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를 드 푸코, 사막에서 일으킨 고요한 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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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 드 푸코, 사막에서 일으킨 고요한 시위
  • 한상봉
  • 승인 2017.07.03 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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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rles de Foucauld (1858~1916)

나자렛에 가고 싶었습니다. 물론 지금이라도 기회가 닿는다면 그곳에 가고 싶습니다. 주변에선 그리도 쉽게 가는 것처럼 보이는 성지순례입니다. 제가 아는 사제와 수도자들은 거의 다 가 보았다는 나자렛입니다. 예전에 한참 배낭여행이 유행이더니 요즘은 젊은 친구들도 쉽사리 길을 떠나는데, 정작 마음뿐인 나는 무엇을 망설이고 있는지요.

어쩌면 마음 속에서 그리는 나자렛이 더 아름다울지 모르겠습니다. 어릴 적 수학여행으로 공주며 부여며 경주를 다녀와선 무척 실망했던 기억이 삼삼하기 때문인지도 모르지요. 사물의 진상(眞相)을 본다는 것은 내 안에 진상을 묻어두지 않은 상태에선 그저 티끌에 지나지 않을 테니까요. 내 마음 속 갈망이 무르익으면 문득 길을 떠날 수 있겠지요.

그리고 이왕에 가려면 충분히 묵어야 할 것 같습니다. 예전에 무주 살다가 경주로 이사갈 때였습니다. 생판 연고가 없는 곳으로 이사하려니 당혹스럽더군요. 그 때 떠오른 것이 경주였지요. 지난 가을에 보았던 경주 불국사의 고운 단풍이 퍼뜩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그래, 거기서 한 번 살아보자, 하였습니다. 그후로 만 4년을 경주에서 살았는데, 사람들은 경주에 놀러오면 대릉원, 첨성대, 안압지, 석굴암, 불국사를 자동차로 돌아보곤 "에게!" 합니다. 생각만큼 웅장하지도 거창하지도 않기 때문이지요. 늘 사진으로 봐왔던 익숙한 얼굴들이기 때문이지요.

애써 경주 남산에 오르는 사람들만이 경주에 탄복합니다. 그러나 정작 경주의 중심은 반월성입니다. 지금은 주민들의 산책로나 조깅 코스로 주로 이용되고 있지만, 우리가 살던 집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반월성은 그 아늑함이 비할 데 없습니다. 벌판에 바람이 세어도 분지처럼 솟아있는 반월성에 들어서면 고요합니다. 그 우묵한 맛은 오래 살아 곁에 두고 내내 보아야 느끼는 정취입니다. 그러니 아마도 나자렛이란 땅도 그러할 것입니다. 별 볼일 없는 일상도, 매일 보는 가족의 얼굴도 켜켜이 두고두고 쌓인 정분(情分)을 되새기면 그 안에 빛나는 구석이 있기 마련이고, 남이 보지 못하는 좋은 기운이 스며있음을 발견하게 되겠지요. 비밀은 오래 지켜 본 자의 몫입니다.

나자렛의 발견, 아마도 샤를 드 푸코가 그런 사람인지 모르겠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이천 년 가까이 지나쳐 버린, 예수님의 숨어있던 30년 시절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나자렛을 발견한 사람이 그분입니다.

 

외롭고 방탕하게

<회심자들>이라는 책을 쓴 발터 닉은 샤를 드 푸코(Charles de Foucauld)의 생애가 ‘슬픔’에서 시작되었다고 썼습니다. 1858년 프랑스 알자스의 스트라스부르에서 태어난 푸코는 여섯 살이 되어서 몇 개월 사이에 양친을 모두 잃은 고아가 되었기 때문일까요? 친척이 그를 돌보아 주었으나 어린이에게 필요한 보금자리가 주는 따뜻한 양육에서 멀어진 것은 사실입니다.

