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복팔단] 하느님의 얼굴, 그 빛 속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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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복팔단] 하느님의 얼굴, 그 빛 속에
  • 짐 포레스트
  • 승인 2017.10.08 2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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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복의 사다리-22] ...그들은 하느님을 뵙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추어 보듯이 희미하게 보지만 그때에 가서는 얼굴을 맞대고 볼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불완전하게 알뿐이지만 그때에 가서는 하느님께서 나를 아시듯이 나도 완전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1코린 13,12)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장차 어떻게 될 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리스도와 같은 사람이 되리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때에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참 모습을 뵙겠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 대하여 이런 희망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그리스도께서 순결하신 것처럼 자기 자신을 순결하게 합니다."(1요한 3,2-3)

4세기경 에집트 사막의 수도승인 압바 올림푸스에게 어느 날 세티스의 한 이방인 사제가 방문하였다. 그리스도교 수도승들의 엄격한 생활을 직접 보아온 이 사제가 압바 올림푸스에게 물었다. “이렇게 살아온 후로 당신은 하느님으로부터 어떤 환시를 받지 않습니까?” 압바 올림푸스가 그에게 말했다, “받지 않습니다.” 이방인 사제는 놀랐다. 그렇게 많은 시간을 밤낮으로 기도하고 스스로 열심히 일하며 사는데도 수도승들이 어둠 속에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던 것이다.

사제가 말했다, “참말로 당신이 아무 것도 보지 못한다면, 마음속에 순수하지 못한 생각을 갖고 있어 그런 것이 아닙니까?” 압바 올림푸스가 이 이방인 사제의 말을 공동체의 연장자들에게 말했다. 이방인 사제가 감히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판단한다고 비난하는 대신 연장자들은 “감탄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서 사제의 말이 맞다고, 불순한 생각들이 사람들을 하느님으로부터 떼어놓는다고” 인정했다.

마음을 정화시키는 노력은 그것 자체가 목표가 아니라 하느님을 보려는 희망 속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정교회 성전에서 사용되는 아침기도에 표현되는 어떤 갈망이다:

"우리는 찬미하고 축복하며, 노래하고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우리를 밤의 그림자로부터 나오게 해주시고 낮의 빛을 다시 보여주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선함 안에서 우리는 당신께 간구합니다. 우리를 죄에서 깨끗하게 해주시고 당신의 큰 부드러운 마음속에서 우리의 기도를 받아주십시오. 자비롭고 전능하신 하느님, 우리는 당신께 달아듭니다. 우리의 마음을 의로움의 참다운 태양으로 비추어주십시오; 우리의 정신을 밝혀주시고 우리의 모든 감각을 지켜주소서. 그리하여 대낮에 당신 계명을 따라 올곧게 걸으며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해주소서. 당신과 함께 하는 것이 생명의 기반이며 우리는 가까이 가기 어려운 당신의 빛을 즐기기에 합당해질 것입니다. 우리들의 하느님이시기에 당신께 영광을 돌립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이제와 영원히 세세대대에."

우리들의 희망은 단순히 하느님을 인식하는 것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빛 속에서 기쁨을 누리며 ­“접근할 수 없는 빛을 즐기기에 합당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기쁨과 비길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연인들 사이의 사랑조차 약간 비슷한 감을 줄뿐이다. 그리스도는 그의 비유 속에서 혼인잔치라는 은유를 사용하는데, 여자와 남자사이의 사랑과 더불어 그 주변을 둘러싸고 있고 결혼을 지지해주는 공동체적인 측면을 포용하면서 사랑의 이미지를 풍요롭게 한다. 하느님을 보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의 위대한 기쁨 속으로, 삼위일체 안의 사랑의 대화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다윗 왕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큰 기쁨은 하느님의 얼굴을 보는 것이다:

"나는 떳떳하게 당신 얼굴을 뵈오리이다. 이 밤이 새어 당신을 뵙는 일, 이 몸은 그것만으로 만족합니다."(시편 17,15)

모세는 “하느님의 영광”을 보고자 간청했고, 그의 요청은 허락되었다. “내 모든 선한 모습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며, 야훼라는 이름을 너에게 선포하리라(야훼: 존재하는 분, 있는 그대로의 그분) ... 그러나 나의 얼굴만은 보지 못한다. 나를 보고 나서 사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 여기 내 옆에 있는 바위 위에 서 있어라. 내 존엄한 모습이 지나갈 때, 너를 이 바위굴에 집어넣고 내가 다 지나가기까지 너를 내 손바닥으로 가리리라” (출애굽기 33,18-22). 시나이 산에서 이렇게 하느님과 만나며 모세는 계명을 받았고 계약이 이루어졌다.

수세기가 지난 후, 예언자 엘리야와 하느님의 만남이 이루어진다. 모세처럼, 엘리야도 같은 산의 ‘바위 굴“에 피난처를 잡았으나, 거룩한 현존에 대한 그의 체험은 매우 다르다. 하느님은 엘리야에게 바위를 흔드는 강풍이나 지진 혹은 불이나 번개 속에서가 아니라 ”아주 작고 여린 소리“(열왕기상 19,11-12) 속에서 나타난다. 후에 엘리야는 불마차를 타고 하늘로 올려진다(열왕기하 2,11); 예언자의 승천 그림은 자주 정교회에서 보인다.

