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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맙소사! ... 열성이 아니라 영성이 필요하다

[김유철의 Heaven's door]

종교란 무엇일까?

세상에는 종교가 참 많다. 당연히 각 종교를 신봉하는 종교인의 숫자도 덩달아 많아질 수밖에 없다. 종교란 말의 사전적 풀이는 ‘신이나 초자연적인 절대자 또는 힘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인간 생활의 고뇌를 해결하고 삶의 궁극적인 의미를 추구하는 문화 체계’라고 나와 있다. 그러나 종교란 한마디로 규정지어 부를 수 없는 것이며 침묵속의 수행에서 피어나는 아침안개 같은 것이다.

율곡 이이 선생은 책이나 글을 통한 가르침을 '선명'(善鳴)이라고 이야기했다. 그것은 단순히 책속에 들어 있는 글이나, 글로서 이루어진 책이 아니라 그것을 읽는 사람들에게 ‘선한 울림’이 되어 번지고 퍼지는 올바른 영향력을 의미한 것이다. 과연 지구별의 종교는 어떠한가? 인류가 만나고 깨닫고 이룩한 숱한 종교가 인류에게 그러한 선한 영향력을 미쳤는지는 필자로서는 ‘Only don't know'일 뿐이다.

 

사진출처=pixabay.com

시인 구상이 만난 하늘

지금은 세상을 떠났지만 가톨릭 시인하면 떠오르는 분이 구상(具常, 1919~2004)이다. 시인의 다양했던 사회생활과 수많은 인물들과의 교류를 통한 후일담은 다양한 관점에서 회자되고 긴 그림자가 되어 그의 삶을 그물코처럼 엮고 있다. 인생 말기 한강변에 위치한 그의 집을 관수재(觀水齋)라 이름 지어 부르며 시인은 멋스런 하얀 턱수염을 매만졌다. 세상 사람들은 그를 선생님이라 불렀지만 시인은 늘 그의 삶 그림자를 부끄러워했다. 그의 시다.

어느 시인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하고 읊었지만
나는 마음이 하도 망측해서
하늘을 우러러 부끄럽고 어쩌구 커녕
숫제 두렵다.
(‘고백’ 일부)

나는 날마다
성당에 나가듯 윤중제에 나아가 유유히 흘러가는 한강을 바라보며
걸레처럼 더럽고 추레한 내 마음을
그 물에 헹구고 씻고 빨아보지만
절고 찌들은 땟국은 빠지지 않는다.
(‘근황’ 일부)

이제 머지않아 나는
저승의 관문, 신령한 거울 앞에서
저런 추악망측한 나의 참 모습과
마주해야 하니 이 일을 어쩌랴!
하느님, 맙소사!
(‘임종고백’ 일부)

시인은 평생 자신이 걸어갔던 삶의 길과 신앙의 대상 앞에 선 마음을 ‘하느님, 맙소사!’란 시어로 가름했지만 그 외마디를 가로지르는 그림자의 깊이는 더듬어 짐작할 뿐이다. 21세기 초엽 한반도 남쪽 인구의 절반을 훌쩍 넘는 종교 인구는 그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현실의 삶과는 간격이 더욱 커질 뿐이다. 우스운 것은 각 종단이 밝힌 종교인의 수가 총인구보다 많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종교를 이중 혹은 삼중으로 등록한 것이 아닌 다음에야 어디선가 허깨비 숫자가 들어간 것임에 틀림없다.

정치인에게 종교는 필수인가?

아무튼 현재의 우리나라는 다종교국가임과 동시에 종교인의 국가임에 틀림없다. 이스라엘과 아랍권의 종교전쟁 혹은 인도와 파키스탄 등지에서 벌어지는 종교를 바탕으로 한 분쟁만 없을 뿐이지, 대도시의 지하철이나 터미널은 선교경쟁의 장소이고, 웬만한 지역에는 각 종교들이 겹겹이 포진해 있다. 그 뿐이랴, 같은 종교 안에서도 이른바 ‘내 식’으로 믿어야 한다는 교리근본주의와 타종교를 인정하지 않는 독선적인 모습도 가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다른 한편 고위 공직자와 정치인들에게는 어떤 의미에서 종교생활은 하나의 필수이기도 하다. 사실 정치권에서 종교인의 통계를 내는 일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 중에는 개신교, 불교, 천주교를 두루 섭렵하는 ‘개불천교’신자가 포함된 까닭에 각 종단이 자기네 사람으로 내세우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그들은 세상의 종교를 모두 초월한 해탈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실을 보면 해탈은 커녕 마구니에 가깝게 보일 따름이다.

 

사진출처=pixabay.com

온 몸에 가시를 박고도 해 맑은, 가시꽃을 아는가?

돌이켜 생각해보자. 종교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자랑스러움 이전에 이미 자신의 얼굴에 숯 덩어리를 올려놓았다는 말일 것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부끄러움의 연속이며, 스승의 가르침과 달리 행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자책의 그림자가 늘 따라다니는 길이다. 구상은 시인이기에 그 마음을 ‘하느님, 맙소사!’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인이기에 그런 마음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종교인은 많고 넘치지만 신앙인이 없는 세상이라고들 말한다. 더욱이 맑은 신앙인을 찾기는 더더욱 어렵다고 하지만 굳이 다른 사람을 찾을 필요가 있는가? 교회와 성당을 가는 사람들, 사찰을 찾는 사람들, 기품어린 서원에서 예를 갖추는 사람들이 종교인이 아니라 신앙인의 길로 들어서야 종교인이다. 

‘열성’이 아니라 ‘영성’이 종교창시자들의 의도를 생활로서 실천하게 하듯이, 열성의 종교인의 아니라 맑은 영성의 신앙인이 그리운 날들이다. 사랑이란 말은 이제 빛이 바래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사랑하라는 말이며, 자비롭단 말은 허공에 사라진 말이 아니라 지금여기에서 자비로워야 한다는 낮은 목소리다. 휘파람새의 맑은 소리와 물가를 노니는 도요새의 한가로운 모습에서 다가온 가을 하늘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신앙인이다. 바위틈을 비집고 올라온 동자꽃과 온 몸에 가시를 박고도 해 맑은 가시꽃을 보며 소박한 땅의 발걸음에 충실한 것이 신앙인이다.

신앙인은 깨어 있는 몸이다.

가지가 나무를 떠나서 꽃을 피울 수 있으랴
나무가 땅을 떠나서 숲을 이룰 수 있으랴
아, 내가 내 몸을 떠나서 무엇을 할 수 있느냐
밥 먹고 똥 싸는 내 몸 없이는
정의도 평화도 하느님 나라까지도
다 없는 것이다
(이현주 시 <몸> 전문>

깨어 있는 사람(몸)으로서 하늘과 땅의 만남, 그 만남 속에 통로이기를 거부하지 않는 사람(몸)이라는 존재. 아마도 그것은 선택이나 성별(聖別)된 존재가 아닌 그저 ‘있음’으로서 충만한 그런 존재일 것이다. 그런 ‘있음’으로 아름답고 내밀한 신앙인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더운 밥 한 공기 서로 나누는 것이 교리 한 구절 외우는 것보다 우선이며, 생명과 평화가 모든 경전의 마침표이길 바라는 사람들 속에서 오늘도 교회의 종이 울리고, 사찰의 운판이 화답하며, 모스크에서 맑은 기도 소리가 나온다. 얼마나 서럽도록 고마운 일인가.

 

김유철
시인. 한국작가회의.
<삶 예술 연구소> 대표

 

 

 

 

[ 가톨릭일꾼 www.catholicworker.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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