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기도하고 성인
슬픔에서 슬픔으로,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

2008년 3월 서울미술관에서 열린 고흐전시회에서도 확인하고, 2016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고흐의 그림을 보았을 때도 놀라며 확인한 것은 큰 규모의 작품이 없다는 점입니다. 아마 동생인 테오의 도움으로 어렵게 그림을 그렸던 고흐에게 큰 캔버스를 살 돈도, 그 캔버스를 채울 물감도 얻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연민으로 호흡했던 사람들의 처지마냥 작은 사이즈의 그림이 더 잘 어울렸을 법합니다.

그의 마음이 머무는 곳이 그의 그림의 사이즈 또한 결정짓는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지요. 대작을 만드는 사람은 뒷돈을 대줄 수 있는 막강한 후원자가 있어야 가능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유화 작품들은 익히 들었던 대로 과연 살아서 생생함을 돋보이고 있었습니다. 사람뿐 아니라 풀잎과 흙덩이까지 살아서 무엇인가 말하고 싶어하는 것 같았습니다.

 

고흐의 초상

영원으로 가는 통로, 별

빈센트 반 고흐는 평생 동생인 테오에게 수많은 편지를 써서 보냈는데, 자신의 심경과 작품에 대한 의견 등을 비롯하여 한 몸처럼 이야기를 나누었지요. 그의 후기 작품에 별이 많이 등장하는 것은 고흐의 종교적 영원성에 대한 갈망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고흐가 마음의 스승으로 삼았다는 장 프랑수아 밀레(Jean-François Millet, 1814-1875) 역시 <별이 빛나는 밤>이라는 작품을 먼저 그렸으며, 고흐는 월트 휘트먼에게도 영감을 받았습니다. 여동생 빌헬미나에게 보낸 고흐의 편지엔 이렇게 적혀있지요.

“미국 시인 휘트먼의 시들을 읽어보았니? 그는 미래에서, 아니 현재에서도, 건강하고 인간적이며 강렬하고 솔직한 사랑과 우정, 노동이 존재하는 이 세상 위로 펼쳐진 별빛 비치는 커다란 둥근 하늘을 본다. 그것은 결국 하느님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그 무엇이며, 이 세상 위에 자리 잡고 있는 영원이다.”

고흐는 평범한 사물 속에 육화된 진리를 추구했습니다. 그러나 심각한 어려움이 닥쳐올 때면 무한으로 가는 통로인 별이 가득 찬 밤하늘을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종교적 갈망을 담은 <별이 빛나는 밤>에서, 고흐는 자신이 상상력을 끝까지 팽팽하게 펼쳐 가장 음악적인 작품을 창조해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다시 또 다시 하늘에서 땅으로 자신의 시선을 내려놓아 <신발 만드는 사람> 등을 그렸습니다.

헨리 나웬과 빈센트 반 고흐

전시회를 보러가기 전에 우연히 추천받은 책이 한 권 있었지요. 클리프 에드워즈가 쓴 <하느님의 구두>라는 책입니다. 그는 제목에 ‘거룩한 화가, 빈센트 반 고흐’라고 적었습니다. 그의 영성을 탐구한 책이란 걸 금방 알 수 있었습니다.

그가 이 책을 저술하면서 도움을 받은 사람은 헨리 나웬(Henri J.M. Nouwen)입니다. 저명한 대학교수직를 버리고 급기야 새벽공동체에서 장애인들과 더불어 살면서 비로소 참된 하느님 체험을 하였다는 영성작가지요. 나웬은 고흐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고흐의 고독한 투쟁과 나의 고뇌 사이에서 연결고리를 발견했으며, 그가 상처 입은 치유자로 나에게 다가오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이전에 내가 감히 바라보지 못했던 것을 그렸고, 내가 감히 입 밖에 꺼낼 수 없었던 것에 물음을 던졌으며, 내가 감히 근접할 수 없었던 마음의 자리에 성큼 들어가 있었다. 그렇게 해서 그는 나로 하여금 나의 두려움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게 해 주었고, 내가 사랑이신 하느님을 찾기 위해 더욱 깊이 또 더욱 멀리 나아갈 수 있게 용기를 불어넣어주었다.”