푸코가 소년시절을 보낸 곳은 예수회에서 운영한 기숙사였는데, 이곳도 학교 규율이 엄격하기로 유명했지요. 학생들에겐 교과 과정에 대한 아무런 민주적 선택권이 없었는데, 푸코는 이 엄격한 규율을 싫어했습니다. 게다가 성적도 좋지 못했고, 항상 쓸모없는 아이로 취급받았습니다. 아, 불쌍한 샤를 드 푸코. 드디어 어느 날 기숙사에서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는 결코 모범적이 학생이 아니었으며, 퇴학과 동시에 신앙생활에서도 멀어졌지요. 푸코는 그 때를 회상하는 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17세에는 오직 자신 밖에 몰랐으며, 하느님을 몰라보았고, 악행을 원했다.” 모성적 돌봄을 받지 못한 푸코가 문제아가 된 것은 어쩜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퇴학을 당한 뒤에 군 사관학교에 들어가 프랑스 군대의 장교로 임관되었지만 그의 생활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마침 양친이 큰 유산을 물려주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 유산을 상속받아 더욱 방탕하게 살았습니다. 그는 요리 솜씨가 좋은 어느 여인을 정부(情婦)로 두고 자주 만났습니다. 푸코는 사람들 앞에서 거만하게 군림하기를 좋아했으며, 식사 때마다 샴페인을 즐겨 마시면서 창밖으로 돈을 뿌리는 무절제한 행동으로 일관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참된 사랑과 배려란 없었습니다.

그의 상관이 난봉꾼이었던 푸코를 ‘군인정신이 없다’는 이유로 징계하였을 때에도 보란 듯이 즈네브 호반으로 옮겨가서 창부들과 어울렸지요. 그는 이제 장교복을 벗고 날마다 축제 분위기를 연출하였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내적 공허감’에 시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희열에 넘쳐 살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진짜 사랑을 경험하지 못했던 푸코는 잿빛 우울함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웃고 있으나 마음은 슬퍼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공허감과 슬픔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알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해, 아프리카에서 폭동이 일어나자 그가 예전에 속했던 군대를 따라서 전투에 참가하였고, 그 후로도 계속 그곳에 남아서 지리학 공부를 했지요. 아마도 일을 통해 자신의 공허감을 이겨내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탐험대원의 하나가 되어 원정을 떠나고, 특히 유럽인의 출입이 금지되었던 모로코의 경우엔 유대인 교사의 복장을 하고 마르도키라는 랍비를 고용하여 함께 잠입하기도 했지요. 이 탐험을 통해서 푸코는 학문적으로 유익한 지도 작성법과 측량법을 알게 되었고, 상세한 연구보고서도 작성했지요. 나중에 이 분야에 대한 대단한 잡지를 발간해서 더 유명해졌는데, 파리의 지질학회는 그에게 공훈을 치하하는 황금훈장을 수여하기도 했답니다.

오만한 자는 바닥으로

이렇게 도무지 쓸데없던 한 사람이 명성을 떨치게 되었지만, 바로 이렇게 세상의 인정을 받았을 때, 오히려 새로운 도전이 다가왔습니다. 푸코는 아프리카에서 이슬람교도들을 만나 면서, 그들의 신에 대해 깊은 인상을 받았던 것입니다. "프랑스의 가톨릭교회는 부녀자들에게나 어울릴 것"이라며 교회를 경멸하였던 푸코에게 모슬렘을 통해 하느님이 다시 부각된 것입니다.

파리로 돌아간 푸코는 그러한 갈증을 풀기 위해 생오귀스탱 성당으로 가서 위블랭 신부를 서둘러 만났습니다. 그러나 위블랭 신부는 설익은 토론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무작정 ‘무릎을 꿇고 고백성사를 보라’는 것입니다. 푸코가 토론을 하러 왔다고 강변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결국 푸코는 그냥 돌아갈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지요. 푸코가 마침내 참회하고 몸을 일으켰을 때는 이미 자신의 모든 죄를 용서받았다는 강한 믿음을 회복했습니다. 그때 사제는 그에게 “아직 아침 식사 안하셨지요?”하고 물었습니다. 그리고는 즉시 그에게 성체(聖體)를 입에 넣어 주었답니다.

위블랭 신부는 “오만한 자는 바닥으로!”라는 파스칼의 말처럼 그를 시시비비를 따지는 끝없는 논쟁에서 구한 것입니다. 그 때가 1888년, 푸코 나이 28세 되던 해였습니다. 그 뒤로 푸코의 시선은 완전히 다른 빛에 휘감겨 있었지만 결코 완성된 것은 아니었지요. 이제 그의 인생에서 새로운 창조가 시작된 것이지요. 그 길목에서 위블랭 신부는 평생의 영적 스승이 되었고, 푸코는 자신의 결정권을 그에게 맡기고, 그의 판단에 자발적으로 복종하게 됩니다.

