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을 찾으세요, 하느님 계신 곳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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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을 찾으세요, 하느님 계신 곳이 아니라..."
  • 죠안 치티스터
  • 승인 2017.07.16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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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을 찾는 이들을 위한 지혜-1

[죠안 치티스터는 “세상에서 살지만 세상으로부터 살지 않기 위하여” 우리가 알아야 할 것들에 빛을 던져줍니다. 그는 오랜 시간의 시험에도 불구하고 견고하게 살아있는 영적인 길을 제시해 줍니다. 이 책은 죠안 치티스터(Joan Chittister) 수녀(분도회)가 쓴 <Illuminated Life, Monastic Wisdom for Seeker of Light>(메리놀회의 올비스 출판사 발행)를 <참사람되어>에서 번역한 것입니다. ]

영성은 혼돈 앞에서 관상하는 것

이 책은 당신의 삶에 대해 말하고 있다. 당신은 당신의 삶이 복잡하고 걱정꺼리로 가득하기에 영적이지 못하다고 두려워한다. 당신은 영성이 삶의 압력들로부터 탈출하기에 성공한 사람들의 영역이라고 단정한다. 그러나 이러한 물러남이 영적인 삶의 정수라고 한다면 지금까지 영적인 현인이라고 여겨지는 모든 사람들의 삶은 잘못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이 책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 전에 영적인 삶을 추구했던 이들이 관상적 삶의 주요한 요소들이라고 말하는 특징들에 관한 책이다. 그리고 당신도 파악하게 되겠지만, “탈출”은 이러한 오랜 전통의 영적 삶의 입문에 있어 필요한 요소가 아니다.

전통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바에 따르면, 참으로 영적인 사람은  영성이 어떤 진공의 삶이 아니라 어떻게 충만한 삶을 살 것인가에 대한 것임을 알고있다. 진정한(실제적인) 영성은 온전함에 대한 누룰 수 없는 추구에 의해서 빛을 발하는 삶이다. 영성은 혼돈 앞에서 관상하는 것이다. 그것은 충만된 삶을 사는 것이다.

우리가 삶에서 가지는 것은 생명뿐이다. 물건들-자동차. 집, 교육, 직업, 돈-은 오고 가는 것이며 우리의 손가락 사이에서 먼지가 되어버리며 변하고 사라진다. 물건들은 생명, 삶을 만들지 않는다. 삶의 선물, 삶의 비밀은 그것이 안으로부터 바깥으로 나와 발전되어야 한다는 것이며 우리 안으로부터 바깥으로 나오는 것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사진출처=pixabay.com

보여지는 것 이상을 넘어서는 삶

삶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수집하거나 소비하는 것으로부터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며, 그 과정 속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것으로 만들어지지도 않는다. 삶을 만들거나 파괴시키는 것은 상황이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어떤 위치의 상실, 꿈의 종말, 친구의 증오로부터 살아남은 사람은 누구나 이 사실을 알고 있다.

우리들의 삶의 질을 결정하는 것은 삶의 모든 상황들, 특별한 순간이나 일상적인 순간들, 결정적인 순간이나 단조로운 순간들을 살아가는 우리의 방식이다. 부유한 사람들은 자주 매우 불행하다. 가난한 사람들은 또 자주 더할 나위 없이 만족해한다. 나이 든 사람들은 젊은이들이 삶에 대해 아직 배우지 못한 어떤 것을 알고 있다. 여성들은 남성들과 다른 삶의 관점을 갖고 있다. 젊은이들은 나이 든 사람들이 갖지 못한 희망을 지니고 있다. 남성들은 삶에 관하여 여성들이 이제 겨우 배우기 시작한 어떤 감각을 갖고 있다.

그렇지만 그들 모두, 그들 각자-우리각자-는 삶을 풍요롭게 혹은 빈약하게 살아갈 어떤 자유의 범위를 갖고 있다. 참으로 역설적이게도 풍요로운 삶 혹은 빈약한 삶은 어떤 결정의 문제이다. 그리고 결정은 바로 우리에게 속한 것이다.

