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각: 매순간 내게 다가오는 하느님 어떤 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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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각: 매순간 내게 다가오는 하느님 어떤 분인가?
  • 죠안 치티스터
  • 승인 2017.07.24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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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을 찾는 이들을 위한 지혜-2

한 형제가 세티스의 암자에 있는 모세 원장을 찾아가서 좋은 말씀을 해달라고 간청했다. 그러자 나이든 원장이 말했다:
"가서 당신의 방에 앉아있으시오. 그러면 당신의 방이 모든 걸 가르쳐 줄 겁니다.”

바로 앞에 있는 것을 우리는 거의 보지 않는다. 우리는 방에 있는 식물에 대하여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우리는 밤이 다가오는 것에 대하여 아무런 주의도 기울이지 않는다. 우리는 이웃의 얼굴에서 어떤 초대의 기색을 놓친다. 우리는 그저 행동 속에서만 우리자신을 보고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상황, 배경은 보지 않는다. 그 결과 우리는 모든 상황 속에 들어갈 때와 똑같이 모든 상황들로부터 빠져나오는 위험을 저지르고 있다.

당연한 것들에 주의를 기울이고, 우리의 심금을 울리게 하는 색깔들, 우리의 관심을 애타게 갈망하는 모양들, 우리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의 얼굴 표정을 보는 것을 배우는 것이 관상의 시작이다. 그런데 이런 모습들은 익숙함 때문에 희미해지고 익명성으로 인해 지워지므로, 처해있는 상황 속에서 우리는 산만스러운 자신들을 볼 따름이다.

그러나 현재의 힘을 자각하는 철저한 몰두와 집중은 관상적 삶의 정수이며 모든 관상적 전통에서 발견되는 공통점이다. “오! 경이들 중의 경이여!” 이슬람교의 신비가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나무를 자른다, 우물에서 물을 긷는다.” 나는, 다른 말로 하자면, 현재에 살고 있다. 지금 내가 '하느님의 현존 속에 있는 나'임을 알고 있다.

사진출처=pixabay.com

베네딕또회의 규칙은 이렇게 말한다.

“겸손으로 가는 첫 걸음은, ‘우리들의 눈앞에 늘 현존하시는 하느님께 대한 존경심을 유지하고’ 절대로 잊지 않는 것이다.”

삶 속에 있는 모든 것을 거룩하게 보는 것이다. 이러한 가까움은 우리 안에 있는 어떤 것을 불러낸다. 이 나무는 우리 안에 있는 어떤 느낌을 일으킨다. 이 일은 우리 안에 있는 희망에 닿는다. 실상 삶의 모든 것은 어떤 것에 대해 우리에게 말해준다. 다만 이 특별한 상황 속에서 이 특별한 순간에 주변의 세계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자신에게 물을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영혼의 모판으로 향하게 되는 것이다.

자각할 때에 우리는 우주와의 만남에 들어간다. 자각은 모든 관계들을 파헤치며, 모든 사건 모든 순간 속에서 외적인 의미 밑에 있는 더 깊은 의미들을 노출시킨다. 문제는 방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보다 그런 일 때문에 나에게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가 이다. 나는 그렇지 않으면 볼 수 없는, 여기에서 어떤 하느님을 보고 있는가? 내 삶의 모든 사건, 모든 상황, 모든 사람들을 통하여 하느님은 나의 마음에 무엇을 청하고 계시는가?

히틀러의 수용소들 중의 한 곳에 갇혀있던 유대인 죄수인 에티 힐섬은 독일 간수들 안에서 선함을 보았다. 그것이 관상이며, 그런 태도가 하느님이 보시는 것처럼 보려는 의지이다. 그런 태도는 어려움, 지루함, 사악스러움, 함정의 상황 등을 변화시키지 않지만, 그런 상황에 대한 우리 마음의 움직임, 우리 자신의 응답의 질, 우리의 이해의 깊이를 변화시킬 수는 있다. 이러한 자각이 없다면 적들은 영원히 적으로만 남아 있으며 삶은 영원히 지루한 것이 되어버린다.

내가 살고있는 세계를 참으로 알게 될 때까지 나는 상황으로부터 더 자유롭게 될 수 없으며 단순히 실제 상황에 대한 윤곽만 그리면서 시간만 냉소적으로 보내는 삶을 살게 된다. 내 앞에 놓인 상황 속에 현존하는 하느님을 참으로 알아듣기까지에는 일생이 걸린다. 대부분의 삶은 안개 속에서, 구름 뒤에서, 어둠을 넘어 하느님을 보려고 애쓰며 보내게 된다. 우리가 서로에게서, 창조 속에서, 순간 속에서 하느님을 보게될 때 진정한 영적인 여정이 시작된다.

삶의 모든 것은 나의 피상적인 자아를 넘어 참다운 자아를 향하여, 궁극적 선인 하느님께로 나아가기 위하여 존재한다. 그러나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기 전에 나는 나 자신 안에서 깨어있어야 한다. 나는 삶의 모든 것에 대해 질문을 던져야한다: 이것은 삶에 대해 무엇을 나에게 말해주고 있는가? 왜 물어야 하는가? 왜냐하면 삶의 모든 부분에 대하여 깊게 보는 것을 그칠 때 우리의 영혼은 이미 죽었기 때문이다.

관상하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나는 모든 것에 대하여 항상 물어야한다: 그곳에서 나에게 다가오는 하느님은 어떤 분인가?


[원출처] <Illuminated Life, Monastic Wisdom for Seeker of Light>, Joan Chittister
[출처] <참사람되어> 2000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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