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한 종교가 가지는 함정은 '독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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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종교가 가지는 함정은 '독선'이다
  • 죠안 치티스터
  • 승인 2017.10.02 2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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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은 세티스의 어느 형제가 죄를 지어서 원로들이 다 모여 모세 원장을 부르러 사람을 보냈다. 그러나 모세 원장은 가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자 사제가 그에게 “모든 사람이 다 당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으니 오십시오”라는 전갈을 보냈다. 그래서 마침내 원장은 떠나기로 했다. 그는 구멍이 뚫린 낡은 바구니 속에 모래를 가득 채워서 들고 갔다. 그를 맞으러 나온 사람들이 물었다: “이게 무엇입니까?” 그러자 모세 원장이 말했다: “내 죄가 내 뒤로 새고 있어도 나는 그것을 보지 못합니다. 그리고 오늘 나는 다른 사람의 죄를 판단하기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이 말을 들었을 때 그들은 죄를 지은 형제에게 아무말도 할 수 없었고 다만 용서를 하였을 따름이다.

사막의 은수자들은 분명하다: 독선이 정의의 이름으로 잔혹하게 자행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독선적인 수도자를 발견하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모세 원장처럼 우리도 주변에서 독선적인 성직자를 발견할 지도 모른다. 아마도 독선적인 친구나 이웃 혹은 가족을 쉽게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독선적인 관상가를 만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참다운 관상가는 결코 독선에 빠질 수가 없다.

관상은 우리를 깨뜨려서 우리자신에게 열리게 한다. 관상의 열매는 자기 정당화가 아니라 자기 인식이다. “우리가 하느님께 가까이 갈수록 우리자신이 죄인임을 더 깨닫는다”고 마테오스 원장은 말했다. 우리는 실제로 있는 그대로의 우리자신을 보게되고 다른 사람을 심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우리는 결코 용서받지 못할 공동의 죄를 수치스러움으로 기억한다. 우리는 우리 안에 움추러든 개인적인 죄, 탄로날까봐 두려워하는 우리자신의 죄를 당황해하며 인식한다. 우리가 우리자신을 알게 될 때의 열매는 친절함이다. 우리자신의 부서짐을 발견할 때, 우리는 다른 사람의 상처를 온화하게 싸맨다.

 

사진출처=pixabay.com

삶에 있어 친절함의 의미를 가장 뚜렷하게 보여주는 도구는 우리 자신의 삶에 나타났던 불친절함의 기억들이다: 어린 시절에 다른 아이들에게 잔인한 행패를 당한 기억들, 마음에 상처를 남긴 모멸, 멸시의 기억들, 인간 공동체에서 소외를 느끼게 하는 꾸중이나 거부의 순간들. 이런 고립의 순간들에 우리는 희망이 조각났던 것을 기억한다.

우리는 아무리 큰 하락에도 불구하고 우리 안에서 죽기를 거부하는 가느다란 한 조각의 존엄성에 대한 모욕 때문에 고통을 다시 느낀다. 바로 그때에 우리는 친절함, 연민, 이해 그리고 수용이 거룩함의 반박할 수 없는 표징임을 이해하게 되는데 이러한 순간에 절박하게 우리가 목말라했던 친절함의 위로를 알고있기 때문이다. 친절함은 거부라는 황량한 먼지를 인간의 심리가 소화시킬 수 있도록 해주는 하느님의 행위이다.

잔혹함은 관상의 열매가 아니다. 자신들 안에 살고 계시는 하느님과 만난 이들은 모든 투쟁과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모든 곳에서 하느님을 만나며 무엇보다도 특히 무력하고 부서지기 쉬우며 겁에 질려있고 탄원하는 이웃 안에서 그 분을 마주친다. 관상가들은 그들 자신이 정당화될 수 없는 기준으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판단하지 않는다.

완전한 종교가 가지는 함정은 독선이다. 그것은 영혼의 암이며 자신에게 요구하는 것 보다 더 많은 것을 이웃에게 요구하고 그래서 자신을 더 부식시킨다. 독선은 다른 사람의 죄악을 따지나 자신의 죄는 보지 못하는 내적인 소경이다. 독선적인 영혼, 자신의 덕에 의기양양해 하는 영혼은 우리의 마음이 바른 길에 있기 때문에 우리 안에 부족한 것을 하느님으로 하여금 무시하게 할 수 있는 자아인식을 거부한다. 독선은 영혼이 받을 준비가 안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자신이 스스로 고칠 수 없는 간격들을 좁혀주는 생명의 영을 가로막는다.

참다운 관상가들은 다른 사람을 하느님의 열린 팔로 받아들인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의 공허함에 대하여 하느님이 받아들이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관상가가 되기 위해서는 세계가 쫓아버린 사람들을 유보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이 기다리시는 하느님의 얼굴을 우리에게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원출처] <Illuminated Life, Monastic Wisdom for Seeker of Light>, Joan Chittister
[출처] <참사람되어> 2000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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