수세기전에, 보여지는 것 이상을 넘어 삶을 살고자 했던 몇몇 남성들과 여성들이 삶의 방식, 가치관들, 정신의 자세, 그리고 삶에 생명을 불어넣기 위하여 겪어나가야 할 방식들을 발전시켰다. 수도적 지혜를 터득했던 이러한 사람들은 모든 세대에게 온전한 삶이 필요로 하는 어떤 균형을 다시 확신시켜주었다. 이 책은 바로 그런 가치들에 관한 것이다. 그러한 자세들, 영감과 통찰들은 오랫동안 시도되어 왔고 진실임이 밝혀졌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통찰들은 모든 상황 속에서 모든 사람들이 발전시킬 수 있다. 이러한 지혜들은 우리가 어떻게 자세를 가다듬을 수 있는지. 삶을 어떻게 잘 살 수 있는지, 보이는 삶을 넘어 그 이상의 삶을 어떻게 볼 수 있는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자질들은 우리 모두에게 가능한 것이다. 그것들은 혼돈가운데에서 우리로 하여금 관상가들이 되게 한다.

사진출처=pixabay.com

성찰이 부족해서 죽어가는 영혼 

시간은 우리를 압박하고 관상가들이 되기에는 우리가 너무나 바쁘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들은 더 잘 알고 있다. 영혼은 성찰이 부족해서 죽어가고 있다. 책임들이 우리를 괴롭히고 영적인 문제에 관심을 갖기에는 우리가 “진짜” 세계에 너무 깊이 개입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공적인 책임들에 대처하는 방식에 변화를 가져오는 것은 항상 영적인 질문들이다. 결혼, 사업, 아이들, 직업 등은 모두 관상을 바깥으로 펼치기 위하여 있는 것들이다.

우리는 시달리는 어머니들, 화를 잘 내는 아버지들, 야망이 있는 회사간부들, 경쟁하는 직업인들, 가난한 여성들, 병든 사람들보다 더 관상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이런 삶의 일들에는 본래 영적인 차원이 없는 것처럼 여기며 행동한다. 그러나 삶의 이런 모든 상황들 속에서 우리는 성찰, 이해, 의미, 영혼의 평화를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필요로 한다.

삶의 모든 상황들, 모든 때에 사람들은 이러한 필요를 깨닫고 있으며 가장 사악한 때와 상황 속에서도 하느님의 현존을 추구하여왔다. 이 책은 이러한 노력들을 다시 기억하고 현재에 그것들을 적용하고자 한다.

삶이라는 신비

종교는 예식, 도덕, 사상체계에 대한 것이며 그 모든 것들은 좋은 것이나 불완전하다. 영성은 거룩한 것을 의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의식 속에서 전망이 생기고, 평화가 다가온다. 그러한 의식 속에서 인격체는 온전함에 도달하게 된다.

삶은 견뎌야할 어떤 연습이 아니다. 삶은 펼쳐져야 할 어떤 신비이다. 삶은 그것을 사는 것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삶에 대한 우리의 자세, 그리고 우리에게 다가오는 매 순간으로부터 우리가 이끌어내는 이해들이 삶의 가장 평범한 순간들에 우리가 표현하는 영혼의 깊이를 구성한다. 이러한 자세와 이해들이 우리 삶의 질을 가름한다. 진실은 우리 모두가 이 지상에서 실제로 소유하는 유일한 물품이 바로 삶이라는 것이다. 이 우주에서 아무리 보잘 것 없더라도 우리가 실제로 어떤 영향을 미치는 것은 바로 삶 하나뿐인 것이다.

바쁜 세상이다. 때로는 공포를 느낄 정도로 바쁜 세상이다. 우리는 그 속도와 억압이 우리를 소모시키고, 우리의 영혼을 고갈시키며 우리의 마음을 메마르게 하는 세계에 살고 있다. 또한 그 세계는 우리의 영을 죽이고, 살아가는 것을 어떤 즐거운 신비라기보다는 일련의 의무들로 만들어버리는 곳이다.

