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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복팔단] “지옥은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진복의 사다리-18]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진복에서 구세주는 자선을 함으로써 자비를 드러내는 사람들에 대해서 뿐만아니라 모든 형태의 행동으로 나타나는 자비에 대해서 말한다. 왜냐하면 자비를 표현하는 방법들은 수 없이 많고 이 자비의 계명은 범위가 넓기 때문이다. 그러면 자비에 대한 약속된 보상은 무엇인가?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이다. 그리고 이 보상은 우리의 자비로운 행위와 동등한 보상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그 어떤 인간의 선한 행위보다 훨씬 더 큰 것이다. 그들은 인간으로서 자비를 보이지만, 그들이 얻는 것은 모든 것의 하느님으로부터 자비를 얻는 것이고, 하느님의 자비는 인간의 자비와 같지 않고 사악함과 선함 사이의 깊은 심연만큼 넓으며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갈 수 없을 만큼 멀리 있다."(성 요한 크리소스톰)

"무자비한 사람은 무자비한 심판을 받습니다. 그러나 자비는 심판을 이깁니다."(야고 2,13)

"눈으로 본 적이 없고
귀로들은 적이 없으며
아무도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마련해 주셨다."
(1고린 2,9)

마지막 심판에서 자비로운 사람들은 자비를 받는다: “너희는 내 아버지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니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를 차지하여라...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34. 40).

 

사진출처=pixabay.com

그리스도는 여섯 가지 유형의 자비행위들을 나열했는데 ­굶주린 이들을 먹이고, 헐벗은 이들을 입히고, 목마른 이들에게 마실 것을 주고, 집없는 이들을 환대하고, 병든 이들을 보살피고, 감옥의 죄수들을 방문하는 것.­

자비의 일은 다른 이들, 특히 가장 쉽게 무시되고 비인간화되었거나 사랑보다 분노의 표적이 된 이들을 보살피는 모든 행위가 포함된다.

도로시 데이는 자비의 영적인 작업에 대해 자주 말했었다: 그런 일들은 죄인들을 일깨우고, 무지한 이들을 가르치며, 의심하는 이들을 권고하고 슬퍼하는 이들을 위로하고 잘못된 것을 인내롭게 견디는 것, 모든 피해들을 용서하는 것, 그리고 살아있는 이들과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최후의 심판을 반영하는 <카라마죠프가의 형제들>의 한 부분에서 도스토옙스키는 양파 하나로 거의 구원될 뻔했던 한 여인의 이야기를 서술한다:

옛날 한 여인이 있었는데 그는 사악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으로 나쁘게 살았다가 죽었다. 그리고 아무런 선한 행위도 남기지 않았다. 악마들이 그를 데려가 불구덩이 속에 넣었다. 그러자 그의 호수천사가 생각했다: 하느님께 말할만한 그의 어떤 선한 행위를 내가 기억할 수 있을까?

그러던 중 천사가 기억나는 것이 있어 하느님께 말했다: 한번 그가 양파를 캐다가 지나가는 여자 걸인에게 양파 하나를 준 적이 있습니다. 그러자 하느님이 대답했다; 자 그때 그 양파를 들고 가서 불구덩이에서 그걸 붙들고 그가 나올 수 있도록 하라. 그가 직접 양파를 붙잡으면 그를 끌어 올려라. 그래서 불구덩이 바깥으로 끌어올릴 수 있으면 그는 낙원으로 갈 수 있다. 그러나 양파가 끊어지면 그는 불구덩이에 있어야 한다. 천사가 여인에게로 달려가 양파를 붙들게 했다.

여기서 천사는 여인에게 양파를 꼭 붙잡으면 자기가 끌어올리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천사는 조심스럽게 끌어올렸고 거의 다 끌어올렸을 때 다른 죄인들이 여인을 보고 모두 여인에게 매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인은 마음이 사악해질 대로 사악해져서 발로 그들을 차기 시작했다: “네가 아니라 내가 이곳에서 나가는 것이야; 이건 내 양파야, 네것이 아니야.” 그렇게 말하자 마자 그는 불구덩이 속으로 다시 떨어져 지금까지 그곳에서 타고있다. 그래서 천사는 울면서 떠나갔다.

“지옥은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죠르쥬 베르나노스가 말했다. 다른 사람들과 관계 맺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 머무는 곳이다. 그런 이들에게는 천국이 지옥보다 더 나쁜 곳으로 여겨진다. 지상에서 살면서 사람들을 피하며 지냈는데 왜 사람들과 영원히 있고 싶겠는가?

그러나 천국은 어떤 곳인가? 초기 교회의 교부들이 하느님과의 일치, 친교가 무엇인지 드러내주는 성서구절들을 찾았을 때, 그들은 오늘날 우리에게 놀라운 선택처럼 보이는 선택을 자주 하곤 했다­그것은 솔로몬의 노래이며, 사랑의 시들을 모아놓은 것으로 많은 부분이 결혼 때에 불러지도록 쓰여진, 관능적인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포도주보다 달콤한 임의 사랑, 임의 향내, 그지없이 싱그럽고, 임의 이름, 따라 놓은 향수 같아... 나의 귀여운 이요, 어서 일어나오, 나의 어여쁜 이여, 이리나와요. 자, 겨울은 지나가고... 나의 사랑은 나의 것이요 나는 그의 것이니.”

아가(솔로몬의 노래) 전체는 두 남녀사이의 육적인 사랑에서 오는 원초적인 기쁨을 기념하고 있다.

교회 교부들은 비록 자신들은 독신으로 지냈지만, 이 환상적이고 관능적인 시가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 우리가 취하는 태도를 가장 잘 표현해주는 은유라고 생각했다. 하느님과 우리들 사이의 차이는 하느님의 사랑이 무한하고 절대적인 반면에 우리의 사랑은 일시적이고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하느님의 자비는 타오르는 덤불 같아서 번쩍거리지만 소모되지 않는 사랑이다.


[원출처] <진복의 사다리>, 짐 포레스트, The Ladder of the Beatitudes, Orbis, 1999
[출처] <참사람되어> 2002년 10월호 

 

 

 

[ 가톨릭일꾼 www.catholicworker.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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