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복팔단] 마리아 유디나, 하느님의 거룩한 바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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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복팔단] 마리아 유디나, 하느님의 거룩한 바보
  • 짐 포레스트
  • 승인 2017.10.02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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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복의 사다리-21] 복되다, 마음이 순수한 사람들

시리아의 성 이사악은 묻는다:

"순수함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창조된 자연 모두에 대해 연민으로 가득찬 마음이다 ... 그러면 무엇이 연민으로 가득찬 마음인가? ...그 마음은 모든 피조물, 새들, 짐승들, 악마들, 모든 창조물에 대한 불타는 마음이다. 이 모든 창조물에 대해 생각하고 바라볼 때에, 그의 눈은 눈물로 가득찬다. 그의 연민은 너무나 강하고 너무나 열정적이며... 그의 마음은 가장 보잘것없는 피조물의 고통과 고뇌를 볼 적에 부서진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매 순간 눈물로서 기도한다... 진실의 모든 적들에 대해 그리고 그에게 해를 끼치는 모든 사람들에 대해 기도한다... 그들이 보호받고 용서받도록. 그는 심지어 하느님의 모습대로 그의 마음에서 올라오는 무한한 연민으로 뱀들을 위해서도 기도한다."

 

Maria Yudina

러시아 피아니스트, 마리아 유디나

마음이 순수하게 빛났던 현대인들 중의 한사람은 러시아 피아니스트, 마리아 유디나(Maria Yudina, 1899~1970였다. 나는 그의 친구였고 한때 학교 동창이었던 작곡가 디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의 추억과 유디나를 개인적으로 알았고 그의 피아노 밑에서 자기도 했었던 우리본당 교우인 타티아나 부그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그를 알게 되었다. 피아노 밑의 자리가 유디나의 아파트에서 “가장 좋은 피난처”였다고 타티아나가 나에게 말한다.

러시아 혁명과 그 후의 시기를 겪고 살아야했던 것이 마리아 유디나의 운명이었다. 그는 많은 친한 친구들과 동창들이 강제 수용소로 사라지는 것을 보아야 했다. 두려움이 없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는 학생들을 가르칠 때나 연주할 때 공공연히 십자가를 눈에 보이게 걸었다. 종교적 신앙을 공적으로 알리는 것은 일과 자유, 생명까지도 빼앗길 수 있는 시기였다.

그는 금욕적인 삶을 살았다. 화장을 하지 않고 자신에게는 거의 돈을 쓰지 않고 검소하게 옷을 입었다. “나는 유디나가 생전 내내 똑같은 검은 옷을 입고 있었다는 인상을 갖고 있습니다. 옷이 너무나 낡았고 얼룩져 있었기 때문이지요,”하고 쇼스타코비치가 말했다.

마리아 유디나에게 음악은 언론이 피아노보다 더 주의 깊게 감시를 받고 있었던 시기에 그의 신앙을 선언하는 길이었다. “유디나는 음악을 어떤 신비스러운 빛으로 보았어요. 예를 들면 그는 바흐의 골드버그 변주곡을 성서에 대한 일련의 표현이라고 보았습니다,”라고 쇼스타코비치가 말했다. “그는 늘 설교를 하고 있는 것처럼 피아노를 쳤어요.”

그는 피아노 연주만 한 것이 아니라 콘서트 도중에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같은 작가들의 시를 읽기 위하여 연주를 중단하기도 했다. 그때 파스테르나크는 책을 발간할 수 없었다.

그는 친구들 사이에서 자신을 위해 귀중한 것을 간직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소문이 나 있었다. “한번은 그가 나를 만나러 왔어요,”하고 쇼스타코비치가 회상했다. “그리고 말하기를 아주 형편없는 작은 아파트 하나를 갖고 있는데, 그곳에서는 일을 할 수도 쉴 수도 없다고 했어요. 그래서 나는 청원서에 서명했고, 온갖 공무원들을 만나러 다녔고,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했으며 사람들의 시간을 많이 썼습니다. 아주 어렵게 우리는 유디나를 위해 아파트를 마련했습니다. 그래서 모든게 다 좋았고 삶이 이젠 잘 되어가고 있을 꺼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그가 다시 와서 자신을 위해 아파트를 얻는 일을 도와달라고 했어요. ‘무엇이라고? 우리가 당신을 위해 아파트를 마련했는데 무엇 때문에 또 아파트가 필요합니까?’ ‘난 그 아파트를 한 가난한 노인에게 주었어요.’”

쇼스타코비치는 친구들이 유디나에게 5루불을 빌려줬다는 소식을 들었다. “내 방의 창문이 깨졌어요. 너무 춥고 바람이 세요. 살수가 없어요,”하고 유디나가 그들에게 말했다. “그래서 친구들은 그에게 돈을 주었어요. ­그땐 겨울이었지요. 얼마 지난 후 친구들이 유디나를 방문했을 때, 방은 바깥처럼 추웠으며 깨진 창문은 담요 같은 것으로 막아 놓았더라구요.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유디나? 우린 유리창을 갈아 끼라고 돈을 주었는데.’ 그러나 그는 ‘난 그 돈을 교회가 필요한 곳에 쓰라고 교회에 주었어요,’ 하고 대답했어요.”