그가 찾아간 곳은 트라피스트 수도원입니다. 그는 첫날부터 빗자루를 들고 긴 복도를 청소했습니다. 익숙한 일은 아니었지만 우리는 언제나 단순한 일을 통해 그분에게로 찬찬히 걸어가는 것이겠지요. 엄격한 수도원 생활은 고기와 생선, 계란과 버터도 없이 겨우 허기만 면할 정도로 먹을 수 있었습니다. 이곳엔 부유하게 살던 때처럼 시중드는 하인도 없습니다.

애써 일하고 엄격한 규칙대로 가련해 보일만큼 힘들게 살면서 푸코는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지내면서 그들이 한 조각의 빵을 위해 얼마나 많은 수고와 노동을 필요로 하는지 절실히 깨닫고 체험했다”고 합니다. 이런 경험이 깊어질수록 일상생활에서 필수품들을 그동안 얼마나 소홀히 마구 다루어 왔는지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수도생활은 그의 갈망을 온전하게 채워주지는 못했습니다. 그는 수도생활을 하면서 카시아노와 크리소스토모와 아빌라의 데레사와 십자가의 성 요한을 공부하였지만, 결국 우리가 닮아야 할 분은 ‘예수’ 한 분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7년간 트라피스트 수도원에 있으면서, 푸코는 수도생활이 너무 안정적이고 정해진 규칙에 따라서 움직이면서 어떤 제도에 자신이 길들여지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수도원은 관습적이고 사회의 계급제도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신학을 공부하게 되었지만 너무나 추상적인 이론에 치우쳐 있어서 영적 생동감을 주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수도원 종지기 역할을 맡게 되자 “여기에 뭔가 그래도 좀 구체적인 게 있군.” 하였답니다. 그는 예수를 실천적으로 따르고 싶었던 것이지요.

 

 

살아 생전 그분의 나자렛으로

수도생활에서 하느님께 더 나아가지 못하고 벽에 부딪쳐 버린 푸코는 서원을 풀고 예수께서 생전에 사시던 나자렛으로 떠나기로 결심합니다. 나자렛 시내 외곽에 있는 성 글라라 수녀원에서 일꾼으로 고용살이를 시작한 것입니다. 그는 수녀원 그늘에서 작은 판잣집에 머물며 정원을 가꾸고 잔심부름을 했습니다.

올리브 산과 베타니아가 바라보이는 그곳에서 푸코는 돌을 베개 삼아 나무로 만든 의자에서 몸을 꼬부리고 잠을 잤습니다. 사람들이 불편해서 어찌 자냐고 물으면 이렇게 답했습니다. “그리스도 역시 십자가 위에서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불편함을 겪으셨다지요.”

어찌 보면 푸코 입장에선 신데렐라처럼 살고 있는 수녀들을 위해 비천한 자리에서 머슴을 산 것인데, 예수 역시 30년 동안 이 세상에 드러나지 않게 사셨고, 세상 일에 아랑곳 하지 않았던 것을 기억한 것입니다. 예수가 나사렛에서 부모에게 순종했으며, 가난한 이들 틈에서 노동자로 일하셨다는 것을 생각하며, 푸코는 숨어 계셨던 그분을 그대로 본받고 싶어했지요.

사람들은 보통 인정받고 싶어하고, 명예와 과시욕에 가득 차 고요히 머무는 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헛된 탐욕에 시달리며, 항상 중심인물이 되려 합니다. 그러나 푸코는 오직 숨은 데서 보시는 하느님께만 인정받기를 갈망했기 때문에 나자렛에 숨어살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보통 머슴이 아님을 눈치 챈 수녀원 원장은 그를 설득시켜 사제가 되도록 도왔습니다.

결국 푸코는 프랑스에서 신학을 공부하게 되지만, 거기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성 요셉은 신학을 알고서 못질을 했을까?” 그는 요셉 성인이 대패질을 하면서 오직 기쁜 마음으로 주님을 묵상하였을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나중에 사하라에 가서도 신학서적은 풀지도 않은 채 침대 밑에 둔 궤짝 속에 고스란히 남겨두었답니다. 적어도 복음적 생활에 보탬이 되지 않는 추상적 신학논쟁은 무익하다 여겼기 때문입니다. 결국 푸코는 1901년에 사제서품을 받은 후, 가장 버림받은 사람을 찾아 사하라 사막의 베니아베스와 타만라셋로 떠나게 됩니다. 이방의 땅에서 그의 가장 중요한 은수생활이 시작됩니다.

