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병원은 6인실 입원환자도 돌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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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병원은 6인실 입원환자도 돌보는가?
  • 이은석
  • 승인 2017.10.10 15: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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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석 칼럼] 

아내가 마지막 수술을 받았고 입원 중입니다. 암이라는 병을 얻은 지 4년이 되었습니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던 그 해, 그 즈음에 저는 거리에서 세월호를 기억하는 미사를 시작하겠다고 분주했고 아내는 병원에서 암이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뭐 지금도 그렇고 그 때도 그랬지만 ‘죽는 병 아니고 치료하면 다 낳는 병이니까 병원이나 잘 다니라’고 이야기 할 정도로 덤덤한 척 했습니다. 하지만 조급한 마음은 숨길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병원을 들락거리고 수술하고 항암치료라는 것도 견디고, 시간만 잘 보내면 될 줄 알았는데 재발이라는 소식에 처음부터 모든 치료를 다시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간 많은 분들이 도움을 주셨고 기도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시간을 버텼나 봅니다. 그럼에도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처럼 아내의 병에 지치기도 했습니다. 마지막 수술일 것이고 이젠 길게 입원할 일이 없을 것이라고 믿지만 병실을 지키는 모양새가 예전 같지는 않습니다. 핑계를 찾아 병실을 빠져나오는 시간이 많아지고 있으니까요.

 

사진출처=pixabay.com

아픈 사람이 늘 약자인 것을

대학병원 6인실 한구석에 앉아 있으면 별 생각이 다 듭니다. 옆 환자의 소곤대는 이야기에 귀를 쫑긋하기도 하고, 간호사들의 움직임을 감시하기도 합니다. 대학병원에서 의사는 하루에 한두 번 시간을 맞춰야 만날 수 있는 귀인이라 병실을 들락거리는 저는 만나기 힘든 사람입니다. 옆 환자에게 심각한 척 전문용어를 쏟아내는 의사가 지나가면 굳이 핸드폰으로 검색해 보기도 합니다. 괜한 질투랄까요. 그렇게 시간을 흘려보내면서 환자 밥 먹이고 뒤처리하면 하루가 그냥 갑니다.

나름 심각한 병으로 입원해서 수술하고 누워있는 사람을 들여다보는 일은 환자 보호자나 간병인의 몫이고, 의사나 간호사는 의례적인 일을 수행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다 보니 환자와 가족들은 불만을 토로하는 일이 잦고, 언성이 높아지는 일도 종종 있습니다. 아픈 사람이나 아픈 사람을 지켜봐야 하는 가족이나 다 힘든데 배려받지 못한다는 생각에 더 까탈스럽게 반응하게 되나 봅니다. 모두 나름의 고충이 있겠지만 아픈 사람은 늘 약자인 것을 쉽게 잊게 되나 봅니다. 뭐 나도 긴 병에 무덤덤해졌는데 아픈 사람만 보고 사는 의료진들은 더하겠지요. 이해하면서도 아쉬움은 늘 남게 마련입니다.

가톨릭병원, 스승 예수님의 모범에 따라 병자를

스승 예수님은 가는 곳마다 아픈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이적행위 대부분이 환자를 고치신 것이었고, 교회 전통에서 성인들이 보여주신 이적행위 대부분이 사람들을 아픔에서 해방시킨 것이었습니다. 그런 전통 때문인지는 몰라도 교회는 초기부터 환자를 치유하는 병원에 많은 관심이 있었습니다.

한국 천주교회의 대표 병원이 된 성모병원을 일제 강점기인 1935년에 설립하였고, 전쟁 직후인 1954년 성신대학(현 가톨릭대학)에 의학부를 설치합니다. 같은 1954년에 부산에는 메리놀 병원이 설립되고, 1955년 인천에 성모자애병원(현 인천성모병원), 1956년에는 대구에 파티마 의원, 대전 희망의원(현 대전성모병원)이 설립됩니다. 1957년에는 의정부성모병원, 1958년에는 성가의원(현 부천성모병원) 1960년 광주에 천주의 성 요한 병원·의원이 설립되기도 하고요.

