 정권을 무너뜨리고 1959년 쿠바 민중 혁명을 성취하였던 민족 영웅으로서,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일했으며, 저항 운동이 극렬한 아프리카 콩고, 콜럼비아 등지의 삼림 지대에서 다시 혁명을 하다가 살해당했다.

장 폴 사르트르가 말했듯이, 그는 “우리 세기의 가장 성숙한 인간”이었다. 혁명이 갖는 파괴성을 극복하고 인간성과 공동체를 살려 내었기 때문이다. 새 정부의 장관직을 수락하고 나서도, 그는 여전히 민중의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삶 자체가 혁명이었다. 게바라는 좋은 옷이나 구두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으며, 노동자들보다 좋은 음식을 먹은 적이 없었다. 더구나 특권을 갖는 것을 무척 싫어해서 일을 나갈 때는 제일 먼저, 퇴근할 때는 제일 나중이었는데, 일을 마치지 못해 집에 돌아갈 수 없는 날이면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마룻바닥에 아무렇게나 웅크리고 잤다. 공장에서 물을 마실 때에도 다른 이들처럼 줄을 서서 기다리고, 담배를 피우며 담소를 나눴다. 그래서 그의 동상이 쿠바 수도 아바나의 혁명 광장에 세워졌다.

아래로부터의 민중 혁명과 위로부터의 종교 혁명

2017년 10월 체 게바라 50주년이 되었다. 1997년 10월 체 게바라의 30주기를 갓 지내고, 이듬해인 1998년 1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쿠바에 방문한 적이 있었다. 체 게바라와 요한 바오로 2세는 상당히 많은 점에서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두 사람은 모두 ‘인간의 해방과 구원’을 간절히 열망했다. 또한 인류에 대한 깊은 연민을 가지고 있었으며, 열정적으로 생애를 불사르며 살았다.

게바라가 콰테말라·쿠바·콩고·볼리비아 등지를 떠돌아다니며 혁명을 보급했듯이, 교황은 유례 없이 많은 해외 순방을 통하여 가톨릭 열풍을 일으켰다. 요한 바오로는 자신의 조국 폴란드를 방문하여 연대노조를 지지하고, 결국 폴란드 공산 체제를 무너뜨리는 데 기여했다. 유럽뿐 아니라 대부분의 제3세계 나라를 순방하였는데 우리 나라도 두 번씩이나 방문했었다.

체 게바라가 혁명을 통해 인간에게로 갔다면, 요한 바오로는 교회를 통해 인간에게로 가고자 했다. 게바라는 무신론적 휴머니즘을 전투적으로 살았고, 요한 바오로는 신앙과 교회 권위의 표징으로 살기를 원했다. 그러나 더 큰 차이는 그들의 일상적 처지와 방문지에서의 반응이다.

혁명가는 해방구에서나 적지에서나 한결같이 거친 음식과 낡은 옷으로 떠돌면서 항상 살해당할 수 있는 위험 속에서도 정신적 자유를 만끽하였다. 그러나 교황은 바티칸 궁전과 대사관에 머물고, 수십만 명의 군중들이 환호하는 카 퍼레이드로 영접받고 장엄 미사를 통해 한껏 권위를 세울 수 있었으나, 정치적 처신으로 그 자신은 고독했을 것이다.

아래로부터의 민중 혁명을 성취했던 쿠바에 , 위로부터의 종교 혁명을 상징하는 교황이 방문하였다.

 

카스트로와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명분과 실리가 서로 달랐던 쿠바와 교황

1998년 1월 21일 교황이 쿠바의 호세 마르티 국제공항에 도착했을 때 피델 카스트로는 군복 대신에 푸른색 정장 차림으로 영접했고, 대사관으로 가는 20킬로미터에 걸친 도로변에는 수만 명의 군중이 환영을 나왔다. 이들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평화와 희망의 메신저”라는 내용의 플래카드를 들고 있었는데, 교황에게 거는 쿠바인들의 기대가 담겨 있는 것이었다.