사람들은 흔히 빈센트 반 고흐를 질병과 고통 속에서 예술을 창조해 낸 불운의 천재로 여기고, 쉽게 고뇌와 불행과 정신병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고흐는 성경을 진지하게 공부했고, 세익스피어와 디킨스, 졸라를 읽었으며, 연민의 마음으로 서민들에게 다가가 그들에게 위로와 치유를 줄 수 있는 새로운 정신의 예술을 창조하며 자신을 불살랐습니다.

클리프 에드워즈는 먼저 창문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창문은 우리가 속한 공간 너머의 세상을 볼 수 있게 해준다. 창문은 바깥을 내다볼 수 있게 해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서 있는 내부 공간을 밝혀줄 빛을 들여오기도 한다. 그림은 창문과 같다. 그림을 통해 우리는 가로막힌 벽 대신에 산과 들을 바라보고 우리 영혼의 가장 어두운 구석에 빛을 들여온다.”

독일 신비가였던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내가 하느님을 보는 바로 그 눈이 하느님께서 나를 보시는 눈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그림은 화가가 하느님의 삶을 들여다보는 눈이며, 또한 하느님이 화가의 삶을 들여다보는 눈이기도 하다. 그럼 과연 고흐의 그림에 나타난 고흐의 눈빛은 어떤 색채였을까요?

 

낮잠

열렬한 복음주의자, 빈센트 반 고흐

1853년 네덜란드 북(北) 브라반트 지역에서 꽤 알려진 개신교 목사 가문에서 태어난 빈센트 반 고흐는 동생 테오처럼 여러 화상(畵商)에서 일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매번 터무니 없이 비싼 가격으로 가난한 화가들의 그림을 팔아서 이문을 챙기는 그림장사에 환멸을 느끼고 주인과 싸우곤 했지요. 이윽고 자신의 소명은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성직자가 되기 위해 암스테르담에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는 이모부 스트릭커 목사의 집에서 기거했는데, 스트리커 목사 네덜란드에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나자렛 예수>라는 책을 통해 처음으로 '인간 예수의 생애'를 집필한 학자였습니다. 그는 신앙의 윤리적 차원을 강조했으며, 그 핵심을 산상수훈에서 찾았지요. 즉, 그리스도교적 삶이란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라는 게지요. 스트릭커 목사가 추천한 고흐의 스승은 멘데스라는 학자였는데, 고흐는 그의 집을 가기 위해 매일 예배당과 철공소, 술집과 석판인쇄소 앞을 지나다녔습니다.

고흐는 멘데스와 근처 빈민가를 산책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았는데, 그는 가난한 사람들이야말로 종교가 필요하다는 점을 역설하곤 했답니다. “이 노동자들은 힘겨운 생활을 하고 있어. 병에 걸려도 의사를 부를 돈이 없지. 오늘 일을 해야, 그것도 중노동을 해야 내일 먹을 거리가 생기지. 이 사람들 집은 보다시피 작고 초라해. 한 발만 내딛으면 배고픔과 굶주림이야. 허덕이면서 살고 있지. 이 사람들이야말로 하느님을 생각하며 위로받아야 할 필요가 있는 사람들이야.” 그렇다면 부유한 주택가 사람들에겐 종교가 소용없다는 말인가. “그 사람들이야 좋은 옷을 입을 수 있고, 안전한 지위를 누리고, 불행에 대비해 돈도 저축해 두었지. 그들이 생각하는 하느님이란 부유한 노신사야. 한마디로 세상일이 뜻대로 잘 되어가는구나 하고 만족해 하는 노신사지.” 고흐가 이렇게 말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좀 숨 막히는 사람들이군요.”