종교를 미신이라고 생각했던 쇼스타코비치는 이런 유디나를 인정할 수 없었다. “교회에는 돈 쓸 곳이 많겠지요,”하고 그가 항의하였다. “그러나 성직자들은 깨진 창문이 있는 추운 방에 앉아 있지는 않아요. 자기 부정도 이성적인 한계가 있어야 합니다.” 그는 유디나가 거룩한 바보처럼, 교회가 생각하는 거룩함을 행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유디나는 이렇게 공적으로 신앙을 선포함으로써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음악가로서 천재적이었지만 때때로 그는 음악회 출연이 금지 당했고 살아있는 동안 한번도 러시아 바깥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스탈린을 두려워하지 않는 여인

아마도 쇼스타코비치의 기억 중에서 유디나에 관한 가장 놀라운 이야기는 다음의 사건에 관한 이야기일 것이다:

말년에, 스탈린은 더 미친 사람이 되어갔다. 그리고 나는 그의 미신이 더 커졌다고 생각한다. “지도자이며 교사”인 그가 수많은 시골 별장 중의 한 집에 들어박혀 기괴한 짓을 하며 즐기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가 오래된 잡지와 신문에서 그림과 사진들을 오려내어 종이에 붙이고 벽에 걸어놓았다고 말한다 ... 스탈린은 몇 날 며칠동안 이런 짓을 하면서 사람들이 그를 보지 못하게 했다.

그는 라디오를 많이 들었다. 한번은 스탈린이 방송국에 전화해서 전날 라디오에서 들었던 모짜르트 피아노 협주곡 23번의 레코드판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유디나가 연주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실제로 그것은 레코드판이 아니라 실황연주였다. 그러나 방송국 측은 스탈린에게 없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럴 경우 무슨 결과가 따라올지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인간의 생명이 스탈린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저 할 수 있는 것은 그에게 동의하고 복종하고 예스맨, 광인인 그에게 예스맨이 되는 것뿐이었다.

스탈린은 방송국 사람들에게 그의 별장으로 유디나가 연주한 모찰트 레코드판을 보내달라고 명령했다. 방송국은 공포에 휩싸였으나, 무엇인가를 해야 했다. 그들은 오케스트라와 유디나를 불렀고 그날밤 녹음을 했다. 모든 사람들이 공포로 떨었으나 물론 유디나는 그러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특별한 경우였고, 마치 바다가 그에게는 무릎까지밖에 오지 않는 것 같았다.

후에 유디나가 나에게 지휘자가 너무나 무서워해서 생각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방송국 사람들이 그를 집으로 보내야 했다고 말해 주었다. 그들은 다른 지휘자를 불렀는데, 그 역시 떨면서 모든 것을 엉망으로 만들고 오케스트라를 혼란스럽게 했다. 세 번째 지휘자가 결국 녹음을 끝마칠 수 있었다고 한다.

나는 이 사건이 녹음 역사상 유일한 경우였다고 생각한다. 즉 하루 밤에 지휘자를 세 번이나 바꾸는 경우는 한번도 없었으니까. 어떻든, 녹음은 다음날 아침까지 준비가 되었고, 겨우 한 장의 레코드를 만들어 스탈린에게 보냈다. '예'라고 승낙했기 때문에 만들어진 레코드 였다.

얼마 후에, 유디나는 2만 루불이 든 봉투를 받았다. 그건 스탈린이 속달로 보낸 것이라고 방송국 측이 말했다. 그리고 나서 유디나는 그에게 편지를 썼다. 난 유디나에게서 이 편지의 내용을 들었고 그 후에 일어난 이야기가 정말 있음직 하지 않은 이야기라는 것도 알고 있다. 유디나는 종잡을 수 없는 말들을 하지만, 이번만은 그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난 그의 이야기가 사실이라고 확신한다.

유디나는 스탈린에게 보내는 편지에 대충 다음과 같은 내용을 썼다: “고맙습니다, 죠셉 비싸리오비치, 당신의 도움에 대해서. 난 당신을 위해서 밤낮으로 기도하겠습니다. 주님께 당신이 사람들과 국가에 끼친 큰 죄악을 용서해 달라고 청하겠습니다. 주님은 자비로우신 분이므로 당신을 용서하실 겁니다. 난 돈을 내가 나가고 있는 교회에 주었습니다.”

그리고 유디나는 자기를 죽일 수 있는 그 편지를 스탈린에게 보냈다. 그는 편지를 읽고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적어도 그가 눈썹이라도 한번 씰룩거릴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리고 유디나를 체포하라는 명령이 준비되고 있었고, 사방에서 공격을 받고 있었던 유디나의 마지막 흔적을 지워버리는 데에는 스탈린의 아주 가벼운 찡그림으로도 충분할 것 같았다. 그러나 스탈린은 침묵했고 편지를 조용히 한쪽으로 밀어놓았다. 기대했던 눈썹운동도 하지 않았다.

아무 일도 유디나에게 일어나지 않았다. 사람들은 “지도자요 스승”인 인물이 그의 별장에서 주검으로 발견되었을 때 유디나가 연주한 모차르트판이 전축에 올려져 있었다고 말한다. 그것은 스탈린이 마지막으로 들었던 것이었다.

쇼스타코비치는 유디나가 이렇게 공개적으로 자신의 믿음을 내놓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라고 불평했지만 그의 말속에는 부러움과 경이감이 있었다. 마음을 얼어붙게 하는 두려움의 시기에, 용 앞에 선 죠지 성인처럼 두려움이 없었던 사람, 자신의 부서진 창문을 고치기 위한 몇 루불을 가난한 사람에게 주어버린 사람, 금지된 작가들의 시를 자신의 목소리로 “출판”한 사람, 감히 스탈린에게 그도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 안에 있다고 말한 사람이 유디나 였다. 그는 넓고도 순수한 마음을 지녔다. 그가 죽은 후 모스코에 있는 그의 무덤이 순례지가 되고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원출처] <진복의 사다리>, 짐 포레스트, The Ladder of the Beatitudes, Orbis, 1999
[출처] <참사람되어> 2002년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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