쿠바 정부는 환영 열기를 고조시키기 위해 이날 오후 초등학교 학생들을 쉬게 하였으며, 공산당원들은 차량까지 동원해 환영 인파를 실어 날랐다. 또 정부는 방문 기간 동안 미사에 참석하는 노동자들에게 유급 휴가를 주기도 했다. 1월 25일 대규모 미사가 아바나의 성지 ‘혁명광장’에서 열렸다. 쿠바 혁명의 성자로 추앙받는 체 게바라의 대형 동상이 마주 보이는 공산당 본부 건물 앞에서 교황은 카스트로가 지켜보는 가운데 옥외 미사를 드렸다. 이 미사에서 교황은 종교의 자유, 인권 수호, 쿠바의 개혁을 역설했다. 체 게바라가 이를 보았다면, 과연 어떤 심경이었을까……

쿠바에 필요한 것은 지난 30여 년 동안 지속되어 온 미국의 경제 봉쇄 정책에서 풀려나 경제 위기를 극복하는 일이다. 미국은 쿠바 혁명으로 ‘카리브해의 진주’라는 쿠바를 잃었고, 군대를 동원하여 쿠바의 피그만을 침공하였으나, 이에 실패하고 나서 줄곧 쿠바와의 무역을 가로막아 왔다. 카스트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편의 하나로 교황을 초청하고, 최근 들어 종교의 자유를 확대해 왔던 것이다.

예상대로 교황은 미국의 무역 제재에 대하여 비판적 발언을 했다. 교황은 “쿠바는 세계에, 세계는 쿠바에 문을 열고 진실과 희망의 미래로 나아가자”고 역설하면서, “경제 봉쇄는 가장 가난한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기 때문에 언제나 개탄할 만한 것”이라고 입장을 밝혔다. 아울러 맹목적인 시장의 힘이 “빈국들에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짐을 지운다”고 자본주의적 신자유주의 역시 비난했다.

이에 빌 클린턴 미 대통령이 “교황의 쿠바 방문은 카스트로 정부의 정책을 변화시킬 것”이며, “미국과 쿠바의 관계가 여러 면에서 가깝게 되기를 바란다”고 공식 논평했다고 하니, 그나마 다행스럽다 할 것이다. 한편으로 교황은 24일 성 라자로 성당 미사에서 쿠바의 반체제 인사들을 옹호하며 “양심수들을 사회로 재편입시킬 것”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교황이 던진 메시지의 중심은 당연히 종교의 자유 확대에 맞추어졌다.

교황은 “종교를 단지 사적 영역으로 떨어뜨리고 종교의 사회적 영향력과 중요성을 박탈한” 과거의 체제를 비판하고, “현대 국가는 무신론이나 한 종교를 정치적 체제로 선택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하이메 오르테가 대주교에 의해 수십 년간 이끌어져 왔던 쿠바 교회는 결코 쿠바 민중의 지지를 얻어 내지 못했다.

폴란드 교회가 폴란드 국민의 절대적 지지 속에서 민족주의를 대표했던 것과는 양상이 달랐다. 다른 라틴아메리카 교회가 해방 신학의 분위기 속에서 민중 해방을 위해 투신하고 순교할 때에도 쿠바 교회는 여전히 백인 중심의 보수적 교회로 남아 있었다. 특히 쿠바 혁명 후 바티스타 군사 정권을 지지했던 교회의 소유 재산을 혁명 정부가 몰수하자 사이가 극도로 갈라졌다.

이 교회는 극소수의 부자들을 위한 교회였는데, 사람들은 사제들이 이렇게 말하더라고 비꼬았다. “아시겠지만, 부자가 천당에 가기는 낙타가 바늘 구멍을 통과하기보다 어려운 일이니 우리가 도와 줘야 하지 않겠소?” 결국 1961년까지 과반수가 넘는 사제들이 부유한 신도들을 따라서 쿠바를 떠나 마이애미로 갔다. 그러나 본래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던 교황은 1995년 쿠바의 오르테가 대주교를 추기경으로 서품하였다. 그러므로 사실상 쿠바에서 민중과 분리된 교회는 정부의 종교 정책 변화보다도, 교회 자체의 체질 변화를 꾀하지 않는다면 구제받을 수 없는 처지에 있다.