반 고흐는 초기에 열렬한 복음주의자였는데, 존 번연의 <천로역정>과 토마스 아 켐피스의 <준주성범>(그리스도를 본받아), 르낭의 <예수전>을 탐독했습니다. <준주성범>을 통해 자기를 부정하고 고통을 받아들이며 이승에서 순례자로 살아야함을 배웠습니다. 고흐는 <천로역정>의 영향을 받아 이렇게 말한다. “이 땅에서 우리는 순례자이고 이방인입니다. 우리는 먼 곳에서 왔으며 먼 곳으로 가려합니다. 삶이란 여행길은 따스한 어머니 품안에서 출발하여 하늘에 계신 하느님 아버지 팔에 안길 때까지 이어집니다. 지상의 만물은 변화하며, 영원한 도시는 이곳에 없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영향은 르낭의 <예수전>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고흐는 “그리스도교가 새로워지려면 복음서로 되돌아가기만 하면 된다”고 믿었습니다. 그것은 개인적인 욕망을 희생하고 종교를 조국으로 삼아 이웃을 위해 헌신하는 삶이었습니다. 이러한 윤리적 요청에 반 고흐는 열정적으로 응답했습니다. 고흐는 서둘러 학업을 포기하고 평신도 신분으로 벨기에의 광산촌 보리나주에 수습선교사로 갔던 것이지요. 거기서 헐벗고 사는 광부들을 만나면서 안온한 숙소를 버리고 오두막집에 살며 광부들처럼 냉방에서 잠을 청했습니다.

문자 그대로 예수를 따르려던 반 고흐는 옷가지도 다 나눠주고 양말도 신지 못한 채 연단에서 설교를 하곤 했어요. 그때 한 광부의 아내가 "왜?"냐고 물었죠. 고흐는 “그리스도께서 그러셨듯이, 저도 가난한 이들의 친구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오베르 성당

종교비판, 자유롭게-가난한 이에게

그러나 고흐는 수습기간이 채 끝나기도 전에 교단에서 면직을 당합니다. 그가 보리나주의 비참한 광부들과 가족들에게 제 소유한 바를 다 나눠주고, 그들과 똑같은 움막에 살며 누추한 그 집에서 예배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광부들의 옷을 입고 그들의 절망에 동참하며 그들 안에서 빛나는 하느님을 발견하려던 고흐는 결국 교계의 품위를 훼손했다는 이유로 더 이상 선교사로서 역할을 하지 못하도록 금지된 것입니다. 그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엔 종교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서려있습니다.

“복음전도사들도 예술가들과 같다고 말해야겠구나. 혐오스럽고 고압적인 오래된 학교가 있고, 공포가 가득하며, 편견과 관습의 철갑옷을 입은 사람들이 있지. 이런 자들이 책임을 맡게 되면 그들은 자기 마음대로 직위를 관리하고, 딱딱한 형식주의를 내세워 자기 신자들을 빼앗기지 않으려 하고 다른 사람들은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다.”

광산촌에서 그가 선교사로 일하지 못하게 되면서 고흐가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연필’이었습니다. 잿빛으로 뿌옇게 알아볼 수 없는 사람들을 연필로 그려서 존재감의 옷을 입혀 주는 것이었지요. 고흐는 이제 광부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없다면 그들을 그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무시하고 잊고 지내는 이 일꾼들의 얼굴을 ‘사람들 눈앞에’ 데려와 사람들에게 이 연약하고 상처받은 이들에 대한 자비의 의무를 일깨워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고흐는 가장 소박한 사람들, 나무, 풀, 길 그리고 이런 풍경들이 그의 마음에 불러일으킨 내면의 빛을 세상에 보여줌으로써 구원의 길을 찾았습니다. 그는 일상을 사는 농부들과 광부들과 우체부와 엄마와 아이들을 둘러싼 세계를 떠나서 하느님을 만날 길이 없음을 알아차린 것입니다. 그 앞에서 관념적인 설교는 힘을 잃어버립니다.

고흐의 작품에서 특이한 것은 그의 그림에 나타나는 교회당들이 하나같이 불이 꺼져 있다는 것입니다. 경제사정이 어려워질까봐 성직자가 되려는 자신의 순수한 열망을 비판했던 목사였던 아버지의 위선적 행동, 아직 보잘것없던 고흐와 자기 딸의 교제를 극구 반대했던 스트릭커 목사, 보리나주에서 자신을 쫓아냈던 일방적이고 고압적인 교단 등은 그로 하여금 교회를 위선과 자기 기만의 장소로 여기게 했던 거지요. 가르침과 행실이 이중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흐는 교회를 성령의 불이 꺼져 있는 캄캄한 곳으로 묘사합니다. 유명한 그림 <별이 빛나는 밤에>에서도 마을의 작은 집 창문마다 불빛이 새어 나오는데, 교회만 불이 꺼져 있으며, <오베르성당>도 짙은 어둠만 보여주고 있습니다.

