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원에 희망이 없듯이 교회에도 희망이 없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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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원에 희망이 없듯이 교회에도 희망이 없다면
  • 유대칠
  • 승인 2017.10.03 0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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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소스토무스 "노예를 해방하라"

[유대칠의 아픈 시대, 낮은 자의 철학 15]

"원래 세상은 이렇다." 이런 말이 무섭다. 어떤 노력도 필요 없다. 노력해도 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가진 자가 더 큰 소리를 치며, 부당한 권력이 부정한 것을 당연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그런 세상이란 말이다. 친일을 해도 잘 산다. 독재를 해도 잘 산다. 부당한 종교권력도 아무렇지 않게 신의 사랑을 말한다. 민중과 신자를 우롱해도 그만이다. 달라지지 않는다. 무섭다. 이런 잔혹한 시대에 신앙이란 어쩌면 바로 나쁜 상식에 대한 도전을 실천하는 힘이 아닐까 싶다. '원래 그렇다'는 그 말에 대한 도전 말이다. 이 도전은 원래 불행한 사람이 있는 세상에 대한 것이다. 당연한 불행에 대한 도전이다.

재산 없고, 장애 가진 사람이라 당연히 불행하고 힘없는 사람으로 여겨지는 것은 신앙이 아니다. 그저 불쌍하니 밥이나 주면 그만이라는 생각도 신앙이 아니다. 밥을 주니 말 듣지 않으면 강제 구금해도 그만이란 생각도 신앙이 아니다. 원래 불쌍한 사람이니 이렇게라도 챙겨주면 충분한 선행이라 생각하는 것도 신앙이 아니다. 원래 불쌍한 이들에게 이런 선행을 했으니 그 대가(代價)로 어느 정도 횡령은 문제 될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도 신앙이 아니다.

이러한 것은 정말 신앙이 아니다. 오히려 신앙이 맞서야 할 악한 것들이다. 만일 이러한 악행을 교회가 저질렀다면, 흔히 사제가 이와 맞서 싸워 교회의 잘못을 고백하고 사죄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것이 신앙이라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도 쉽지 않다. 이러한 악행을 본 사제는 스스로 비판받아야할 대상이며 동시에 신앙의 힘으로 비판해야 할 주체이니 그 혼란 가운데 차라리 입을 다물고 있는게 낫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이도 바른 신앙은 아니다.

오히려 악한 일을 한 교회에 저항하며 정의를 외치는 이들에게 더 화를 내는 이도 있다. 비판하지 마라! 과장되었다며 교회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라는 이야기를 내어놓기도 한다. 어떤 것도 바라지 않고 교회를 향하여 바른 이야기를 하는 이들은 공명심에 빠진 사람이라거나 포퓰리즘에 빠져 생각 없이 나대는 사람이라 치부해 버린다. 그러면서 바른 교회를 희망하는 이들을 교회의 종양이나 되는 듯이 이야기한다.  

참 슬픈 신앙이다. 요즘 일어난 교회의 죄악을 보자. 희망원 사태와 교회의 처신에 대한 과장이 심하다 해도, 그래서 이런 저런 과장을 모두 제거한다 해도 여전히 ‘강제 강금’과 ‘횡령’ 등은 남는다. 교회, 예수 그리스도의 그 보편적 사랑을 실천한다는 교회의 서술어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서술어가 남는다. 그리고 지금 그 일로 수사가 진행 중이다. 

 

John Chrysostom

신앙이란 이 땅의 여러 모순 가운데 아프고 힘든 처지의 사람의 절망을 희망으로 돌려놓는 원동력이어야 한다. 신앙을 가진 이라면 사회적 약자를 그냥 걱정만하고 있지 않다. 자신의 처지에 맞게 그의 편에서 그의 아픔을 나누어야 한다. 교부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무스를 생각해보자. 그분은 원래 불쌍한 사람은 없다 단언한다. 비록 노예제가 있던 그 시대임에도 말이다. 신앙에 따르면 처음부터 노예인 그런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진정 처음부터 노예인 사람이 있었던 것은 필연적인 것은 아닙니다. 죄와 불복종에 대한 처벌과 계도로 생긴 것이지요.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이 모든 것을 제거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노예가 무엇이고 자유인이 무엇입니까! 정말 노예를 걱정한다면 더 이상 노예를 두지 마세요. 노예 시장에 가서 값을 치루고 데려와 스스로 독립할 수 있게 교육시키세요. 그리고 더 이상 구걸하는 이가 되지 않게 준비시킨 다음 자유롭게 보내주세요.” (코린토 전서 설교 40, 1)

노예의 불행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런 말을 하면서 걱정을 하느니 바로 실천하라 한다. 값을 치루고 데려와 교육을 시켜 자립할 수 있게 하라 한다. 그냥 걱정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하라 한다. 당연히 불행할 그들의 행복을 위해 자신의 돈을 내어놓으라 한다. 나의 것이라며 내어 놓지 못하겠다는 이들이 있다. 크리소스토무스는 이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의 것’과 ‘남의 것’이라 불리는 모든 것은 사실 말장난이다. 그러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코린토 전서 설교 10, 3)

하느님은 모두를 위하여 이 세상을 창조하였다. 누군가의 것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지 않았다. 하느님이 창조하신 대로 모든 것이 원래 자리로 돌아가면 공동선은 자연스러운 모든 것의 질서가 된다. 나의 권력과 나의 소유물에 대한 아집으로 남의 것도 나의 것으로 만들려는 욕심을 버린다면 더욱 더 공동선에 다가선다. 그리만 된다면 원래 불행한 이는 사라지게 될 것이다. 신앙은 나의 것을 우리의 것으로 공동선의 수단으로 내어놓는 그 힘이 된다.

아직도 희망원을 비롯한 여러 교회와 관련된 사실들이 많은 이를 힘들게 한다. 신앙으로도 이성으로도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 성직자들은 신앙을 가진 이들이다. 그것도 신앙에 온 삶을 내걸었다는 이들이다. 더 나빠지지 말자는 각오는 틀렸다. 앞으로 착하게 살겠다는 말만으로도 부족하다. 지금 당장 자신들의 모든 악행을 고백하고 사죄해야 한다. 하나도 남김없이 말이다.

그런 고백을 하고 난 뒤에 말이 아닌 실천으로 가진 모든 것을 내어서라도 가난하고 아픈 이들의 옆에 그들의 벗이 되고 눈물이 되고 분노가 되고 웃음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착해져야 한다. 그것이 신앙이다. 지금 과거의 악행을 감추고 변명할 시간도 없다. 착하기도 바쁘기 때문이다. 희망원에는 희망이 없었다. 교회에도 아직 희망이 남아 있는 지 의문이다. 

 

유대칠 암브로시오
중세철학과 초기 근대철학을 공부한다. 
대구 오캄연구소에서 고전 세미나와 연구, 번역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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