전쟁의 참화를 이겨내려 분주했던 시기 곳곳에 병자를 위한 병원이 교회의 힘으로 설립되었던 것이지요. 교회가 설립한 병원은 이 땅에 병자들에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일례로 1969년 3월 지금은 없어진 명동성모병원에서 한국 최초의 장기이식 수술을 성공해서 한국 의술을 한 단계 높이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고 합니다. 가난한 나라에서 감당하지 못했던 일을 외국의 원조를 받을 수 있었던 교회가 앞장섰던 것입니다. 칭찬받아 마땅하고 신자로서 뿌듯해 해도 좋을 일입니다. 스승 예수님의 모범에 따라 병자를 돌봤으니까요.

병원 6인실 풍경은? 아픔에 공감하는 의료진? 

그런데 세상이 참 많이 변했습니다. 가난에 허덕이며 굶주리던 이 땅은 세상에서 꽤 잘사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변변한 의료시설이 없어 소소한 질병도 못 고치던 때는 이미 추억이 되었습니다. 다는 아니지만, 병원비 때문에 삶을 포기해야 하는 일도 이제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전면 무상의료체계는 아니지만, 세계에서 부러워하는 의료보장제도를 가지고 있는 나라가 되었으니까요.

의료기관들은 더 정확한 진단을 위해 필요하다는 명목으로 엄청나게 비싼 의료기기를 들여다 놓습니다. 편안하게 치료받을 수 있다고 과거에는 필요 없던 치료법도 도입하고 있고요. 한편으로는 자본주의 속성을 그대로 이어받아 더 많은 이익을 내기 위해 다양한 일을 벌이는 모양새입니다. 그러다 보니 6인실 입원환자는 돌봄을 받기보다 치료를 위해 감금되었다는 느낌을 받게 되나 봅니다.

더 큰 문제는 치유의 은혜를 베푸시던 스승 예수님을 쫓아 곳곳에 아픈 이를 위해 병원을 세우던 교회도 똑같이 그 길을 따라가 있다는 점입니다. 더 좋은 시설을 만들어야 더 많은 환자가 찾고 그래야 병원이 유지된다고 생각하는 악순환의 고리에 그대로 빠져들고 있습니다. 이런 악순환의 고리에선 함께 일하는 직원들이 예수님처럼 치유의 은사에 동참하는 동료가 아니라 월급 주고 일 부리는 사람으로 전락하기에 십상입니다. 뭐 그렇게 된 병원 6인실 풍경은 여타 병원들과 똑같을 것입니다. 그저 병실에 십자고상 하나 걸려 있는 것 말고는 말입니다.

돌부리에 발가락이 채이면 되게 아프지만 금방 통증은 사라집니다. 그 짧은 시간 옆지기가 아픔에 공감해주면 더 빨리 아픔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아이에게 호~하고 불어주는 입김이 상처를 낫게 해 주기도하고요. 스승 예수님의 치유 이적도 이와 비슷할지 모릅니다. 병자의 아픔에 공감해주는 것이 치유의 시작이고 끝입니다.

교회가 예수님의 본받아 병자를 돌보겠다고 마음먹었다면 아픔에 공감하는 자세를 먼저 가져야 합니다. 그 다음이 좋은 시설과 좋은 기술입니다. 의료계에서 교회가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려면 누구보다도 더 잘 아픔에 공감하는 의료기관, 의료인이 되어야합니다. 그게 자신이 없다면 감당하지 못할 소임을 내려놓으면 됩니다. 의료기술로, 자본의 힘으로 병을 고치는 일을 더 잘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이 땅에 널려 있으니까요. 


이은석 베드로
정의․평화․민주 가톨릭행동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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