슬픔에서 슬픔으로

고흐가 탄광촌에서 나온 뒤 얼마 후 시골 목사로 있던 엄격한 아버지가 죽자, 탁자 위에 성경책과 졸라의 소설이 놓여 있는 정물화를 화폭에 담아서 아버지의 죽음을 기렸습니다. 그러나 이 그림은 고루하고 염세적인 아버지의 신학을 거부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그림엔 오른쪽 면 맨 위에 ‘ISAIE'라는 글자가, 그 오른쪽 여백엔 ’LIII'라고 적혀 있는데, 이사야서 53장의 고통받는 ‘주님의 종의 노래’가 펼쳐져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분명히 아버지가 좋아하지 않았을 에밀 졸라의 <삶의 기쁨>이란 책이 성경책 근처에 놓여 있습니다. 때때로 아버지에게서 ‘더러운 짐승’으로 취급받았던 고흐의 자유로운 정신과 상처받는 치유자에 대한 갈망을 잘 보여주는 그림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내 인생에서 의식적으로 개의 길을 기꺼이 선택한다고 말해 두마. 나는 개로 남을 테다. 가난하게, 화가로.”

고흐는 당시 고루한 늙은 신사와 같은 교계에서 내침을 당하고, 세상에서도 ‘고난받는 주님의 종’으로 평생을 살았고, 그렇게 죽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배척당한 그는
고통의 사람, 병고에 익숙한 이였다.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
그런데 우리는 그를 벌 받은 자,
하느님께 매 맞은 자로, 천대받은 자로 여겼다.”
(이사야 53,3-4)

스물일곱 살 이후 독학으로 그림 공부를 시작하여 불과 십년 후인 서른일곱 살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고흐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가 정식으로 그림공부를 받지 않았다는 사실이 오히려 그의 창조적 예술을 가능하게 만들어 주었다고 합니다. 그는 결코 직업적 화가가 되려고 한 것 같지 않습니다. 다만 그림을 통해 자기 자신과 가련한 사람들을 구원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고흐의 삶에서 가장 상징적인 사건들 중의 하나는 헤이그에서 매춘부였던 크리스틴(시엔이라고도 함)을 만난 것입니다. 고흐는 죽어가던 그녀를 무료진료소에 데리고 가서 입원시켰고, 그녀는 거기서 건강한 아이를 출산했습니다. 고흐는 여인과 아기를 작업실로 데려와 요람을 마련하고, 그 위에 렘브란트의 판화를 걸어놓았는데, 이렇게 고백합니다. “새 작업실은 한창 피어나는 새로운 가정이다. 신비롭고 은밀한 작업실이 아니라 요람과 아기의 변기 의자가 있는 실제 삶에 뿌리를 내린 공간인 것이다. 이곳에서는 더 이상 정체됨이 없고 모든 것이 다 활기차게 움직인다.”

고흐에게 아기는 ‘어둠 속의 빛’이었고, 하느님이 우리의 보살핌과 희생을 필요로 하는 연약한 모습으로 이 세상에 들어오는 길이었습니다. 고흐가 아기를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 탄생하는 하느님으로 인식한 것은, 고난의 현장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는 깊은 경험이었지요. 고흐에게 하느님은 아기처럼, 생명을 불러일으키는 들판처럼 우리에게 생생하게 오십니다. 물론 이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지요. 고흐의 집안에서 반대하고, 크리스틴의 가족들은 그녀를 다시 거리로 내몰았던 것입니다.

고흐는 자신의 믿음을 행동으로 옮기고자 했다. 사랑이든 일이든 모든 것은 행동으로 표현되어야 했지요. 언젠가 동료작가가 삶의 신조가 무엇이냐고 질문했을 때,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침묵하고 싶지만 꼭 말을 해야 한다면 이런 걸세.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 산다는 것. 곧 생명을 주고 새롭게 하고 회복하고 보존하는 것. 불꽃처럼 일하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선하게, 무언가에 도움이 되는 것. 예컨대 불을 피우거나, 아이에게 빵 한 조각과 버터를 주거나,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물 한 잔을 건네주는 것이라네.”

