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복팔단] “하루가 거룩하고 평화롭게, 그리고 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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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복팔단] “하루가 거룩하고 평화롭게, 그리고 죄 없이”
  • 짐 포레스트
  • 승인 2017.10.16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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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복의 사다리-23]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이들은 복되도다-1

"우리의 삶과 우리의 죽음은 우리의 이웃과 함께 있다. 우리가 형제를 얻으면, 하느님을 얻은 셈이나, 우리의 형제를 헐뜯는다면, 하느님께 죄를 짓는 것이다."(성 안토니오)

한 장로가 말했다, “나는 모든 인간존재가 하나라는 것을 알기 위하여 20년을 싸워왔다”(극기하며 늙어간 사람들의 금언)

진복의 사다리 중 처음 여섯 단을 올라간 후에 우리는 평화를 만드는 사람의 진복에 도달한다. 왜냐하면 마음을 순화시키는 모든 단계를 다 거친 사람만이 부서진 다리들을 고치는 것을 도울 수 있고, 분리의 벽들을 무너뜨리고, 잃어버린 하느님과 우리 사이의, 그리고 서로간의 친교 조성을 조금이라도 도울 수 있기 때문이다.

성 니콜라스 이콘

몇 년 전 모스코에서 나는 성 니콜라스의 이콘을 두 사람의 수선자들이 깨끗하게 복원해 놓은 것을 볼 수 있었다. 이콘은 사제 집무실 바로 바깥 책상 위에 놓여졌다. 그들은 이 어두침침한 그림이 약 삼백 년 되었다고 추정했다. 수십 년이 지나고 수천 개의 초들이 그 앞에 봉헌되었으며, 그림은 연기를 빨아들이는 유약제 밑에서 거의 까맣게 될 때까지 계속 숨겨져 왔다. 알콜과 솜을 사용하면서, 수선자들의 부드럽고 힘든 노력으로 이콘은 점점 날카로운 선들과 밝은 색깔들을 드러내었고 생명을 다시 찾게 되었다. 그것은 작은 부활을 목격하고 있는 것 같은 경험이었다.

이콘들처럼, 말들도 회복이 긴급하게 요구되는 시점에 이를 수 있다. ‘평화’라는 말은 엄청난 정치적 연기를 받아들이는 막바지가 되어왔다. 미국에서 전략적 공군병력은 핵전쟁을 수행하는 세계의 중요한 도구들 중의 하나인데, 이런 모토를 갖고 있다. “평화는 우리의 직업이다.” 전 소비에트 연방에서 러시아말로 평화는 MIP(mir라고 발음한다)인데, 이 단어는 크레믈린의 모든 정치와 프로그램을 한마디로 요약해 준다. 여기에는 반대자들의 고문과 체포로부터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모든 전쟁이 다 포함된다.

오늘날까지, 소비에트 연방이 몰락한지 수년이 지난 후에도, 평화라는 말은 러시아에서 쓰기가 어렵다. “그 말에서는 아직도 소비에트 냄새가 납니다.”하고 모스코바에 사는 친구인 카리나 체르니아크가 나에게 설명했다. “그건 나에게 거짓말, 공포, 선전 그리고 군대행렬­평화와 정반대의 것들­을 기억나게 하는 말입니다.”

이런 말을 회복하는 한가지 길은 ‘평화’가 성서에서 어떻게 쓰여지는지 살펴보는 것이다. 히브리어로 평화는 샬롬(shalom)인데, 완전한 복지, 평정, 번영, 행복 그리고 사람들 사이의 평화로운 관계를 의미하는 말이다. “예루살렘의 평화를 위하여 기도하라.” 하고 다윗 왕이 시편 122장에서 노래한다. 그는 예루살렘의 도성 안에서 전쟁과 싸움이 없어야 할 뿐만 아니라 모든 좋은 선물이 그 도시에 내려야 한다고 청하고 있다.

 

사진출처=pixabay.com

그리스어 신약성경에서 평화를 의미하는 단어, 이레네(Eirene)는 하느님의 궁극적인 축복을 묘사하고 있다.

복음서 전체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가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고 있는 모습을 본다. 그는 복음을 알리는 이들이 어떤 집에 들어서면서 먼저 해야 할 행동이 축복이어야 한다고, “평화가 이 집에 머물기를”(루가 10,5) 하고 말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예수는 체포되기 전의 마지막 담화에서 사도들에게 말한다: “너희들에게 평화를 남긴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나의 평화이다. 마음속으로 걱정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아라.”(요한 14,27) 부활 후 그는 제자들에게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기를”(루가 24,36; 요한 20,19)이라며 인사한다.

신약성경의 사도들의 서간들은 흔히 평화의 인사로 시작된다.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느님과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당신들에게 은총과 평화가 있기를”하고 바오로 사도는 고린토에 있는 젊은 교회에 쓴다(고린토전 1,3).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바오로 사도는 “평화의 복음을 가르치는 사람들의 발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로마 10,15)하고 그들에게 상기시킨다. 같은 서간에서 그는 “하느님의 왕국은 고기와 마실 것이 아니라 의로움이며 성령 안의 평화와 즐거움입니다 ... 그러므로 우리 모두 평화를 도모하는 것들을 따릅시다”(로마 14,17. 19)하고 지적한다.