 

체 게바라

‘자본 없이, 권력 없이’라는 오래된 가르침

체 게바라는 혁명에 성공하였으며, 그의 행동으로 혁명의 정당성을 입증하였다. 그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의사로서, 갈릴래아의 예수처럼 민중에 대한 연민 때문에 혁명가가 되었다. 그리고 예수처럼 집도 절도 없이 떠돌아다니며 저자 거리에서, 뒷골목에서, 장터에서, 성전 앞마당에서, 산 위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몸소 상처를 치유해 주며, 굶주림마저 함께 나누며 살았다. 그리고 가르쳤다. 그래서 그가 피델 카스트로와 함께 성취한 혁명은 구체적인 민중의 요구를 해결해 줄 수 있었다.

교황도 인정하는 바이지만, 쿠바는 제3세계 어느 나라보다 보건 복지 정책이 철저하게 이뤄진 나라이다. 의사 한 명이 275명의 환자를 돌볼 수 있으며, 문맹률은 0.5퍼센트에 지나지 않는다. 교회가 해야 할 일을 그들이 대신한 것이다. 그럼에도 사실상 바티칸과 쿠바 교회는 최근까지 카스트로를 비난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단지 쿠바가 사회주의를 채택하고 무신론을 교육한다는 이유로 말이다.

1971년에 열린 세계주교대의원회의(시노드)에서는 “사람들에게 정의에 관해 말하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나 먼저 그 사람들이 보기에 정의로워야만 한다. 따라서 우리는 교회 자체 내에서 발견되는…… 행동 양식을 검토해 보아야만 한다”고 밝혔다. 교회가 쿠바에 대하여 민주화와 인권을 요구한 것은 마땅한 일이겠지만, 교회는 스스로의 민주주의와 인권 문제를 성찰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예수께서 선포하신 복음과 초기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처신에 비추어, 세상의 모든 가난한 이들을 대하는 교회의 태도에 대해서도 다시금 반성해야만 한다.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티데스는 초대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대하여 이렇게 로마 황제 하드리안에게 말했다. “그들은 서로 사랑합니다. 그들은 언제나 과부를 돕습니다. 그들은 고아를 괴롭히려는 사람에게서 고아를 구합니다. 무언가 가진 것이 있으면 아무것도 없는 사람에게 아낌없이 줍니다. 이방인을 보면 집으로 데려갑니다. 그리고 그가 마치 친형제나 되는 것처럼 기뻐합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형제란 일상적인 의미의 형제가 아니라 성령을 통해 하느님 안에 있는 형제를 뜻합니다.”

2세기 로마 교회가 도시의 빈민 2만여 명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주도록 이끈 것은 복음적 사랑이었다. 이 공동체는 재물을 버리라는 예수의 가르침에 따라 자발적으로 재산을 나누어 가졌다. 이러한 원시 공산주의는 분명히 충분한 재정을 갖지 못했지만, 복음화에 더없이 기여하였다. 그저 “자본 없이, 권력 없이”가 그들의 전략이었다.

그러나 교회는 4세기에 로마인들의 법적인 위계 체제를 채택함으로써 근본적인 잘못을 범하고 말았다. 여기서 혜택을 보게 된 것은 초대 교회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성직 계급이었다. 313년 콘스탄틴 대제가 그리스도교를 공인한 이후, 국가에서는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에게 돈과 권력을 제공했다. 일부 성직자들은 엄청난 부자가 되었고, 부유한 교구의 주교직을 차지하려는 선거전이 폭력으로 치닫는 경우도 흔히 있었다.

따라서 중세기 전체에 걸쳐 원시 그리스도교의 순수함으로 돌아가려는 시도가 주기적으로 일어났다. 때때로 기존 교회에 반기를 든 수도원이 출현하기도 했고, 헐벗은 농노들이 종교의 힘을 빌어 봉기를 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의 노력은 복음을 교황과 군주의 권력욕을 채우는 데 이용한 교회-국가 동맹에 의해 좌절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리스도교는 이집트와 페르시아, 로마 제국의 지배자 형상에 따라 만들어진 하느님에 대한 맹목적 숭배가 대대로 이어지고, 교회는 오로지 카이사르에게만 속하는 모습을 하느님에게 갖다 붙였다.

