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민] 시골살이 초입에서, 수행자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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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민] 시골살이 초입에서, 수행자처럼
  • 한상봉
  • 승인 2017.07.11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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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의 [모든 삶은 장엄하다]-11

겨울엔 털신, 여름엔 고무신

1994년 12월호 <해인>지에 ‘털신’에 관한 글이 짤막하게 실려 있었다. 더위가 한창인데 때 이르게 털신을 이야기하는 것은 어처구니가 없을 것이다. 아마도 소탈하고도 따뜻한 인정이 그리운가 보다. 평소 나이만큼 철들지 못했다는 평을 듣곤 하던 나에게, 자못 사람의 냄새가 기다려지나 보다.

"어둠과 함께 숨죽인 산사의 고요함을 새벽 도량석 목탁 소리가 일깨운다. 어제 어스름한 해거름부터 내리기 시작한 하얀 눈이 잎사귀 떨어진 자리에 틀고 앉아 앙상해진 가지를 하얗게 애워싼다. 늙은 소나무는 눈의 무게에 짓눌려 우두둑 가지를 털어 내고 빈자리에 눈을 받아 낸다. 토방에 벗어 놓은 털신에도 눈이 가득하다. 산 속 눈밭에서의 털신은 바라만 보아도 가슴이 훈훈해진다.

깊은 산사의 댓돌 위에 가지런히 놓여져 있는 하얗게 빛나는 고무신은 수행자의 영광이다. 또한 마루 밑에서 진흙을 뒤집어쓴 채 뒹굴고 있는 검정 고무신은 농부의 고단한 훈장이다. 누군들 정갈한 사람을 원하지 않겠느냐마는 너무 때깔 나는 신발은 어쩌면 일하는 자의 부끄러움일 수도 있으리라."

예전에 충북 괴산에 사는 친구한테 놀러 간 적이 있었다. 마침 무슨 유기농 하는 공동체 사람들 회의가 있는 날이었다. 어쩌다 동석하고 보니, 아는 얼굴이 꽤 있었다. 회의 끝물에 간 탓에 얼마 지나지 않아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참으로 곤혹스러운 광경이 연출되었다. 대청마루 밑에 검정 고무신들이 놓여 있는데, 도무지 어느 것이 누구 신인지 구분이 되질 않았다. 그러나 이네들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닥치는 대로 대충 발이 맞는가 싶은 고무신을 골라 꿰어 신고 나가는 것이었다.

신발이란 공유하기 까다로운 물건 중의 하나일 법한데, 모양도 색깔도 비슷비슷한 고무신이라 그런지 자연스레 제 것 네 것이 없었다. 그렇게 땅바닥에서 코 맞대고 뒹굴다가 닥치는 대로 주인을 새로 맞이하는 신발들의 심경은 어떠할까? 아마도 이 고무신들은 저희 주인들처럼 서로가 다정한 ‘고무신 사이’였을 것이다. 혹시 그네들은 마루 밑에서 이번엔 누가 저를 신고 나가는지 내기를 걸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시골집에서 상용하는 내 신은 흰 고무신이고, 아내의 신은 검정 고무신이다. 그렇게 확연하게 구별되는 색깔 탓에 우리 집 고무신들은 주인을 바꾸어 모실 기회를 원천적으로 박탈당했다. 하기사 발 크기가 워낙 다르니 색깔이 아니더라도 그네들은 평생 일부종사해야 할 팔자다.

내가 경험한 고무신의 장점은 무엇보다도 땅의 굴곡을 발바닥으로 느끼며 걸을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황토 흙이 좋다고 점잖은 체면에 맨발로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고, 대충 걷다 보면 틈새로 기어 들어오곤 하는 흙먼지를 발바닥으로 음미하면서, 적당한 곳에서 찬물로 발과 신발을 헹구어 내는 시원함도 맛깔스런 풍취가 아닌가. 시골 사는 맛은 그런데 있는 것일까? 허름한 윗도리와 헐렁한 아랫도리가 어색하지 않고, 황토 빛에 물들어 버린 고무신과 텁텁한 털신이 오히려 자연스런 행보를 받쳐 주는 것말이다. 그러고 보면 의식주의 거침없음이 시골 생활이 주는 보람이요, 또 다른 의미의 자유를 거저 얻어 주는 것이다.

