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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 “나는 벌레이며 사람도 아닙니다”

크산티아스 원장이 말했다: “개는 나보다 낫다. 왜냐하면 개 역시 사랑을 갖고 있으나 나와 달리 판단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르마타스 원장이 말했다: “나는 자신이 죄를 지었다는 것을 알고 참회한다면 죄를 짓지 않았으나 자신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여기는 사람보다 죄를 지은 사람을 더 좋아한다.”

 

사진출처=pixabay.com

겸손과 관상은 영적 생활에 있어 보이지 않는 쌍둥이다. 둘은 서로가 없으면 얻기가 힘들다. 먼저, 우리자신의 위대함을 넘어 하느님의 광대한 위대함으로 이끌어가는 관상적 삶은 겸손함이 없다면 불가능하다.

두번째로, 우리가 하느님의 장엄함에 대해 진정으로 알고 나면 우리자신들을 포함하여 나머지 삶에 대해서도 전체적으로 깨닫게 된다. 달에 도착하면서 우리는 우주 공간에서 우리가 얼마나 보잘 것 없는지 깨달았다. 우리는 인간사에 관하여 가지고 있었던 우리 자신의 소중한 개념들에 대하여 다시 생각하기 시작한다.

겸손은 우리를 곧장 관상에 이끌어준다. 관상으로 직접 우리를 이끌어간다. 겸손은 경이로움으로 가득찬 세계 앞에 나를 서게 하고, 그것의 선물들을 받아들이며 그것이 주는 교훈들을 배울 수 있게 해준다. 그러나 겸손해지는 것은 자신을 축소시키는 것이 아니다. 참으로, 겸손과 굴욕은 같은 것이 아니다. 굴욕은 인간 존재인 나를 비하시키는 것이다. 겸손은 우주에서의 나의 올바른 자리, 먼지이면서도 영광, 하느님의 영광인 나, 그렇지만 먼지인 나를 인정할 수 있게 해주는 능력이다.

베네딕트회의 규칙은 수도자들에게 “나는 벌레이며 사람도 아닙니다”라는 시편 구절로 기도하라고 충고한다. 오늘날 '나' 중심의 세대들에게 이 말은 인간 존엄성의 말살처럼 들릴지 몰라도 실상은 우리를 해방시키는 진리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대로 이루어지는 존재가 아니다. 나의 가족, 친지들, 나의 세계 그리고 우주가 추구해야 할 정상은 고사하더라도 나 자신마저 충족치 못한 상태에 있다. 나는 그저 지금 모습의 나일 따름이다.

나는 자주 유약하고 항상 기를 쓰며 때때로 호전적이고 대부분의 경우 나 자신으로부터 숨고 늘 어떤 것을 필요로 한다. 나는 내 한계를 물론 그럴싸하게 장식하지만 깊은 내면에는 나의 영혼이 한계가 많은 나를 대면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나는 진짜 내 모습을 알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 겉모습이 아무리 좋아도 그것이 진짜 나는 아니다. 베네딕또회는 우리들이 하느님과의 일치를 이루는 준비가 된 때가 바로 그 때라고 말한다.

이렇게 매일같이 팽창하는 세계 속에서 완전해진다는 것이 더욱 의심스러워지는 즈음에, 우리가 완전하게 될 때 하느님을 찾을 수 있다는 말은 옳지 않다. 오히려 아직 애숭이에 불과한 우리자신을 받아들일 때에야 우리는 참으로 우리자신을 넘어 볼 수 있다. 우리가 스스로 우리자신의 하느님이 되기를 그칠 때에 하느님은 우리 안으로 뚫고 들어오실 수 있다.

베네딕또회의 규칙은 관상으로 이끄는 겸손의 네가지 측면들을 그리고 있다. 첫 번째 측면은 단순하게 우리의 삶 속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인지하는 것이다. 규칙은 매우 명료하게 하느님은 '그저 있는 분'이시라고 말한다. 하느님은 우리가 그 현존과 힘을 파악하든 못하든 간에 우리와 함께 계신다. 하느님은 구매하거나 얻거나 획득하거나 성취해서 계시는 분이 아니다. 하느님은 생명의 기반이다.

촛점은 우리가 하느님께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자신을 하느님으로부터 떼어놓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다만 우리는 우리 안에 계시는 하느님의 현존의 영향과 의미를 무시할 수 있을 따름이다. “오 하느님, 오시어 저를 도우소서”, 우리는 공동체에서 매일의 시작 기도를 이렇게 한다. 우리가 인식하는 기도하려는 갈망조차도 우리 안의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겸손의 두번째 차원은 타인들이라는 선물, 그들 안의 하느님과 그들의 지혜, 그들의 경험 그리고 그들의 방향 등의 선물을 받아들일 것을 우리에게 요구한다. 우리의 가장 깊은 자아를 다른 이에게 드러내 보임으로써 우리는 그들 안에 계신 하느님의 현존을 알아보게 된다. 그렇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또한 우리가 입은 가면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킨다. 이러한 거짓말들은 마지막에 우리자신을 우롱하기가 십상이다.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닌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되는 것은 여성에게 있어 능력이 된다. 남자가 자신이 모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는 것은 은총이다. 다른 사람들이 가진 선물에 그리고 자아의 진실에 눈을 뜰 때 우리는 하느님이 계신 자리에서 하느님을 알아 볼 수 있다.

겸손의 세번째 단계는 우리에게 일상생활 속에서 가짜 기대들을 내려놓으라고 요청한다. 진정으로 자신의 작음을 깨달을 때에, 나는 필요로 하는 것 이상으로 이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삶을 소모하지 않게 된다. 나는 사람들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과는 상관없이 최상의 차, 최상의 의자, 접시위의 최상의 고기를 추구하도록 부추기는 가짜 위대함의 미망을 간직하지 않는다. 하느님으로 가득한 사람은 편안함, 장식물, 지위들, 상징등 인생의 그 어떤 거품들이 줄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안전하다.

겸손의 네번째 차원은 다른이들을 친절하게 받아들이라고 요구한다. 나 자신의 한계를 알게 되면서 다른이들의 한계도 받아들일 수 있다. 그 때에 나는 조용하게 고함치지 않으며 나 자신에게 주의를 두지 않고 내안의 하느님에 집중하면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

마지막으로, 자아에 대해 실제적이 되면 우리의 정신은 하느님으로 가득차며 자유롭게 된다.

관상가가 되기 위하여 우리는 매일 우리 안에 계시는 하느님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러한 마음가짐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그러면 우리는 그날, 어떤 사람과 그 어떤 방법으로도 하느님과 함께 즐기기 위하여 자신을 비울 수 있게 된다.


[원출처] <Illuminated Life, Monastic Wisdom for Seeker of Light>, Joan Chittister
[출처] <참사람되어> 2000년 11월호

 

 

 

[ 가톨릭일꾼 www.catholicworker.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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