 

이 두 가지 사건에 바탕을 두면서, 신약에는 그리스도의 변모를 통하여 하느님의 영광을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 그리스도는 모세와 엘리야를 양편에 거느리고 서 있는데, 베드로, 요한과 야고보가 이를 목격한다: “그때 예수의 모습이 그들 앞에서 변하여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나고 옷은 빛과 같이 눈부셨다.” 무서워진 사도들에게 하늘에서 들려오는 아버지의 음성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마태오 17,2-5)하고 말한다. 다른 구절에서 그리스도는 “누구든지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본 것이다”라고 선언한다(요한 14,9).

정교회 신학은 사도들이 보았던 태양빛과는 다른 어떤 “빛”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 빛은 거룩한 본성의 광휘이며, “창조되지 않은 빛”이다. 이콘들은 하느님의 나라를 침묵으로, 비언어로 전달하는 전통을 갖고있다. 색깔과 선으로 사진이 감지할 수 없는 것을 드러내려고 노력한다. 이콘 작가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그리스도가 변모할 때 방사했던 “창조되지 않은 빛”을 표현하려고 애쓰지만, 이 경험을 가장 잘 전달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둘러싸고 있는 빛과 색깔들이 아니라 사도들의 응답이다.

이콘에서 베드로, 요한 그리고 야고보는 마치도 지진 때문에 나가떨어진 것처럼, 폭발하는 빛이 두려워 얼굴을 숨기는 모습으로 자주 그려지고 있다. 또다른 이콘에서 한 사도는 얼굴을 가리고 다른 두 사도는 해를 향해 뻗어 가는 이파리처럼 그리스도에게로 더 가까이 이끌리고 있는 모습이다. 세 명의 사도는 각각 다음과 같이 변모된 모습을 보여준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갈라디아 2,20).

사로브의 성 세라핌의 삶에 관한 많은 훌륭한 이야기들이 우리에게 전해져 왔는데, 그 중에서 가장 놀라운 이야기는 니콜라스 모토빌로프의 일기 중에 있다. 젊은 청년인 니콜라스가 세라핌의 은수처에 와서 충고를 구하고 있다. 대화 중에 세라핌이 그의 손님에게 말했다. “나를 쳐다보시오.” 모토빌로프가 대답했다, “아버지, 저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당신의 눈에서 빛이 번쩍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얼굴은 태양보다 더 빛나고 있어서 제 눈은 고통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세라핌이 대답했다, “두려워하지 마시오, 나의 사랑스러운 하느님의 연인이여, 당신도 지금 나처럼 빛나게 되었습니다. 당신 자신은 지금 거룩한 성령의 충만함 속에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당신과 똑같은 상태에 있는 나를 인식하지 못했을 겁니다.” 성 세라핌은 그리고 나서 그가 어떻게 느꼈느냐고 물었다. “저는 제 영혼 속에 큰 고요함,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평화를 느낍니다. 저는 놀라운 행복을 느끼고 있습니다.”

C. S. 루이스는 <거대한 분리>라는 책에서 창조되지 않은 빛을 말하고 있다. 그는 지옥에서 천국으로 가는 하루동안의 여행 중에 논쟁하는 한 그룹에 대해 풍부한 상상력을 동원하여 묘사한다.

루이스에게 지옥의 불은 마치도 런던의 거대하고도 황폐한 지역처럼 영원한 회색 여명 속에 살고 있는 그곳 주민들의 교만하고 이기적인 자아를 의미한다. 우리는 이 작은 책의 첫머리에서 지옥에 사는 사람들 거의가 이 여정에 관심조차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대부분은 천국이 과대평가 되거나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지옥의 단조로움, 혹은 지옥의 우월성을 증명하려는 욕망 때문에 어떤 거주민들은 천국행 버스를 타고 한번 구경하기로 한다. 그러나 너무나 성가시게도 버스는 곧장 천국으로 가지 않는다. 어떤 곳에서는 버스에서 나와 걸어야 했다. 더 나쁜 상황은, 걷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천국에 더 가까이 갈수록 모든 것은 더 실제적이고 진해졌다. 모든 선은 더 날카로워지고, 풀날은 모두 더 면도날처럼 날카롭게 되어가고, 모든 빛은 더 꿰뚫고 들어오며, 공기는 더 깨끗하고 순수해 졌다. 우리는 지옥의 방문객들 중에 소수만이 매우 멀리 갈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지옥은 마음의 상태”라고 루이스는 쓰고 있다. “그러나 천국은 마음의 상태가 아니다. 천국은 실제 그 자체이다. 온전히 실제적인 모든 것은 천상적이다.”


[원출처] <진복의 사다리>, 짐 포레스트, The Ladder of the Beatitudes, Orbis, 1999
[출처] <참사람되어> 2002년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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