백화점에 가 보라. 다종다양한 신발들이 허다하게 쌓여서 주인을 기다린다. 어떤 이들은 개성에 따라 맘껏 골라 신을 수 있으니 좋을 것이라고도 하나, 세상 인심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는 않다. 진열대를 둘러보며 제법 고상하고 멋스러운 신발을 골라 놓으면 다 제 값을 한다. 서울 살 때 가끔 구두 티켓이 수중에 들어오는 날이면 백화점에 가곤 했었다. 이왕이면 할인 판매할 때를 기다렸다가 집을 나서는데, 막상 진열장에 서면 할인 품목들은 마음에 드는 물건이 별로 없고, 할인 품목이 아닌 구두 쪽으로 자꾸 눈길이 간다. 구경만 잔뜩 하다가 결국은 마음에 썩 내키지는 않지만 값싼 할인 품목에서 신발을 골라 집으로 돌아온다.

이쯤 되면 집을 떠날 때의 기분과 백화점 문을 나설 때의 기분은 영 딴판이 된다.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고, 워낙 간사하기 이를 데 없는 마음이란 것이 눈만 높게 만든 신발 때문에 잔뜩 구겨지고 마는 것이다. 그게 자본주의요, 그게 상술이다. 대개 웬만하면 맘에 드는 신발 때문에 티켓에 웃돈을 얹어 억울한 듯 돈을 지불하고 마는 게 고객의 허점인 까닭이다.

신발 하나에도 자본의 입김이 서려 있고, 얄궂은 인생사가 드리워져 있음은 참으로 안쓰럽고도 서글픈 현실이다. 그러니 검정 고무신 하나로도 넉넉함을 잃지 않아도 좋은 곳은 참으로 안전하고 믿을 만한 곳이다. 사실 더 깊숙이 보면 세상이 날 속여 넘기는 것이 아니라, 내 눈과 내 마음이 날 속여 넘기고 있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속이지 않아도 좋을, 속여 넘기지 않아도 좋을, 그렇게 담백하고 줏대 있는 생활의 원칙이 세세대대로 몸에 배일 수 있다면 그 누군가의 말마따나 적게 소유하고 많이 존재할 수 있으리라.

사진=한상봉

이승에서 걸망을 벗을 수 있다면

털신을 신는 상상만으로도 즐거운 산중의 하루를 생각해 본다. 얼마 전 우리 가족은 전북 무주에 자리를 얻었다. “1999년 서울 탈출”을 꿈꾸던 우리 가족은 반년 동안 경북 예천(醴泉)에서 상주(尙州)로, 상주에서 전북 무주(茂朱)로 옮겨다니느라고 무던히 끙끙거렸다. 터잡은 곳은 무주에서도 골 깊은 산중이다. 수행자들이 선지식(善知識)이 머물러 있을 듯한 물이 좋다는 산사(山寺)를 찾아 헤매듯이, 우리도 물 좋은 계곡을 더듬거리다 인연이 닿은 땅을 발견한 것이다. 그 산중에서는 우리는 첫 겨울을 보낼 것이다. 겨우내 털신을 끌고 다닐 땅이 푸근하게 우리를 안아 주기를 기대하면서 말이다.

수행자들이 짊어지기 적당한 걸망을 지고 산사를 헤매듯이, 우린 우리의 빛깔에 어울리는 작고 가벼운 걸망을 등에 지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것이다. 땀이 등짝에 포옥 배겨 나는 정도만 일을 하면서, 이듬해 2000년 봄에 씨 뿌릴 현장을 둘러보며 내내 기다려 오던 옷깃을 풀어헤칠 것이다.

그건 내 몫이 아냐, 하며 만류하던 분들의 말마따나 2000년에 나를 기다리고 있을 노동의 계절은 그리 만만치 않을 것이다. 가벼운 걸망을 열어 보고 “준비가 덜 됐군” 할지도 모른다. 서둘러 서울을 빠져나올 줄만 알았지, 객지에서 고생하게 될 줄은 미처 몰랐을 거라고 타박할지도 모른다.

수행자들을 운수납자라고 하는 것은 그저 바람 따라 구름 따라 떠돌기만 하라고 그리 부르는 게 아니다. 그네들의 여로는 뚜렷한 종착지가 있는 법이다. 깨달음의 바다를 보고자 함이다. 그리고 바다에 대하여 뭍에 사는 백성들에게 일러 주고 준비시키는 것이 그네들의 사명이다. 이른바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堤 下化衆生), 위로는 진리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구제하리라는 목표가 없다면, 그네들의 떠돌이 생활이 무색해진다.

‘고뇌하는 표정과 빛나는 눈빛’을 지닌 수행자들도 깨달음의 바다가 아득히 멀리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 내게 고뇌하는 표정이 있는가? 진리를 바라보는 형형한 눈빛이 있는가?