 

우체부 조세프 룰랭의 초상과 룰랭부인

평범한 성인들의 초상

고흐가 그린 초상화에는 거창한 인물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초기작인 연필 드로잉이든 나중에 그리기 시작한 유화이든 광부와 우편배달부, 농부들과 일하는 여인들, 아이를 돌보는 엄마들의 표정을 그림에 담았습니다. 고흐는 평범한 농부와 노동자들을 통해 성인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한달 수입이 150프랑 밖에 안 되는 친구이며 우편배달부였던 조세를 그리고, 그의 아내 오귀스틴을 그렸지요. 남편 조세는 성격이 화통하고 친절했으며, 교회를 비롯한 제도를 못 견뎌했다고 합니다. 1888년 가을, 그가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하면서 테오에게 했던 말을 들어보면 이렇지요.

“그림을 통해서 나는 음악처럼 위안이 되는 메시지를 주고 싶다. 나는 후광으로 상징되던 것, 우리가 우리 자신의 빛깔에서 뿜어져 나오는 참된 광채와 떨림으로 전하고자 하는 그런 영원의 흔적을 간직한 사람들을 그리고 싶구나.”

오귀스틴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고흐는 그녀를 몇 번이고 그렸고, 이 초상화를 제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성스러운 장면들과 성인들을 담은 3부작의 중심에 두려고 했습니다. 그는 해바라기 그림들을 그녀의 초상화 양쪽에 ‘장식촛대’처럼 두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잇습니다. 처음 그림을 시작했을 때, 고흐는 자신이 자기 일을 완성하는 데 얼마나 걸릴 지 가늠해 본적 있었지요. 아마 6년에서 10년 정도 남았을 거라고 생각했지요. 결국 고흐는 27살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여 37살에 이승을 떠날 때까지 딱 10년 동안 열정적으로 그림에 몰두한 셈입니다. 이를 두고 고흐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무 서두를 필요는 없는 것 같다. 그것은 아무 도움이 안 된다. 그보다 나는 아주 차분하고 평온하게, 가능한 한 규칙적이고 안정되게, 또 가능한 한 간결하고 정확하게 작업을 해야 한다. 내가 세상에 어떤 빚과 책임을 지고 있음을 깨닫는 그만큼 세상은 나에게 의미를 지닌다. 나는 이 땅을 30년 동안 걸어왔고, 이에 보답하는 뜻으로 그림을 통해 세상에 어떤 기억을 남기고 싶다. 내가 그림을 그리는 것은 예술적 취향을 만족시켜 주려는 것이 아니라, 진실한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서이다.”

 

첫걸음

들판에서 들려온 언어를 그림으로 옮기며

고흐는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이면 들판에 나가 흠뻑 비를 맞으며 하느님의 위대한 경이로움을 바라보았다고 합니다. 그런 날이면 거친 세상을 살아가는 가련한 인생들을 생각하며 “자신을 생생하게 깨어있게 하는 슬픔”으로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러나 거센 비바람은 또한 인간의 슬픔이면서 동시에 살아있는 하느님의 생생한 현존이기도 했지요. 클리프 에드워즈는 고흐를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머리에는 태양을, 가슴에는 폭풍우를 품고 살았다. 그는 광부와 농부들을 그렸고, 여염집 아낙네와 엉겅퀴에서 성인들을 발견했고, 마지막에는 밀밭과 까마귀와 폭풍우 치는 하늘로 올라갔다.”

