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민] 내 가보지 않은 한쪽 바다는
상태바
[연민] 내 가보지 않은 한쪽 바다는
  • 한상봉
  • 승인 2017.07.04 02:0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상봉의 [모든 삶은 장엄하다]-10

아직 서해엔 가보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당신이 거기 계실지 모르겠기에

그곳 바다인들 여느 바다와 다를까요.
검은 개펄에 작은 게들이 구멍 속을 들락거리고
언제나 바다는 멀리서 진펄에 몸을 뒤척이겠지요.

당신이 계실 자리를 위해
가보지 않은 곳을 남겨 두어야 할까 봅니다.
내 다 가보면 당신 계실 곳이 남지 않을 것이기에.

내 가보지 않은 한쪽 바다는
늘 마음속에서나 파도 치고 있습니다.

이성복 님의 「서해」라는 시입니다. 님은 바다를 두고 노래한 것을 저는 땅을 두고 노래합니다. 이윽고 마침내 ‘어쩌면 당신이 계실지 모르는’ 땅을 저는 찾아갔던 것입니다. 정작 그분이 거기 계실지 아무도 모릅니다. 아니 어쩌면 그분은 처음부터 거기에 계시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분은 여기고 거기고 어디든 계시는 분일 테지요. 우매한 사람의 심사가 ‘지금 여기’ 아닌 ‘나중에 거기’를 찾아가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무주 집 서재에서, 사진=한상봉

왜 하필이면 귀농?

새로운 땅은 새로운 일입니다. 서울에서 산다는 것은 도시에 걸맞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곳 도시에서 나는 사람을 만나고 책을 읽고 글을 썼습니다. 잡지를 만드는 것이 본업이었던 까닭에 뭔가 읽고 쓰지 않으면 게으름을 피우거나 놀고 있다는 강박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시골로 내려온 지금은 놀고 일하는 것이 다르지 않습니다. 내가 움직이는 모든 것이 일이며, 일하는 것이 곧 놀고 있는 것입니다. 요즘 같은 늦가을에 겨울 땔감을 장만하러 다니는 일은 단풍 놀이와 다를 바 없습니다. 새참은 여지없이 꿀맛입니다.

집안일과 밭일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땡감을 따서 다듬고 실에 꿰어 처마에 매어 달아 놓습니다. 곶감을 먹으려는 심사이기도 하거니와 감물이 든 처마 밑은 보기에도 좋습니다. 살림과 노동이 어우러지는 생활 속에서는 만사가 어우러지는 것이라는 생각을 요구하며, 뭐든지 전체적으로 생각하고 살아가게끔 합니다. 이 생각의 한 끝을 놓치면 만사가 무료하고 힘겨운 노역이 되지만, 마음먹기 따라서 만사가 뜻 깊은 ‘거룩한 나의 과업’이 됩니다. 아직 잡지 일에서 온전히 손을 놓을 수 있는 처지는 아니지만, 시골 생활에선 사뭇 잡지 일조차도 나들이 기분을 느끼게 합니다.

아내 역시 일의 한가운데서 만납니다. 결혼이란 자신들의 삶을 함께 나누어 가지는 것입니다. 파란만장한 인생길에서 서로 힘든 일을 거들어 주며, 때론 도반(道伴)처럼, 때론 연인처럼, 때론 동지처럼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우린 시간이 흐를수록 공유할 수 있는 내용이 줄어들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저마다 일에 치여 살다 보니 짜증은 늘고, 그 짜증의 속내를 알 수 없는 두 사람은 쉽게 언짢은 기분으로 하루를 보내곤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고민은 항상 ‘뭔가 함께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몇몇 부부를 모아 독서 토론을 하자는 제의를 아내가 하였지만, 결국 나의 바쁜 일과와 무성의 때문에 수포로 돌아갔던 적도 있었습니다. 조금은 외적 강제가 필요한 게 아닐까, 취미 생활 수준으로 공유할 부분을 찾는 것은 근본적인 대안이 아닌 듯하였습니다. 그런 가운데 떠오른 것이 귀농(歸農)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아무리 잉꼬 같은 부부라 해도, 어떻게 하루 24시간을 꼬박 붙어서 지내느냐고, 부부가 항시 얼굴 맞대고 복닥거리다 보면 좋은 사이도 나빠지게 마련이라고 말입니다. 부부라 해도 일정한 거리가 필요하다는 말은 맞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서로가 좀더 깊이 응시할 시간과 마음의 여유를 갖는 것이고, 이는 기도 생활이나 묵상만큼이나 필요한 것일 테지요. 그러나 그게 꼭 객관적 거리를 요구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부부가 한 밭에서, 한 집에서 늘 붙어 지낸다 해도, 필요하다면 혼자 산책을 할 수도 있는 것이고, 일에 몰두하다 보면 곁에 누가 있든지 삼매경에 빠져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내와 나 사이에는 수많은 중생들이 끼여들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시골이라고 진공 속에서 두 사람이 사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이웃들, 온갖 산과 나무와 풀벌레들이 우리의 삶 구석구석에 끼여들어 함께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실상 시골 생활은 외로워할 틈이 그다지 없습니다.

