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없는 관상은 신심의 늪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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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없는 관상은 신심의 늪이다
  • 죠안 치티스터
  • 승인 2017.09.24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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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대원장이 말했다, “불빛 하나가 어두운 밤을 밝히는 것처럼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도 그것이 마음을 꿰뚫고 들어갈 때 하느님의 모든 덕과 계명을 가르쳐주면서 빛을 발한다."

 

관상적 삶에는 위험이 있다. 그 위험이란, 관상이 자주 삶의 거대한 문제들과 거리를 두는 태도를 합리화할 때 발생한다. 관상이 세상이 썩어가도록 방치하는 이유, 변명이 되고 있다. 그것은 관상적 삶을 슬프게 이용하는 것이며, 실상 그것은 가짜 관상의 삶이다.

만일 관상이 하느님께서 세상을 보는 것처럼 세상을 보게 되는 것이라면, 우리는 세상을 분명하게 보아야 한다. 만일 관상이 하느님의 정신 속에 몰입하게 되는 것이라면, 우리는 우리자신의 작은 문제들과 과제들 그 이상을 생각할 수 있게 되어야 한다. 만일 관상이 세상 한 가운데에서 하느님의 마음을 취하는 것이라면 관상가들은 아마 그 어느 누구보다도 우주 속에서 하느님의 뜻이 지워지는 것에 대해 슬프게 우는 사람들이다.

격동의 시간 속에서 거룩한 것을 추구하는 관상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관상적이 되는 것은 삶의 밑바닥과 추한 부분으로부터 인류를 구원하도록 고안된 어떤 거룩한 온천같은 곳에서 삶을 보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영적인 도피주의로 들어가는 입구가 아니다.

관상은 우주의 역동적인 힘 속에 몰입하는 것으로, 그 몰입의 영향은 우리들을 이끌어낸 똑같은 보살핌, 똑같은 정신, 똑같은 마음, 똑같은 의지로 우리를 채우는 것이다. 모든 종교적 전통의 신비가들은 이러한 개념들이 내포하는 바를 말하고 있다.

힌두교는 “마음의 연좌 속에 하느님이 머무신다”고 말한다. 불교의 스승은 “부처님은 어디에나 계시며, 모든 자리에, 모든 존재 안에, 모든 것 안에, 모든 땅에 계신다”고 말한다. “당신이 어디로 향하든, 거기에 하느님의 얼굴이 있다”고 이슬람은 가르친다.

그리고 그리스도교는 항상 우리에게, “세상이 창조된 이래로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본성, 다시 말하자면 하느님의 영원한 권능과 신성은 만들어진 것들 안에서 분명하게 인식되어 온다”고 상기시킨다. 그러나 만일 모든 것들이 하느님 것이라면, 모든 것들은 정의라고 불리는 하느님의 보살피는 부드러운 손길을 요구한다.

 

사진출처=pixabay.com

참으로, 가르침들은 전통적이며 명료하다. 즉 하느님은 어떤 한 사람 안에, 어떤 한가지 전통 안에 담지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관상가도 모든이 안에 계신 거룩한 분께 응답해야 한다. 하느님은 부자들에 대한 보상뿐만 아니라 가난한 이들에 대한 보살핌을 원하신다. 그러므로 참다운 관상가도 그렇게 해야 한다.

하느님은 약한 이들의 목을 발뒷꿈치로 누르고 선 억압자들을 전복시키길 원하신다. 마찬가지로 진정한 관상가도 그래야 한다. 하느님은 인간 존재의 해방을 원하신다. 참다운 관상가도 그렇게 원해야 한다. 하느님은 모든 인간 존재의 존엄성과 온전한 인간 발전을 원하시며, 자신을 방어할 수 없는 이들의 편을 드신다. 올바른 관상가도 그렇게 해야 한다. 아니면, 분명하게 그런 관상은 실제가 아니며, 실제가 될 수 없고 절대로 그렇게 될 수 없다. 정의의 하느님을 관상하려면 정의에 투신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관상가들은 정의를 실천하고 말해야 하며 주장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은 그렇게 한다. 토마스 머튼은 베트남 전쟁에 대해 공공연히 반대했다. 시에나의 가타리나는 가난한 이들을 먹이면서 길거리를 걸었다. 힐데가르트는 황제들과 교황들에게 정의를 설교했다. 샤를르 드 후꼬는 가난한 이들 가운데에서 살았고 적들을 받아들였다. 누르시아의 베네딕또는 나그네들에게 거처할 곳을 마련해주었고 농민들을 가르쳤다. 그리고 우리들 역시 진정으로 하느님의 가슴속에 잠수하고자 원한다면 우리시대에 정의가 실천되기 위하여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생기 있는 투신으로 우리를 이끌지 않는 영적 여정은 무의미하다. 그것은 다만 신심의 늪이며, 하느님께로 이르지 않는 막다른 끝일뿐이다. 확실하게 관상은 우리를 위험스러운 열림의 상태로 건네준다. 관상은 의식의 변화이다. 우리는 울타리 넘어, 파벌을 넘어, 교의와 교리, 그리고 기관의 자기 이익을 넘어 모든 생명이 흘러나오는 양육하는 하느님의 얼굴 속으로 곧장 몰입한다.

생명의 하나됨에 대한 자각에 이르고도 그 모든 것을 거룩한 위탁이라고 여기지 않는 것은 창조된 모든 것의 생명과 생명 자체이신 하느님과의 가장 깊은 일치라는 관상의 원래 목적에 위배된다. 생명의 하나됨에 대해 말하면서 모든 생명의 하나됨을 알지 못하는 것은 지성주의일지 몰라도 관상은 아니다.

관상은 어떤 한계가 없는 황홀경이 아니다. 관상은 파벌주의, 광신적 애국주의, 성별주의 그리고 계급주의에 억제되지 않는 깨우침이다. 관상가가 호흡하려고 하는 하느님의 숨길은 연민의 영의 숨결이다. 진정한 관상가는 우는 이들과 함께 울고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이들을 위해 우는 사람들이다.

내면으로부터 변화되어, 관상가는 세상에 새로운 모습의 현존이 되며, 또다른 존재방식을 알리고 새로운 눈으로 보고 새로운 말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다. 관상가는 더 이상 절대로 억압적인 체제에 안주하는 참여자가 될 수 없다. 관상으로부터 생명의 보편적 연관성에 대한 의식이 나올 뿐만 아니라 그 의식을 모형화 시키려는 용기도 함께 나온다.

참다운 관상가는 온 세상을 끌어안고 보호하며 귀중하게 여기고 사랑으로부터 솟아나오는 강철같이 단단한 정의로 만들어진 몸체로서 세상을 지켜나간다. 관상적이 되기 위하여 우리는 우리가 호흡하는 하느님이 그러시는 것처럼 매일 소외된 다른 존재에게로 다가가야 한다.

 

[원출처] <Illuminated Life, Monastic Wisdom for Seeker of Light>, Joan Chittister
[출처] <참사람되어> 2000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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