바오로 사도는 에페소인들에게 쓰면서, 평화는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라고 설명한다: “그분은 우리의 평화이시며, 우리 둘을 하나로 만드셨으며 원수가 되었던 모든 요소들을 없이 하셨습니다”(에페 2,14. 16). 그는 골로사이인들에게 그리스도가 “모든 것을 당신과 화해시켰으며, 십자가의 피로써 평화를 이루셨다”(콜로 1,20)고 가르친다. 디모테오에게 보낸 두 번째 서한에서 바오로는 “청춘의 욕정을 피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주님을 찾는 사람들과 함께 정의와 믿음과 사랑과 평화를 힘써 구하라”(2티모 2,22)고 충고한다.

 

사진출처=pixabay.com

평화라는 말을 회복하는 또 하나의 길은 정교회 전례에서 그 말이 어떻게 사용되는지 유의하는 것이다. 정교회에서는 예배를 짧게 줄이려고 다른 교회에서 빼버리는 다양한 기도문을 아직도 포함시키고 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톰의 기념 전례에 가장 널리 쓰여지는 기도문을 보면, 평화가 가장 중요한 주제들 중의 하나이다. 예배는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의 나라는 복되도다”라는 사제의 선언으로 시작된다. 이것은 완전한 시작인데, 왜냐하면 예배는 평화가 지배하는 하느님나라로 들어가는 문이기 때문이다.

이어 즉시 따라오는 말들은 다음과 같다: “평화 속에서 주님께 기도합시다.” 평화는 예배의 선제조건이다. 이 선포에 대하여 레브 길레 신부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 선언은 무엇보다 먼저 우리가 내적인 평화의 상태를 갖도록 초대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거룩한 전례에 참석하려는 사람들은 그들의 마음에서 모든 혼란, 육적이고 지상적인 유혹에 대한 모든 기쁨, ‘세상적인 걱정’에 대한 모든 강박관념, 다른 사람에 대한 모든 적대적 감정들 그리고 모든 개인적인 걱정, 불안을 떨쳐버려야 한다. 그들은 하느님 앞에 내적인 평정의 상태로, 하느님의 보호를 신뢰하고 ‘필요한 한 가지’(루가 10,42)에 올곧게 마음을 집중하면서 예배에 와야 한다.”

시작기도는 평화에 대한 일련의 청원기도이다:

“위로부터의 평화를 위하여, 그리고 우리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 전 세계의 평화를 위하여, 하느님의 거룩한 교회의 안녕을 위하여, 그리고 모두의 일치를 위하여 ... 좋은 기후를 위하여, 풍성한 지상의 과일들을 위하여, 그리고 평화스러운 때를 위하여 ... 모든 고통, 분노, 위험과 필요로부터 우리가 해방되기 위하여 ... 우리를 도우소서, 구하소서,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그리고 우리를 보호하소서, 오 하느님, 당신의 은총으로.”

여기에서 평화는 모든 가능한 축복을 뜻한다: 구원, 일치, 풍성한 식량, 좋은 기후, 국가들 사이의 평화, 어려운 시기로부터의 해방 등.

예배 동안 사제는 반복해서 예배에 참석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평화의 축복을 내린다. 그리고 그들은 즉시 사제에게 축복을 돌린다. 복음서 낭독은 “평화가 모두와 함께”라는 말로 시작된다. 그리고 나서 탄원 기도에서 우리는 하느님께 이렇게 청원한다. “하루가 완전하게, 거룩하게, 평화스럽게 그리고 죄 없이” 지나가기를.

우리는 “평화의 천사를, 충실한 안내자를, 우리 영혼과 육신의 후견자를” 청한다. 우리는 하느님께 “우리 영혼에 좋고 이익이 되는 모든 것을, 이 세상의 평화를” 간구한다. 우리는 하느님께 축복을 구한다. “우리가 나머지 생을 평화와 참회 속에서 끝마치기를.” 후에 우리는 “올곧게 서고 두려움 속에 서라는 설교를 듣는다 ... 성찬 봉헌을 평화 속에 할 수 있도록.” 성가대가 대답한다. “평화의 자비를! 찬미의 희생을!”

마침내, 전례의 끝에 정교회든 가톨릭 전통이든, 사제는 우리에게 “평화 속에 떠나라”고 말한다. 미사라는 말은 다음의 라틴어 선언구절에서 왔다: “Ite missa est(미사가 끝났습니다).” 이유는 분명하다. 성찬전례에 참여하는 혜택을 받았으니 그리스도의 평화의 사자들로서 세상에 돌아가 대부분의 경우 그리스도를 거의 모르는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복음과 전례로부터 우리는 평화가 어떤 원칙, 이론, 개념, 정치적 프로그램, 혹은 사회적 이상이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치유하는 그리스도, 용서하는 그리스도, 세상의 소견에 따르면 피하고 단죄하고 미워해야 할 바로 그 사람들에게로 다가가는 그리스도가 평화인 것이다.


[원출처] <진복의 사다리>, 짐 포레스트, The Ladder of the Beatitudes, Orbis, 1999
[출처] <참사람되어> 2002년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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