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사누스의 행복해지는 법, 불행해지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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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사누스의 행복해지는 법, 불행해지는 법
  • 유대칠
  • 승인 2017.08.14 13: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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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칠의 아픈 시대, 낮은 자의 철학 12]

누구도 불행하고 싶지 않다. 불행하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 항상 어떤 식이든 행복을 추구한다. 그 행복의 모습이 저마다 다른 모양일 수 있지만 적어도 그것이 삶의 목표인 것은 분명하다. 누군가 목숨을 걸고 정의를 위하여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면, 비록 그 삶의 모습이 남들의 눈엔 고통으로 보인다고 해도, 그의 삶에선 행복을 향한 처절한 몸부림일 것이다. 누구도 불행을 추구하진 않는다. 불행하고 싶은 사람은 없다.

행복의 모양은 참으로 다양하다. 누군가는 많은 불편에도 불구하고 봉사의 삶을 살아가며 행복을 느낀다. 또 다른 누군가는 아쉬울 게 없는 멀쩡한 의사인데도, 굳이 전쟁터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이들을 치료하는데서 행복감을 느낀다. 참으로 다양하다. 그러나 불행해지는 법은 대체로 한 가지의 형태로 정해져있다. 바로 ‘비교함’이다. 비교, 그것이 불행을 만든다.

 

Nicolaus Cusanus

니콜라우스 쿠사누스(Nicolaus Cusanus, 1401년~1464년)는 ‘비교함’에 대해 고민했다. 인간에게 직선과 곡선은 분명 다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지구는 곡선으로 이루어진 구체다. 하지만 누구도 곡선 위에서 산다 느끼지 않는다. 직선의 세상을 걷고 달리고 있다고 느낀다. 구형 위에 있다 느끼지 않는다. 사실 원을 무한히 확대하면 그 원의 둥근 모양은 점점 없어진다. 그리고 마침내 직선에 가까워진다. 그 원 위를 살아가는 작은 존재에겐 말이다.

그런데 그 작은 존재가 직선과 곡선을 비교하고 서로 다름에 대하여 자신 있게 이야기한다. 둥근 곡선 위에 똑똑한 듯이 고개를 들고 서서 자신이 직선에 서 있다 판단하면서 말이다. 자신에게 보이는 대로 그대로 믿고 어느 것도 더 좋고 덜 좋은 것이라 판단하지만, 실상 이러한 비교 판단의 이면엔 서로 다른 대립의 일치가 있었다. 직선과 곡선은 서로 남이 아니었다. 그런데 서로 남이라 생각하고 그 차이를 비교하며 살았다. 그것이 진리라며 말이다.

태초에 하느님이 창조한 세상은 아름답기만 했다. 그러나 우린 그 아름다움을 보지 못했다. 하느님이 보시기 아름답다고 하신 것을 두고, 더 아름다운 것과 덜 아름다운 것을 비교하며 산다. 어찌 보면, 비교함이 ‘더’와 ‘덜’을 만든다. 하느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것도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으로 나누어 버리는 것이 비교다. 그리고 이러한 비교라는 ‘존재론적 왜곡’을 통한 판단이 삶의 방식도 결정 지워버린다.

비교를 통하여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이는 자신 보다 덜 아름다운 이와 자신을 비교하며 만족감을 누린다. 자신이 아름답기 위해 남을 아름답지 않은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리고 그 남을 이겼다는 만족감으로 행복을 누린다. 하지만 이것도 결국 둥근 곡선 위에 서서히 직선을 예찬하는 바보와 같을 뿐이다. 비교는 실상의 원래 모습을 드러내지 못한다. 비교는 하느님조차 아름답게 본 것을 추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무서운 것이다.

 

사진출처=pixabay.com

쿠사누스가 좋아한 엑하르트는 이렇게 생각한다. 신은 나에게서 멀리 떨어져 존재하지 않으며, 바로 여기 내 안에 있고, 내가 신으로부터 떨어져 있으려 하지 않고 온전히 하느님의 작용 가운데 나의 삶을 맡기면 나란 존재는 더욱 더 신 가운데 존재하게 된다. 쿠사누스는 이런 엑하르트의 생각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나’란 존재는 절대 추한 존재가 아니다. ‘나’는 ‘하느님’ 가운데 존재한다. 하느님 역시 나의 안에 존재한다. 나의 가까이도 아니고 바로 나의 존재 안에 존재한다. 나와 하느님은 서로가 남이 아니다. 이웃이란 말로도 부족한 친밀함을 가지며, 서로가 서로의 가운데 존재한다. 너무 당연한 ‘나’란 존재는 너무나 성스럽고 아름답다.

추한 것이라곤 없다. 나란 존재도 그렇듯이 나와 다른 타인들도 하느님의 존재 가운데 서로가 하나이고 서로가 남이 아니다. 그런 성스럽고 아름다운 우리가 서로가 서로를 비교하며 판단한다. 무엇이 더 가치 있고 덜 가치 있다고 비교하고 그 가치를 판단해 버린다. 이런 생각 속에서 ‘나’란 존재는 항상 무엇인가 ‘더’ 가지고 싶은 존재다. 항상 무엇인가 ‘덜’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덜 가진 존재이기에 나란 존재는 항상 불행한 존재다.

쿠사누스는 또한 ‘다르게 있지 않음’이란 말을 쓴다. 하느님과 모든 피조물은 서로 다르게 있지 않다. 서로 남이 아니다. 하느님과 남으로 있지 않은 이 세상을 ‘더’와 ‘덜’로 나눈다. 하느님과 남으로 있지 않으며 서로가 서로를 존재론적으로 껴안고 있는 누군가를 함부로 ‘더’와 ‘덜’로 판단한다. 어쩌면 이런 비교 행위가 ‘나’란 존재를 하느님과 정말 ‘남’이 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1등도 꼴지도 하느님과 남으로 있지 않다. 하느님과 다르게 있지 않다. 오히려 이들을 비교로 나누고 그 비교에 근거하여 가치 판단하는 그 행위가 ‘불행의 만듬’이며, 하느님과 정말 남이 되는 길일지 모르겠다. 아니 그럴 것이다.

누구나 행복해지고 싶다. 그 행복이 진정한 행복이 되기 위해 누군가를 꼭 이길 필요는 없다. 누군가를 ‘덜’로 만들고 자신을 ‘더’로 만들면서 살아갈 필요는 없다. 그저 자기 삶에 작은 미소가 된다면, 그것으로 이미 충분하다. 작은 미소, 그 미소의 행복에 충실하자. 그 작고 은은한 미소는 하느님과 다르게 있지 않은 지금 자신의 모습이며, 하느님 가운데 존재하는 자기 존재이며 하느님과 서로가 서로를 껴안고 있는 가장 소중한 행복의 모습일 수 있기에 말이다. 그리고 이제 서로를 그만 비교하자. 제발 더 이상 불행을 만들지 말자.

 

유대칠 암브로시오
중세철학과 초기 근대철학을 공부한다. 
대구 오캄연구소에서 고전 세미나와 연구, 번역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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