계몽주의자 볼테르는 그리스도교가 사회의 통합을 위해서 필요하다고 보면서도 가톨릭 교회의 독단을 혐오했었다. 왕실과 성직자에게 짓눌려 있던 대중도 그와 똑같은 느낌을 갖고 있었다. 그들의 테이블 위에는 신학 책보다도 커피 주전자, 찻잔, 코담배 상자, 자질구레한 장식품들이 더 많았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을 때 귀족은 물론이고 성직자도 단두대로 보내졌다. 오늘날 교회 쇄신은 교회가 살아 남기 위해서 요청되는 2000년대의 화두가 되고 있다. 왜냐하면 오늘날 교회는 아직도 원칙적으로 자본주의를 지지하고 권력을 지향하고 있는 까닭이다.

폴란드, 민족주의, 요한 바오로 2세

<교회에 관한 교의헌장>의 회의 기록에 따르면, 훗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된 카롤 보이티야(Wojtyla) 대주교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교회를 ‘하느님의 백성’으로 정의하는 데 반대했다. 그가 마음속에 그린 것은 백성의 교회라기보다는 평신도가 사제와 주교의 지도로 신앙 안에서 삶의 ‘진리’를 찾기 위해 활동하는 위계적인 ‘완전한 사회’였다. 그는 진실한 가톨릭 신자들이 개인의 구원을 추구함으로써 굶주림과 폭력, 그 밖의 사회적·정치적 불의에서 ‘진정한 인간 해방’을 달성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는 폴란드의 특수한 사정을 반영하는 교회 모델이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그는 폴란드인들이 러시아인들을 바르샤바에서 몰아낸 해(1920년)에 태어났으나, 1939년에 히틀러는 폴란드를 침공하였다. 약 600만 명의 폴란드인이 전쟁중에 죽음을 당했으며, 250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독일로 끌려가 강제 노동에 시달렸다. 전쟁이 끝나자 폴란드는 파시즘 지배에서 다시 공산주의 지배를 받아야만 했다. 이 수난 속에서도 폴란드 민중은 신앙을 잃지 않았다. 전쟁으로 파괴되었던 수백 개의 성당을 다시 지었으며,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3천 명의 사제들을 대신하려고 새로운 지원자들이 나타났다. 그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보이티야였다.

폴란드에서는 오직 교회만이 이민족의 박해를 견디어 내고 민족주의를 수호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래서 폴란드에서 민족주의와 가톨릭은 같은 뜻으로 통한다. 보이티야는 이 힘을 위로부터의 지배가 이루어지는 절대 군주제로 교회가 운영되는 데서 찾았다. 폴란드 교계 제도는 신자들에게 충성을 요구했고 또 그러한 충성을 받았다. 이는 교회 밖의 독재에 대항하여 교회 안의 민주화를 추진한 라틴아메리카의 교회와 달랐다. 따라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교권적 교회를 해체시킬 위험이 있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민주적 조치에 대하여 의구심을 느끼고 있었다.

무질서와 분열 없이는 개혁도 없다

교황은 해외 방문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더욱 굳혀 갔다. 요한 바오로는 엄청나게 많은 군중에게 둘러싸였고, 이를 자신의 생각이 옳음을 입증해 주는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교황은 기본적으로 교회가 자유, 평등 같은 현대적 가치를 받아들여 민주화되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말대로 “정직한 무지가 경솔한 지식보다 낫다”는 것이다.

요한바오로 2세 교황은 교회는 세속에 오염되지 않는 성별(聖別)된 집단으로서, 사제와 수도자는 유니폼을 착용하고, 품위 있게 행동하며, 평신도와 구별되는 거룩한 신분이라는 자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여겼다. 사제 독신주의, 낙태 금지, 이혼 불가, 출판물 검열이 강화되었고, 평신도들의 강론 및 성체 분배가 금지되었으며, 여성 사제 서품은 어림도 없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지역 교회의 자치보다는 로마 중심주의가 강조되었다.

이 때문에 유럽에서 가장 자유주의적인 네덜란드 교회가 제일 먼저 로마에 의해 수치를 당했다. 네덜란드 교회는 실질적으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결의 사항을 실천에 옮겼다. 평신도, 특히 여성들이 성찬식 준비를 도왔고, 교리반과 성서반을 가르쳤다. 평신도들은 미사 때 성서를 봉독했으며 성체 분배를 도왔다. 신부와 수녀 들은 주교들에게 권고를 할 수 있는 민주적 협의회들을 조직했으며, 대부분의 주교들은 공동의 사목 계획을 따랐다.