고흐가 바라보았던 들판이란 한편엔 폭풍우 치는 하늘이 있지만, 다른 한편에는 한층 황금빛으로 무르익은 밀밭이 있었지요. 이 곡식들은 빵을 만들 밀과 다시 심을 씨앗을 약속한다고 보았습니다. 고흐는 평생 자신이 정식으로 그림을 배우지 않았던 것을 후회한 적이 없었는데, 화가에게는 재주가 아니라 자연의 언어를 읽는 능력이 더 필요했던 거지요.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림을 배우지 못했던 것이 다행스럽구나 ... 그러나 나는 내 그림에서 언젠가 내 마음을 치고 지나갔던 울림을 발견한다. 자연이 나에게 무언가 말해왔고, 말을 걸어왔으며, 나는 그것을 재빨리 받아 적어 화폭에 옮겨 놓았음을 마침내 알게 되었다. 그렇게 받아 적는 가운데 해독할 수 없는 말들도 있고 오타나 누락이 있을 수도 있지. 그러나 숲이나 바닷가나 인물이 나에게 말한 것을 조금은 그 안에 담고 있으며, 그것은 학습이나 체계에서 이끌어낸 따분하고 진부한 언어가 아닌 자연 그 자체에서 온 언어였다.”

고흐는 어린 시절부터 길러진 자연에 대한 세심한 감각과 자신의 처지에서 온 어려움과 외로움 때문에 더욱 자연에 깊이 귀 기울이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것은 끈질긴 경청과 세심한 양육적 태도에서 오는 것이었지요. 그는 언제나 양육적 태도로 대지와 여성을 바라보았는데, 그가 사랑하던 밀레나 들라크루아처럼 화가들이란 이러한 ‘아름다운 차분함’을 지녀야 한다고 말합니다. 테오에게 보낸 편지를 다시 보면, 여기에는 그가 이상으로 여겼던 예술가의 초상이 드러납니다.

“여자들처럼 주의 깊고, 섬세하고, 지적이며, 자신의 고통에 민감함은 물론 생명력과 자기인식이 충만하고, 무관심한 냉철함은 보이지 않고 생명을 경시하지도 않은 그들은 세상을 떠날 때에도 여자들과 같은 모습이다. 하느님에 대한 틀에 박힌 생각이나 추상적인 것을 피하고, 언제나 삶 자체에 탄탄하게 발붙이고 거기에만 신경을 썼다. 다시 말하지만 그들은 사랑이 충만했고 삶에 상처를 받았던 여자들처럼 죽는다. 실베스트르가 들라크루아에 대해 말했듯이 ‘그들은 미소 띤 듯한 얼굴로 죽는’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기다린다, 언제까지나

1880년, 고흐가 그림을 배우기 위해 처음 연필을 들었을 때, 그는 동생 테오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고 합니다.

“우리 내면의 생각이 밖으로 드러날 수 있을까? 내 영혼 안에는 거대한 불길이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아무도 그 불을 쬐러 오지는 않아.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굴뚝에서 나오는 가느다란 연기밖에 볼 수 없는지라 그냥 제 갈 길을 가지. 그럼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 땀 흘리며 자기 안의 불을 보살피면서 누가 와서 불가에 앉아서 머무르게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할까? 그러려면 얼마나 많은 인내가 필요하겠니.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그런 시간이 언젠가 오기를 기다린다.”

실제로 고흐의 그림을 알아보았던 사람은 평생의 동반자였던 동생 테오 밖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는 말년을 창살로 막혀 있는 정신요양원에서 보냈으며, 그렇게 죽었습니다. 지금 서울의 미술관에 밀려드는 수많은 관람객을 생각해 볼 때 묘한 느낌이 교차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고흐는 화가이기 전에 어쩜 그 시대의 불우한, 그러나 빛나는 영혼을 가진 성직자(聖職者)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는 하느님과 그분이 사랑하시던 이들과 창조세계에 평화의 인사를 나누기 위해 세상에 태어났던 것입니다.

오늘은 결국 고흐를 만났습니다. 서책에서 보던 그 사람 말고, 그의 기운이 아직도 생생한 그림 속에서 그를 만났습니다. 그림을 보고 나오는 길목에 정동 제일교회가 바로 눈에 띄었습니다. 나는 무엇으로 그분에게로 건너갈 것이며, 어떻게 그분이 사랑하던 이들과 세계를 향해 발음해야 할까? 내 눈빛을 내가 가늠해 봅니다.


[출처] <그대 아직 갈망하는가>, 한상봉, 이파르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 가톨릭일꾼 www.catholicworker.kr ]

<가톨릭일꾼 기사는 상업적 용도 아니라면 출처를 밝히고 누구나 퍼갈 수 있음>

한상봉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