수도원은 이곳에서

사막은 종교적으로 특별한 장소였지요. 이스라엘 백성도 약속의 땅에 닿기 전에 광야에서 생활했으며, 모세도 엘리야도, 세례자 요한도 예수도, 안토니오 성인도 사막에서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푸코는 편지에 “사막은 나에게 가장 깊은 기쁨을 줍니다. 여기에는 매혹적인 감미로움이 있고, 고독 가운데 살면서 내 자신이 치유받고 행복해집니다. 또한 영원함을 마주보면서 진리에 싸여 있는 나를 발견케 합니다.”라고 썼답니다.

그는 끝없이 펼쳐진 모래사막과 먼 하늘을 명상하면서 이미 영원을 살고 있는 것처럼 느꼈습니다. 그렇게 사하라 사막은 그 자체로 ‘수도원’이 되어 주었던 것이지요. 그는 흰색 베두인 옷을 걸치고, 가슴에는 붉은 심장 위에 십자가를 달아 붙였습니다. 푸코가 빵과 물만 먹으며 한 달에 7프랑의 식비만 지출하며 살아가는 동안 오래 전에 교회가 잃어버렸던 사막의 영성이 되살아났습니다.

푸코는 호가르(hoggar)라는 가파른 계곡 산허리에 자리한 은둔장소에서 봉쇄된 수도자처럼 살았습니다. 가끔 지나가는 프랑스 군대와 미사를 봉헌했고, 주로 오아시스에서 오는 원주민들과 사귀었지요. 그들은 혼자 사는 푸코를 찾아와 주었고, 그는 이들을 반가이 맞이해 주었습니다. 그를 찾아오는 이들이 친구이든 원수이든, 그리스도인이든 모슬렘 교도이든 모든 이가 자신을 형제로 알아주길 원했습니다. 이곳에 머물며 투아렉 말도 배우고, 사전도 편찬하고, “가장 보잘 것 없는 이에게 베푼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던 예수의 가르침대로 살려고 했지요.

정말 복음이 원한 우리

이 무렵부터 그는 사제와 평신도를 가리지 않은 ‘작은 형제들의 모임’을 꿈꾸었습니다. 그는 작은 공동체를 원했는데, 수도회의 규모가 커지면 결국 물질의 노예가 되어 겸손해지기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작은 수의 회원들이 개인소유를 포기하고 손노동으로 자신의 빵을 먹으며, 제복도 봉쇄도 형식도 없이 나자렛 시절의 예수처럼 자유롭고 소박하게 살고 싶은 이상을 품었습니다.

그리고 흔히 수도원에 있기 마련인 아빠스 등 ‘존경하올 아버지’와 ‘어머니’라고 불리는 교계제도가 만들어낸 어떤 권위주의적 요소도 없애고 싶어했지요. 그는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마태 23,8-9)라는 복음의 말씀으로 가득차 있었던 것입니다. 이 생각이 그를 푸근하게 해주었고, 이를 실현할 규칙을 연구하고 회칙 초안을 만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사하라의 은수자였던 그와 이상을 함께 나누는 추종자들을 모으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몇 사람이 그에게 왔다가 공동체 생활을 시작하기도 전에 떠나가 버렸고, 결국 푸코는 한 사람의 회원도 없는 ‘형제회’의 창설자였던 셈입니다. 평생 홀로 살았던 푸코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지요. “나는 점점 더 고독해진다. 나는 갈수록 이 세상에 혼자라는 것을 뼈아프게 느낀다. 마치 추수 때 잊혀진 홀로 남은 대추 한 알 같은 느낌이다.”

푸코는 단 한 명의 형제라도 함께 같은 길을 가게 되기를 갈망했습니다. 그런데 갑작스러운 일이 일어나고 말았죠. 이미 나자렛에서 그 목소리를 들었던 것이었지요. “너는 순교자가 될 것이다. 다 빼앗기고 벗기운 채 피투성이가 되어 땅에 내동댕이쳐지고, 강제로 살해당하는 고통을 각오하라! 이러한 일이 당장에라도 일어날지 모른다고 생각하며, 또 이를 원하라!”

상황은 험악하게 다가왔습니다. 어느 밀고자를 따라온 도적들이 은둔지에 침입하여 푸코를 땅바닥에 꿇어 앉혔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모든 걸 약탈하는 동안, 16살 먹은 소년이 묶여 있던 푸코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이들은 근처에 있는 군대가 들이 닥칠까봐 서둘러 푸코의 옷을 벗기고, 구덩이 속에 그를 밀어 넣고 달아났지요. 모든 약자들은 강자를 두려워하고, 강자들은 약자를 무시합니다. 이 먹이사슬에서 푸코는 힘없는 약자로 죽었던 것입니다.