네덜란드 교회는 미국 미사일의 유럽 배치와 제3세계 독재자들에 대한 반대를 주도하는 등 정의와 평화 문제에 매우 적극적으로 응답했다. 교회가 비록 산만하고 때로는 무정부적이라고 느껴지기도 했지만, 네덜란드처럼 대단히 세속화된 사회에서는 상당한 성공을 거두어서 개신교를 능가하는 최대의 교회가 되었다. 그러나 교황은 이러한 성공을 세속적 유혹으로만 여겼을 것이다.

교황은 1980년 네덜란드 주교들의 특별 시노드를 로마에서 소집하였다. 그 장소는 전에 교황청의 목 잘린 상들을 놓아 두던 ‘목 잘린 두상(頭像)들의 방’이었다. 시노드에 포진한 교황청 학자들에 대항하여 네덜란드 주교들은 용감히 싸웠지만 결국 두 주 만에 패배를 인정했다. 주교들은 시스티나 경당 제단 앞에서 46개의 조항에 서명을 강요당했다. 여태껏 추진해 왔던 모든 조치를 원점으로 되돌리고, 교황청이 성찬식과 사목 계획에 관여하고, 로마의 지도권을 인정한다는 내용이었다.

그 후 바티칸은 교황청에 순응하는 새로운 주교들을 임명하여, 네덜란드 추기경 빌러브란트와 한 마디 상의도 없이 네덜란드 교회의 고위직에 앉혔다. 따라서 요한 바오로가 1985년 네덜란드를 방문하였을 때, 그는 격렬한 반대 시위에 부딪쳤다. 경찰은 군중을 해산하기 위해 발포해야만 했다. 일부 시위자는 충돌 과정에서 부상당했다. 적의에 가득 찬 벽보가 도처에 붙었다. “요한 바오로는 물러가라. 당신은 예수를 매질하고 있다.” 교황은 이 사태를 지켜보고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얼마나 많은 ‘무질서와 분열’을 낳았는지 확인했다.

교황의 평등하지 않은 ‘연대’

한편 교황은 교회의 정치적 정의 구현 활동에 대하여 일관된 입장을 보이지 않았다. 폴란드에서는 교회가 정치에 깊숙이 개입하였으며, 교황 자신이 발표한 회칙 <노동하는 인간>에서는 ‘연대’라는 말을 가장 중요하게 다루는데, 이 역시 바웬사가 이끄는 연대노조에 대한 격려와 지침을 제공하려던 것이었다. 폴란드 주교와 사제들은 교황의 지지 아래 폴란드 국민의 양심으로 훨씬 광범위한 정치 무대에서 활동할 종교적 의무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교황은 다른 제3세계 교회의 정치적 참여에 대해서는 신랄하게 비판하곤 했다. 이를테면 필리핀의 제이미 신 추기경은 독재자 마르코스를 축출한 민중과 야당을 지지했기 때문에 교황의 눈 밖에 났다. 결국 마르코스 대통령과 친밀하게 지내던 교황 대사의 의견에 따라, 교황은 1985년 시노드에 신 추기경을 초청하지도 않았으며, 필리핀 평화 혁명 후에 곧바로 신 추기경은 교황의 비공개 비판을 듣기 위해 로마로 소환되었다.

교황의 아래로부터의 혁명에 대한 불편한 감정은 1983년 니카라과 방문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라틴아메리카 민중은 민중 학살을 자행하는 과테말라 군사 독재 정권과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를 암살한 엘살바도르 군사 정권에 대하여 강력히 항의하고, 미국의 지원을 받는 콘트라 반군에 의해 희생당하고 있는 니카라과 민중의 아픔을 위로해 주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교황은 우익을 자처하던 콜럼비아의 트르히요 추기경의 영향을 받아,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 혁명 정부를 비난하고, 그리스도교 기초 공동체를 중심으로 혁명의 견인차 역할을 맡았던 민중적 교회를 혹독히 규탄했다. 이들이 교회를 분열시킨다는 것이다.