 

광대정 집에서, 사진=한상봉

전북 무주 광대정에 이삿짐을 풀고서

전북 무주의 광대정이란 산골짜기로 옮겨 온 지 사십 일 정도 되었습니다. 그 동안 전남 영광, 전북 임실과 김제, 경북 예천과 상주, 경남 함양까지 기웃거려 보았습니다. 그러다 결국 여기에 들어와 살게 되었는데, 벌써 느끼는 바가 많습니다. 농사 지을 계획과 준비 과정에서도 미숙한 부분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지만, 여기선 스스로 집을 수리하고 살림살이를 돌보아야 합니다.

도시에서야 전화 한 통화 하면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와서 죄다 해결해 줍니다. 물론 대가를 돈으로 지불해야 하지만 말입니다. 여기선 사람을 부르기 어렵습니다. 이 산골짝까지 자동차를 몰고 와서 서비스를 해 줄 업체도 많지 않겠거니와―이 마을로 들어오는 산길은 포장되어 있지 않아서 4륜 구동 자동차가 아니면 집까지 올라오지도 못합니다―그 부담도 크기 때문에 대충 스스로 해결책을 찾아야 합니다.

시골 살림을 제대로 하자면, 본인이 전기 기술자도 되고 목수도 되고 미장이도 되어야 합니다. 물론 농부가 되어야 함은 당연하지요. 이 말은 곧 제 살림은 제가 직접 돌봐야 한다는 뜻일 테고, 사람이 제 한 몸을 살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좀더 분명히 알게 되기도 한다는 뜻일 겁니다. 그 동안 우리가 우리 삶의 얼마나 많은 부분을 타인에게 맡겨 두고 살았는지 알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이 얼마나 커다란 우주의 공력(功力)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아무리 뛰어난 목수라 해도, 나무가 없다면 다 소용없는 짓입니다. 농사에 도가 튼 상농(上農)이라 해도, 땅 속의 온갖 미물들이 돕고 하늘이 제 때에 비를 내려 주시지 않으면 헛농사를 짓는 꼴이 될 것입니다. 집을 짓고 옷을 지어 입으며 곡물이 잘 자라도록 돕는 것은, 사람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들이 어떤 조화 속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지, 또 우리가 어떻게 얻어야 하는지 배워 가는 게 시골 생활이고, 참사람이 되어 가는 기초 과정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제게 이런 기회가 주어진 것 자체에 기뻐하고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런 생각으로 산골 생활을 바야흐로 시작할 수 있게 됨을 조상의 음덕(陰德)과 주님의 은총으로 느끼면서, 이곳에서 2000년 대희년을 맞이하고 준비할 수 있음에 가슴 뜨뜻해집니다.

내가 알고 있는 희년은 “묵은 과거를 청산하고 새 희망으로 기쁘게 미래를 맞이하는 은총의 출발점”입니다. 낡은 인간을 털어 내고 새 인간을 입는 것입니다. 낡은 사고 방식과 생활 양식을 참회하고 반성하여 새로운 사고 방식과 생활 양식으로 정돈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귀·축생·지옥의 삼악도(三惡道)를 방불케 하는 전쟁터 같은 세상과 인생을 청산하고, 창을 꺾어 낫을 만드는 정신으로, 칼을 녹여 호미를 만드는 마음으로 세상과 자신의 생애를 돌보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희년을 맞이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치유의 힘을 믿어야 합니다. 한탄할 그 무엇이 너무도 많은 세상에서 눈물을 거두어 갈 치유자, 바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사정없이 뿜어 낼 아름다운 영혼으로 성장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인의 사명입니다.

이성복 시인은 “내 가보지 않은 한쪽 바다는 늘 마음속에서나 파도 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지만, 우리는 상사병(相思病)이 더 깊어져 지난 세기에 인류가 입은 상처가 더 도지기 전에 바다를 찾아가야 합니다. 내가 온전히 참사람으로 서 있는 나라, 그 대자자비의 바다로 나아가야 합니다. 달팽이들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바다를 향해 간다고 합니다. 이승에서 다 못 가면 다음 생애에서라도 뒤이어 바다로 간답니다. 그 고갈되지 않는 진리에의 열정을 오늘 이 순간부터 사는 것, 그게 신앙입니다. 


[출처] <연민>, 삼인, 2000. 이 글은 제가 삽십대 중반 <공동선> 편집장 시절에 쓴 글입니다. 그러니까, 벌써 20년이 되었군요. 세월이 흘러도 마음과 생각의 갈피는 달라지지 않는 모양입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