다섯 배로 늘어난 업장의 무게

고무신이든 털신이든 발에 맞는 그 무엇이든 꿰어 신고 집 나설 몸 가벼움이 있는 자는 복되다. 바랑 하나에 인생의 짐을 모두 부려 놓을 수 있는 몸 가벼움. 우린 항상 이삿짐을 쌀 때마다 곤혹스러웠다. 단칸방에서 시작한 살림이 이젠 두 칸을 채우고 있다. 개중엔 책이 차지하는 비중이 제법 크지만, 어찌 되었던 이삿짐의 무게는 내 업장의 무게에 비례할 것이다.

내가 오늘 더 공부할 것이 남아 있다면, 전생에 지혜의 눈을 덜 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승에서나마 그 부족한 지혜를 채우라는 업을 유산처럼 받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나처럼 책을 읽어도 부덕한 사람들은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처음 동암 지하 셋방에서 부천으로 이사할 때는 1톤 자리 포터 한 대면 충분했다. 그러나 7년 후 상계동에서 상주로 이사 올 때는 5톤 박스 차량을 불러야 했다. 업장의 무게가 다섯 배로 늘어버린 것일까? 참으로 내 영혼 앞에서 면목 없는 노릇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바랑’ 하나면 족할 수행자들은 업장이 얇은 사람들이다. 이승에서 남아 있는 그 바랑만 치워 버릴 수 있다면 인생 공부 졸업이기 때문이다. 인생 공부 졸업을 ‘해탈’(解脫)이라고 부르는 것은 다 그런 뜻에서 붙여진 개념이 아닐까? 해탈이란 곧 ‘풀고 벗어 버림’이기 때문이다. 이승에서 굳은 각질을 벗어 버리면 다음 생애에선 그만큼 몸 가벼울 수 있으리라.

몸 가볍게, 그래서 나를 고집하지 않고 너 안에서 나를 발견하고, 나 안에 있는 무수한 너를 만나는 ‘큰 자유’를 얻고자 함이 인생의 마지막 화두가 아닐까? 물처럼 구름처럼 바람처럼 부드러우나 거침없이 세상을 뒤덮는 기운으로 살아가게 되는 게 아닐까? 불의한 아합 왕과 대적하던 예언자 엘리야가 호렙 산에서 발견한 하느님은 돌풍과 불길이 지나간 뒤의 적막(寂寞) 속에서야 모습을 드러내는 분이었다.

야훼께서 지나가시는데 크고 강한 바람 한 줄기가 일어 산을 뒤흔들고 야훼 앞에 있는 바위를 산산조각 내었다. 그러나 야훼께서는 바람 가운데 계시지 않았다. 바람이 지나간 다음에 지진이 일어났다. 그러나 야훼께서는 지진 가운데도 계시지 않았다. 지진 다음에 불이 일어났다. 그러나 야훼께서는 불길 가운데도 계시지 않았다. 불길이 지나간 다음 조용하고 여린 소리가 들려 왔다. 엘리야는 목소리를 듣고 겉옷자락으로 얼굴을 가리고 동굴 어귀로 나와 섰다. 그러자 그에게 한 소리가 들려 왔다. “엘리야야, 네가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1 열왕」 19: 11∼13)

내가 지금 뭘 하는지 알려면, 먼저 마음자리를 가라앉혀야 한다. 하느님께서 돌풍 속에도 불길 속에도 계시지 않았던 것처럼, 생의 진실을 탐구하려는 자는 마땅히 마음 한구석에 들고나는 상념들이 잦아들 때까지 기다리는 여유가 필요하다. 그러나 마음만큼 생활도 ‘간단’(簡單)해야 한다. 너스레 속에서 건질 말이 별로 없듯이, 장식이 많은 생활 속에서 정작 목숨을 살리는 일은 번거로워지기 쉽다. 그러므로 해탈이란 목적이면서 방법이다. 길에서 풀고 벗어야 집에 들어서도 속박이 없다.

엘리야가 침묵 속에서 하느님의 속삭임을 경청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거친 ‘산중’에 있었기 때문이다. 시장 바닥에서야 그 음성을 들을 재간이 없다. 그렇게 엘리야는 태생으로부터 ‘야인’(野人)이었다. 허리에 가죽띠를 두르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으며 살았다는 세례자 요한은 엘리야에게서 모범을 찾았고, 그의 예언을 따라갔다. 엘리야에겐 벗어 버릴 바랑조차 없었다. 맨몸으로 하느님에게만 기대어 세상이란 험악한 바다를 건너갔다.

사진=한상봉

머무름 또는 떠나기 위해

신라 성덕왕 때 우리말로 ‘노골부들’이라는 이름과 ‘단단빡빡’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 한자로는 ‘노힐부득, 달달박박’이라고 쓰지만, 향가 풀이로 하면 ‘노골부들, 단단빡빡’이라 해도 좋다. 우리말 뜻으로 보면 ‘노골부들’은 노골노골 부들부들 오르내림이 자재로워 약동하는 성품을 이르는 말이고, 단단빡빡은 절도를 지키기에만 고심하여 고지식한 품성을 지닌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삼국유사> 「남백월이성」(南白月二聲)을 보면, 그네들에 얽힌 이야기가 전해진다.

