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오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 지도자는 언제나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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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 지도자는 언제나 그리스도
  • 리차드 로어 & 죠셉 마르토스
  • 승인 2017.08.23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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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 새로운 창조-4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교의 최초의 위대한 선교사이다. 그는 로마제국 전역을 누비며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과 신앙에 의한 의로움이라는 기쁜소식을 최초로 전한 사람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가 설교를 했으리라고 확신한다. 그리고 그가 분명히 세례를 받았으리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그는 설교와 세례만이 복음화의 전부가 아니라고 믿었다. 그는 몇몇 현대 복음주의자들이 주장하듯이 하느님을 믿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것만이 구원받을 수 있는 조건이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매우 구체적인 전략을 썼다. 그가 연설하거나 세례를 주는 곳 어디에서나 그는 서로 지지하고 섬길 수 있도록 신자들의 조직을 만들어 육성했다.

이 조직의 지도자는 그리스도뿐

바오로는 자기가 세운 공동체를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그 단체는 단지 모두 예수님을 믿는 개인들의 집합체가 아니라 구성원들이 함께 일하고 여러 면으로 서로 돕는 통합된 사회적 조직이었다. 이 조직의 지도자는 바오로가 아니고 그리스도이시다. 바오로가 다른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서 그 공동체를 떠난 뒤에도 그리스도께서 그곳의 지도자로 남아 계시기 때문이다. 

이 조직의 모든 구성원들이 세례를 통해서 성령을 받았고 함께 손을 잡음으로 이 조직의 영은 바오로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성령이시다. 이 공동체는 하나의 머리와 하나의 영(靈)으로 된 것이므로 바오로는 이 공동체를 몸이라 부를 수 있었다. 그리고 이 공동체의 머리와 영이 그리스도의 것이기 때문에 바오로는 이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부를 수 있었다.

개신교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구절을 들으면 그들은 다음과 같이 은유적으로 생각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과 같다. 가톨릭 신자들은 이 구절을 형이상학적으로 생각한다: 교회 전체가 정말 그리스도의 몸이나, 그것은 경험되지 않은 “신비적인” 실체이다. 그러나 바오로는 이 구절을 비유적으로도, 형이상학적으로도, 신비적으로도 쓰지 않았다. 그것은 매우 구체적이다. 그는 주님이신 그리스도에게 개인적인 승복을 함으로써 서로 같이 모인 사람들, 그들의 삶이 성령의 힘으로 힘차게 맥박치는 사람들의 살과 피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사진출처=pixabay.com

나는 교회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바오로는 골로사이 사람들에게 보내는 그의 편지에서 자신의 사명과 교회에 대한 그의 전망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기꺼이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으로 채우고 있습니다. 나는 하느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따라 여러분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남김 없이 전하기 위해서 교회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이 심오한 진리는 과거의 모든 세대, 모든 사람에게 감추어져 있던 것인데, 이제는 하느님의 성도들에게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방인들에게 드러내신 이 심오한 진리가 얼마나 풍성하고 영광스러운 것인가를 성도들에게 알게 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이 심오한 진리는 곧 이방인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는 사실과, 또 영광을 차지하게 되리라는 희망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고 성숙한 인간으로 하느님 앞에 서도록 우리는 지혜를 다하여 모든 사람을 경고하며 가르칩니다."
(골로사이서 1,24-28)

바오로가 여기서 선포하는 그리스도는 30년 전에 유대에서 죽은 사람이 아니고 그분의 성령을 육화하는 모든 믿는 이들 몸 속에서 하느님의 힘으로 살고 계시는 주님이시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은 그리스도인들이 성령 안에 살 때, 그들이 재림과 최후의 심판을 기다릴 때 미리 경험하는 영광이다.

그 심오한 진리는 전 세대에게는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나 이제는 그들의 생애에서 그것을 경험한 사람들 모두에게 알려졌다. 그것은 배울 수 있는 비밀이나, 그것을 배운다는 것은 다만 그것에 대해 듣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배운다는 것은 살아있는 유기체로의 발전과 훈련을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바오로가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관해서 이야기 할 때 그는 하늘로 가버린 사람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가 교회에서 그리스도에 대해 이야기 할 때, 그는 공동체 안을 돌아다니는, 보이지 않는 사람 같은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공동체 자체 내에 바로 그 자리에 현존하신다. 그분은 선물을 나누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내어놓는 그 자리에 계신다.