그의 시신은 골레아(Golea) 마을에 묻혀 있는데, 그가 살아 있을 때 원했던 대로, 그의 묘에는 아무 글도 새겨져 있지 않은 나무 십자가만 달랑 박혀 있을 뿐입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할 겁니다.

사막의 재발견, 그리고 가난

푸코는 우리에게 사막을 다시 발견하게 해주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교회와 세상이 만들어 놓은 질서에 의문을 갖지 않습니다. 그러나 푸코는 쓸데없이 떠벌이는 대신에 정신을 집중하고 예수 안에서 모든 걸 사막처럼 다시 시작하라고 말합니다. 그가 직접 프랑스의 아프리카 정복을 비난하지는 않았지만, 현실적인 곤궁 앞에서 눈감지는 않았습니다. 노예제도를 반대하였으며, 정의를 사랑하고 불의에 맞서서 프랑스 관리국과 종종 분쟁에 휘말리곤 했지요. 그는 자신이 사막의 은수자라고 해서, 불의를 보고도 ‘짖지 못하는 개’나 ‘졸고 있는 파수꾼’이 되는 걸 거부하였던 거지요.

푸코는 선교에 대한 열정이 있었지만, 보는 눈이 달랐습니다. 라틴전례는 이슬람 국민들에게 교회의 문을 닫아 걸어놓는 것과 같으며, 아직 이들에게 예수를 말하기엔 이르고, 오히려 가톨릭교회가 먼저 자연종교로 귀의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는 아프리카에 육화하신 그리스도를 자신이 몸으로 보여줌으로써 전하고자 했습니다.

주님께서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답니다. “침묵으로 이 세상의 성화를 위해 노력하라. 나를 모르는 사람들 가운데서 복음을 위해 새 터전을 마련하되, 입으로 선포하지 말고 표양으로 하며, 너 자신의 실천으로 전하라.”

그는 교회가 먼저 철저한 가난을 살아야 한다고 믿었는데, 값비싼 옷을 걸치고 오는 그리스도교는 복음에 맞지 않으며, 사람들에게 거부반응을 일으킬 것이라고 경고했지요. 그래서 수도생활조차 “선물과 애긍 희사와 연금으로 숨어 사는 가난이 아니라, 소박하고 비천한 노동으로 가난해야”한다고 생각했지요,

그는 자신이 가난을 껴안았으며, 부유함을 부담스럽게 느꼈을뿐 아니라, 그 안에 도사린 위험도 알았습니다. 그는 솔직히 말합니다. “가난은 과장된 절제나 아낌이 아니며, 부유한 자가 재치 있게 관리하는 재능도 아니다. 청빈은 금전에 대한 애착에서 해방되어 끊어버리는 것이며, 돈을 싫어하는 것이다. ... 우리는 부유한 사람들도 하느님의 자녀이므로 사랑하지만, 그들과는 상종하지 않으련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를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께서 유산으로 주신 가난한 자들과 함께 하자!”

이렇게 살려면 가장 필요한 덕이 겸손이었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열등감에 빠지지 않습니다. 돈 때문에 지위 때문에 능력 때문에 열패감을 느끼며 우울하게 지내지 않습니다. 푸코는 영적 스승이었던 위블랭 신부가 “아무도 시비를 걸지 못하도록 그대는 가장 끝자리를 차지하라”고 말한 대로 “나 자신은 언제나 끝자리를 찾으며 내 생활은 가장 말째가 되어 가장 비천한 자로 살아가리라”하고 다짐하였습니다. 예수께서 베들레헴의 구유 위에 내려오신 것처럼, 하느님은 가장 누추한 자리에 있는 작은 이들 가운데 계신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예수처럼 생전에 그의 마음을 알아주고 찾아준 사람은 없었습니다. 오래동안 외로웠던 그 사내가 죽은 뒤 30년이 지나서야 썩은 밀알에 싹이 트기 시작했지요. 낮은 자리에서 관상과 활동을 조화시키며 사는 예수의 ‘작은 자매들’와 ‘작은 형제들’이 생긴 것입니다. 이들은 봘터 닉의 표현대로 ‘고요한 시위자’입니다. 이들은 십자군의 칼과 창으로 세상과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상업주의 세계 안에서 이리떼 가운데 있는 양떼들처럼 복음을 사는 ‘유순한 항쟁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출처] <그대 아직 갈망하는가>, 한상봉, 이파르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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