우리는 전화 응답을 하고 물건을 사며 빨래를 하고 좁고 시끌법석한 거리를 달려가며 심부름을 하고 일상적인 일에 삐걱거리며 모임에 가고 끝없는 질문들에 대답하고 반복적인 행동을 하고 줄서기를 하며 긴 시간을 출퇴근 왕래에 쓰며 이어 너무나 늦게 잠에 곯아떨어진다. 이렇게 밤낮을 되풀이하며 지내고 있다. 하루가 끝날 때 우리는 눈을 감고 도대체 삶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의아해 한다.

우리는 정원을 가꾸느라 너무나 피곤하고, 읽느라고 너무나 분주해하며 말하느라고 너무나 바쁘다. 사람들에게 너무나 시달리며 우리의 삶은 마감시간에 뜯어 맞추느라고 너무나 괴로우며 우리의 미래에 대해 생각해보고 현재를 고민하느라고 힘들다. 우리는 매일매일을 이렇게 되풀이할 따름이다.

이 모든 소용돌이 속에서 인간이 된다는 의미는 어디에 있을까? 그 모든 것 속에 하느님은 어디에 계신가? 만일 삶 그 자체가 삶에 대한 가장 큰 장애물이 될 때 우리는 어떻게 삶으로부터 가장 좋은 것을 얻을 수 있을까? 우리의 보잘것없는 작은 삶을 난장판으로 만드는 이 사적인 혼돈 한 가운데에서 영적이 되고 관상적이 된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현재 우리가 사는 방식으로밖에 살 수 없는 때에 또다른 방식의 삶의 모형을 찾기 위하여 우리는 어디로 갈 수 있는가?

사진출처=pixabay.com

빛을 받은 삶은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

사막의 은수자들은 4세기 이집트의 광야에서 홀로 살며 삶의 문제들과 씨름하였고 그 기반에 곧장 닿았으며 삶의 진실을 시험해보고 지혜를 추구하는 다른 이들에게 그들의 지혜를 전해주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은수자들의 단출하고도 청빈한 삶에서 차이를 발견하였고 명백한 박탈과 황폐로부터 무엇이 이러한 차이를 만들어주는지 묻기 위하여 그들의 작은 수도원들을 찾아 고된 여행길에 올랐었다.

사막의 영적인 교부들과 교모들은 다가올 세대가 의지하여 살아 갈 말씀들을 남겼다. 15세기가 지난 후에도 여전히 그들의 말은 시간 속에서 울리며 우리 모두에게 그것을 지침과 횃불로 받아들이라고 요청한다. 그것들은 가장 소란스럽고 가장 억압을 많이 받으며 가장 목마른 우리들에게 깊이와 의미와 행복을 가져오는 일련의 가치들이다.

빛을 받은 삶은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이다. 우리의 삶에 양분을 주기 위하여 영적인 기교나 심리학적인 임시변통제를 그만 찾으라고 요구한다. 그들의 삶은 시간의 시험을 견뎌낸 영적인 방향을 다시 한번 기억하라고 청한다. 우리주변과 상황을 지배하는데 온통 몰두하는 대신 마음의 파편과 잔해들을 정리하기 위하여 우리자신 안으로 들어가라고 청한다.

영혼의 눈으로 현재를 보도록 우리를 이끌며 그럼으로써 우리는 모든 삶이 그 자체 곳에 지니고 있는 천국을 일견할 수 있게 된다. 그들의 삶과 지혜는 우리자신 안으로 우리를 이끌고 또한 동시에 우리자신으로부터 나오도록 인도한다.

씨소에스 교부는 이렇게 말했다: “하느님을 찾으십시오, 하느님이 사는 곳이 아니라.” 우리는 하느님의 움 속에서 살고 숨쉬며 자라고 성장해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느님을 다른 곳에서 찾는다 - 어떤 정해진 자리에서,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산꼭대기와 동굴 속에서, 정해진 날자와 특별한 예식을 통하여. 그러나 빛으로 충만한 삶은 하느님이 그런 곳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바로 여기에 계심을 알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그분을 받아들이기를 바라신다. 그렇다면 유일한 문제는 어떻게 그분을 받아들일 것인가 이다.
 

[원출처] <Illuminated Life, Monastic Wisdom for Seeker of Light>, Joan Chittister
[출처] <참사람되어> 2000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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