‘민중 교회’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진 친(親)산디니스타 교회는 ‘아래로부터’ 출현했으며, 따라서 일사불란하게 교계 제도를 재확립하려는 교황에게는 일종의 저주와도 같았다. 많은 니카라과인들은 미국과 콘트라 반군을 지지하던 쿠바 제도 교회의 오반도 이 브라보 대주교를 비판해 왔다. 교황은 니카라과에서 민족주의적 열망이 산디노주의와 동일시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니카라과 민중의 지지를 받은 것은 에르네스토 카르데날 신부로 유명해진 민중적 교회였다. 그래서 네 명의 사제가 니카라과 정부 각료로 임명될 수 있었다. 그러나 교황은 이에 대하여 경악하였다. 이 사제들의 존재는 곧 사회주의와 가톨릭 교회의 일치를 상징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줄곧 사제들에게 공직 사임을 요구했다. 그러나 사제들은 로마의 요청보다도 민중의 요청에 귀기울였다. 이에 대한 판단이야 쉽게 내릴 수 없는 노릇이지만, 결국 교황은 민중 교회와 혁명 정부를 반대한다는 뜻에서 오반도 대주교를 중앙아메리카에서 처음으로 추기경에 임명하였다.

 

에르네스토 카르데날

보이는 권력을 포기할 줄 아는 용기

대부분의 독재 정권에서는 정권과 체제에 대한 위협 요인을 없애려고 하며, 이러한 저항 집단에 대한 탄압 속에서 인권을 유린한다. 그렇다면 교회는 이러한 인권 문제에 대해 발언할 자격을 얼마나 갖추고 있는 것일까? 현대판 종교 재판소의 재등장이라고 말해지는 라칭거 추기경이 이끄는 이것은 바티칸 신앙교리성성을 두고, 한스큉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나오는 대심판관처럼 교황이 ‘자유’를 두려워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당시 신앙교리성성은 교황 무류성(無謬性)에 이의를 제기한 독일 튀빙겐 대학의 한스큉을 ‘교리에 대한 모독죄’로 유죄 판결을 하고 가톨릭 신학을 가르칠 자격을 박탈했다. 쉴레벡스는 사제가 없는 공동체에서는 남자든 여자든, 미혼이든 기혼이든지 간에 성직자로 선출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가 로마로 소환당해 심문을 받았다. 한편 해방 신학에 대한 교리성성의 비판과 심문처럼 끈질긴 것도 없었다.

라틴아메리카의 군사 정권 아래서 가난한 이들을 편들던 사제와 수녀들이 1970년대에만 무려 850여 명이나 살해당했다. 오죽하면 1980년 요한 바오로 2세가 브라질 상파울로에 방문했을 때, 그 지역 군 사령관이 다음 목적지로 가는데 군 헬기를 이용하시라고 권하자, 아른스 추기경이 머뭇거리는 교황에게 “군대와 함께 가겠다면 혼자 가십시오” 하고 충고하였겠는가? 따라서 1979년 푸에블라(Pueblo는 ‘민중’이라는 뜻)에서 열린 중남미주교회의에서 해방 신학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던 것이다. 이 해방 신학의 못자리는 기초 공동체였다.

레오나르도 보프 신부는 <교회, 권력과 은총>이라는 책에서 이 기초 공동체를 “교권적 교회를 대신하여 바닥으로부터 새롭게 탄생하는 교회”라고 말했다. 독점적 권력을 추구하던 바티칸의 방향에 도전했다는 이유로, 보프 역시 1984년 로마로 소환되었다.

수단을 입고 들어온 보프에게 라칭거가 물었다.
“수단 때문에 사람들은 당신의 헌신과 인내를 알아보지요.”
“물론 정신주의의 증거가 필요하지요. 그런데 잘 차려입어야 하는 것은 바로 마음입니다.”
“하지만 마음은 눈에 안 보이잖아요. 어떤 것은 눈에 보여야 합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렇습니다. 하지만 수단은 권력의 상징일 수도 있습니다. 제가 이 옷을 입고 버스를 타면 사람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저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사람들의 종이어야만 합니다.”

결국 보프 신부는 “교회와는 무관한 혁명적 유토피아”를 퍼뜨렸다는 이유로 무기한 침묵하라는 처벌을 받았다. 그러나 보프의 책은 금서 목록에 오르자마자 서점에서 불티나게 팔렸다.