선천촌(仙川村)이란 마을에 살았던 노골부들과 단단빡빡. 두 사람은 모두 풍모가 비범했고 서로 친한 벗이었다. 두 사람이 모두 이십대의 젊은 나이에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으나 또한 처자식은 거느리고 살았다. 하루는 두 사람이 자신들의 처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농사가 잘 되어도 자연이 스스로 풍요한 것에 미칠 수 없다. 아내와 다정해도 앵무새 한 쌍의 즐거움에 미치지 못한다. 하물며 진리를 깨우쳐 부처가 되고자 하는 우리가 세속의 무리와 다름없는 생활에 얽매여 있어서야 되겠는가?” 이리하여 그들은 가족과 마을을 떠나 백월산 계곡으로 들어갔다.

단단빡빡은 계곡의 북쪽에 암자를 짓고 아미타불이 되고자 염원했다. 노골부들은 남쪽에 암자를 짓고 미륵불이 되고자 힘썼다. 그런데 어느 날 저녁 무렵 이 산 속에 길을 잃은 한 젊은 여인이 나타났다. 용모가 아름답고 향기를 풍기는 이 여인은 먼저 북쪽 암자에 찾아가 딱한 처지를 말하고 하룻밤만 암자에서 자게 해 달라고 애원했다. 그러나 빡빡은 문을 닫고 들어가 버렸다.

여인은 다시 남쪽 암자로 가서 같은 사정을 말했다. 부들은 여인의 청을 거절하지 못했다. “이 암자는 여인이 들어오는 데가 아니지만, 산골짜기가 이미 어두워졌으니 홀대할 수가 없구려. 먼저 중생을 돌봄이 보살도에 맞을 것 같소.” 이렇게 말하고 부들은 여인을 암자 안으로 들어와 자게 했다. 그리고 자신은 마음을 맑게 하고 계속 염불을 하였다.

밤이 깊어지자 여인은 갑자기 아기를 낳았다. 부들은 여인에게 짚을 깔아 주고 목욕물을 데워 주었다. 실은 이 여인은 두 스님의 수도하는 자세를 시험하러 온 관음보살이었다. 보살의 도움으로 부들은 금빛을 발하는 미륵불이 되었다. 이튿날 새벽에 빡빡은 남쪽 암자를 엿보러 찾아갔다. “부들이 지난 밤에 필경 파계를 했겠지.” 비웃어 줄 심산이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성불해 있는 부들로부터 경위를 듣고 자신이 야박했음을 한탄했다. 부들은 옛 우정을 생각해 빡빡도 도와 주었다고 한다.

해탈의 방법이야 여러 갈래가 있겠지만, 이 이야기는 해탈의 목적과 방법을 ‘연민’에서 찾는다. 해탈의 목적이 중생을 불쌍히 여기고 구제하는 것이라면, 해탈의 방법 또한 불쌍한 중생을 구제하면서 성취된다는 것이다. 그 유연한 마음이 인간을 천상으로 인도한다. 왜 하필 노골부들을 정작 구원하러 온 분이 여인으로 환생한 관음보살이었을까? 아마도 엄격한 부성(父性)보다는 품어 안는 모성(母性)이 좀더 거룩한 종교의 속성에 가깝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가여운 목숨을 구하는 일이라면 언제 어디서든지 짚고 자리 털고 일어날 수 있는 발심(發心)이 필요하다는 뜻일 게다.

신발장을 두리번거릴 필요가 없다. 그냥 발에 걸리는 대로 신고 나가는 소탈한 마음, 바랑 하나만큼만 소유하기로 작심(作心)하지 않고는 머무름이 죄가 되고 업이 되고, 다시 홀연히 길 떠나는 수행자가 되지 못하는 까닭일 것이다. 서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고, 누우면 자고 싶은 게 사람 맘이 아니던가. 무주(茂朱)를 무주(無主)로 읽고 싶은 이 중생은 머무름이 오히려 불안한지도 모른다. 흙이 되려고 가지만, 흙에 머무르지 않는 것 또한 필요하다는 이치일 것이다.


[출처] <연민>, 삼인, 2000. 이 글은 제가 삽십대 중반 <공동선> 편집장 시절에 쓴 글입니다. 그러니까, 벌써 20년이 되었군요. 세월이 흘러도 마음과 생각의 갈피는 달라지지 않는 모양입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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