새로운 지체의 우두머리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기적이 일어난다. 주님을 새로운 일치의 중심으로 모실 때 하느님의 사랑이 쏟아져 나온다. 성령께서 교회의 힘이 되실 때 하느님의 에너지가 세상에 폭발적으로 들어온다, 마치 예수를 통해서 들어왔던 것처럼.

비록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고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신비를 결코 체험하지 못했다. 그들은 일치를 결코 알지 못한다. 이 일치는 신자들을 접합시켜 그리스도의 몸으로 만든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주님이시라는 것에 다같이 승복한 적이 없고 그분의 성령으로 함께 채워져 본 적도 없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구원의 신비이며 서로 하나가 되는 비밀이다. 이 일치는 공동체원 모두에게 생명을 주고, 그들을 치유하고 강건하게 만든다.

이 신비는 최초의 사도들이 예수님과 더불어 사는 삶을 통해서 발견했고, 예수님으로부터 배웠다. 최초의 유대인 공동체는 오순절에 성령을 받음으로써, 또 그 후에 그 성령의 힘을 받아 살아가면서 이 신비를 경험했다. 이제는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몸 속에 용해된 사람들 누구에게나 다 알려질 수 있는 신비이다.

왜 그들은 우리하고 그렇게나 다른가? 

그리스도교 정신은 본래 공동체적이다. 교회의 역사를 보면 이 진리는 공동체들에 의해서 발견되고 다시 발견되어 왔다. 주님을 찾기 위해서 광야로 나갔던 은둔자들은 서로서로 가까이 살기 위해서 점차 한데 모였다. 이 최초의 수도 공동체에서 그들은 혼자서 살 때는 발견할 수 없었던 성령의 힘과 그리스도의 현존을 발견하였다. 수세기에 걸쳐 일어난 모든 수도적 쇄신은 그동안 상실되었던 본래의 일치에 대한 재발견이었다.

성 프란시스코, 성 클라라, 그 외의 다른 많은 수도단체를 세운 사람들 주위에 모인 사람들은 공동체에서 생명과 활력을 찾았으며 이런 것들은 아주 매력적이어서 자연히 많은 사람들을 그 속으로 끌어들였다. 그것은 세상 체제에 대한 분명한 대안으로: 힘, 명예, 소유재물에 기본을 두지 않고 사리사욕 없는 공평한 하느님의 사랑에 바탕을 둔 새로운 사회질서였다.

수에넨스 추기경이 언젠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만약 하느님께서 존재하지 않으신다면 우리의 삶에 아무 의미가 없다"라고 말한 일이 있다. 이 표현은 좀 극단적이기는 하지만, 진정한 그리스도 정신에 대한 철저한 소명을 강조한다. 함께 하는 우리의 삶은 그리스도의 현존에 바탕을 두어야 하며, 사람들이 인간적으로 그것을 이해할 수가 없는 그분의 성령의 힘을 입어야 한다.

그들이 그런 우리를 보면 다음과 같이 질문해야 한다: 왜 그들은 우리하고 그렇게나 다른가? 그들은 어디서 그런 힘을 받는가? 무엇이 그들을 서로 같이 있게 하는가? 무엇이 그들을 인도하는가? 우리가 도저히 할 수 없는 그런 방식으로 그들이 살 수 있는 이유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그러한 힘과 삶을 보면 자연스럽게 거기에 이끌린다. 그들은 우리의 삶에서 성령의 증거를 보게되며 그들도 그 안에 들어오기를 원한다. 그들에게 설교를 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세례를 받기를 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분명히 본 그 대안책 속으로 들어가기를 원한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라고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로 인해서 우리가 이 새로운 방법으로 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전해 듣는 일 뿐이다.

그러나 너무나 자주 우리는 이런 살아있는 실존적인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지체들이 아닌 본당, 수도단체와 다른 가톨릭 기관들에 속해있다. 대신 우리는 광신이라는 버팀목, 안전보장의 상징들로 우리를 둘러싼다. 우리는 우리가 옳다고 말해주거나, 우리를 편안하게 해주는 온갖 것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다른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성 베드로가 사도행전에서 말한 것과 정반대로 우리는 세상에게 “우리는 금, 은을 많이 가지고 있지만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서 걸어가라고 말할 수 없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언제 바오로가 의미하는 그리스도의 몸인가? 그것에 대한 정의는 여러 가지로 내릴 수 있다. 그러나 그 대신, 세 가지 무엇인가 말해주는 표징을 확인하는 것이 아마도 더 나을 것이다.


[원출처] <성서의 위대한 주제들-신약>, 리차드 로어 & 죠셉 마르토스
[번역문 출처] <참사람되어> 2000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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