그러나 1986년 요한 바오로 2세는 브라질 주교들과의 특별 회담을 통해 라틴아메리카의 현실에 대한 깊은 의견을 나누고, 부활 주간에 보프의 ‘참회의 침묵’이 끝났음을 발표했으며, “해방 신학은 시의적절할 뿐더러 유용하고 또 필요하다.…… 이 대륙의 가난한 이들은 근본적이고 완전한 해방을 알리는 이 복음이 긴급히 필요하다고 느낀 최초의 사람들이다”라는 서한을 브라질 교회에 보내 왔다. 이는 현실에 대한 깊은 대화가 얼마나 중요한지 우리에게 보여 준다. 로마의 일방통행적인 권위주의는 그 동안 이런 대화를 가로막고 교회 안에서 예언적 발언을 통제해 옴으로써 선의를 가진 가톨릭 학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의 인권을 훼손시켜 왔던 것이다.

따라서 땅 끝까지 나아가 이 세상을 복음화시키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을 현대 세계에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교회가 먼저 복음화될 필요가 있다. 최근 성모 마리아에 대한 급진적 해석으로 인하여 교황으로부터 단죄받았던 스리랑카의 신학자 발라수리야 신부 역시 그런 희생자 가운데 하나였다. 교회가 자신의 비민주적 권위주의, 영신주의적 성속 이원론, 학문적 자유에 대한 침해를 그만두고 스스로 쇄신될 때 비로소 2000년대의 세계 역시 교회의 존재 이유를 변호해 줄 것이다. 그제서야 높고, 외롭고, 멀리 있었던 교황이 갈릴래아의 서민 예수처럼 소박한 웃음으로 민중과 담소를 나눌 수 있게 될 것이다.

[덧붙이는 글] 

2013년 가톨릭교회는 프란치스코 교황을 선택함으로써, 성직자 권위주의와 일방적 사목관행에 쐐기를 박는 교회개혁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물론 사제들의 아동성추행과 바티칸은행의 문제가 커지면서 교회가 궁지에 몰린 탓도 있었지만, 교회 안에서 이미 충분히 각성된 사제와 신자들이 변화를 촉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르헨티나 출신의 베르골료는 적절하게도, 놀랍게도 '프란치스코'라는 교황명을 선택했다. 프란치스코는 역대 수도회 창립자 가운데 '사제'가 아닌, 죽을 때까지 수도자로 남은 사나이였다. 13세기 교회권력이 가장 강력할 때 터져나온 "원천으로 돌아가자"는 복음회귀운동에서 발두스 파처럼 교회를 비난하기 보다 교회의 순종하는 종이면서 동시에 개혁적인 삶을 추구했던 프란치스코였다. 이점에서 교황은 루터보다는 에라스무스의 길을 선택했다. 이 교황에게 새로운 희망을 보고 있지만, 문제는 여전히 한국교회이다. 세계교회의 변화의 흐름을 한국교회는 시늉만 하며 따라가는 걸 보며 안타까운 마음 금하기 어렵다. 

한국교회에 쌓인 적폐가 대구 희망원 사태를 계기로 연일 드러나고 있다. 일그러진 교회의 얼굴이 하루 아침에 만들어진 게 아니고, 군사정권 시절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한국사회의 적폐청산 노력과 맞물려 더 혹독한 아픔을 통과해야 할 것이다. 교회는 자신의 잘못이 드러나는 걸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 충분히 참회하고 비복음적 요소를 잘라내는 수술이 필요하다. 이때마다 교회는 줄곧 소독약만 뿌려댔다. 수술을 겁내지 마라. 곪은 곳은 도려내고 새 살이 돋기를 희망해야 한다. 그래서 지금 순교자의 영성이 필요한 사람은 평신도들이 아니라 일차적으로 고위성직자들이다. 어차피 그들이 사목적 결단을 내려야 수술이 시작될 것이기 때문이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출처] <연민>, 삼인, 2000. 이 글은 제가 삽십대 중반 <공동선> 편집장 시절에 쓴 글입니다. 그러니까, 벌써 20년이 되었군요. 세월이 흘러도 마음과 생각의 갈피는 달라지지 않는 모양입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