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공부] 인류는 '영원한 여성'이다
상태바
[성경공부] 인류는 '영원한 여성'이다
  • 리차드 로어 & 죠셉 마르토스
  • 승인 2017.05.30 12:1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루가 복음과 사도행전-9

하느님은 남성도 여성도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러나 성서에서 하느님은 항상 남성적으로 이야기된다. 구약에서 야훼는 전사나 왕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다. 신약성서의 하느님은 “우리 아버지”로 표현된다. 그러나 야훼도 전통적으로는 여성적인 특성을 많이 보여준다: 부드러운 사랑, 끈기를 갖고 기다림, 부드러운 자비, 강한 감정, 기꺼이 용서함 등등. 예수님의 하느님은 여러면에서 어머니 같다. 성서에 나오는 하느님에 대한 형상은 양성 같은데 그것은 여성적 특성을 가지고 있는 남성적인 모습을 지녔기 때문이다.

하느님 모상대로 만들어진 사람도 남성적이며 여성적이다. 그러나 얼마전까지만해도 흔히 인류를 “남자(mankind)" 라고 표현했고 ”하느님과 남자(God and man)" 라고 할 때는 신과 인간사이의 관계를 의미했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를 놓고 볼 때 매우 남성적인 관계였다. 우리가 신성과 인간성에 대해 말했던 바로 그 방법 때문에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인류(humankind)를 말할 때 성서가 아주 여성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사진출처=pixabay.com

근본적으로 여성적인 인간성

성서적으로 말하면 하느님은 주시는 분이시고 창조물은 받는 자이다. 창조에 대한 첫 설명에서 하느님은 형태 없는 혼란 상태에 질서를 주시어 자연이 형태를 갖게 하고, 세상을 "좋은 것"으로 만드신다. 창세기 제 2장에서 하느님은 생명 없는 땅에 생명을 주시고 또 남자와 여자를 포함해서 좋은 것들을 모두 가져오신다. 우리는 종종 “어머니 대지”, “어머니이신 자연”이라고 말하는 데 이것이 바로 비성서적인 종교들까지도 생명의 기적을 만들어 내기 위해 “아버지이신 하느님”에 의한 수태가 필요했음을 인정하는 증거이다.

우리자신의 종교적 체험에서도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모두 주님 앞에서 여성임을 안다. 회심의 순간은 바로 우리 안에 정신적인 생명의 씨앗을 뿌리시는 위대한 힘에 승복하는 것이다. 그리고 신앙의 여정을 떠날 때 우리는 마치 여자가 남자에게 늘 의지하듯이 하느님의 힘과 인도에 끊임없이 의지한다.

그래서 하느님과의 관계를 맺고 있는 인류의 형상은 종종 여성으로 보여진다. <아가>서의 관능적인 비유적 묘사에서 초기 그리스도교 작가들은 교회를 사랑하는 연인인 주님에게 유혹받으며 구애를 받는다고 보았다. 예언서에서 이스라엘은 다른 신을 숭배하려고 도망을 쳤으나 그녀의 충직한 배우자인 야훼에 의해 사랑 받는 매춘부로 묘사된다.

시편에서 하느님은 보통 남성적 힘을 갖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는 반면 시편 저자나 사람들은 그분의 힘에 의지하는 여성으로 표현된다. 우리가 말하는 여성, 남성이라는 특성은 종종 문화적으로 결정되지만, 이 방법은 과거에 사람들이 하느님과 인간 관계에서 나타나는 모든 신비함을 묘사하려고 했던 한 방법이다.

구약의 맨 처음에 우리는 인류의 어머니, 모든 인류가 그리로부터 태어나는 모태인 하와를 보게 된다. 잘못을 저지른 후 그녀는 벌거숭이가 되고 무력해지며 완전히 하느님의 자비에 의지하게 된다. 그러나 야훼께서는 그녀에게서 희망을 빼앗지 않으신다. 때때로 첫번째 복음의 선포라고 불리는 곳에서 야훼는 하와를 유혹한 뱀을 보고 말씀하신다:

"나는 너를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리라. 네 후손은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라. 너는 그녀의 발꿈치를 물려고 하다가 도리어 여자의 후손에게 머리를 밟히리라."(창세기 3,15)

인류가 항상 악과 투쟁을 해야 하지만 결국 인간이 사탄을 이길 것이라고 하느님은 약속하신다. 혹독한 역사를 거쳐오면서 하느님은 늘 인간의 노력에 협력하시고 이 세상에 있는 악마의 세력을 정복하는 데 필요한 힘을 인간에게 주신다.

사진출처=pixabay.com

신약성서 맨 처음에 우리는 창세기의 예언을 완벽하게 실현시킬 분을 낳으시는 마리아를 만난다. 마리아는 그녀에게 다가온 말씀을 완전히 받아들인다. 그리고 하느님의 그 말씀은 하나의 씨앗으로 이 씨앗은 하느님의 아들이 되시는데, 이분은 가난하고 도움을 청할데 없는 인간에게 하느님이 내리신 최상의 선물이다.

그리고나서 성서 맨 마지막인 묵시록에 마리아가 다시 나온다. 묵시록에 나오는 여인은 하느님 권좌로부터 세상을 다스리도록 운명지워진 남자아이를 잉태한다. 악마가 그녀를 광야까지 쫓아와 삼키려고 하는데, 그 악마는 그녀의 자녀들에게 싸움을 걸려고 하는 용의 모양을 하고 있다(요한 묵시록 12,1-17). 그러나 결국 그녀의 아들과 자손들은 승리하고, 그 승리는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다.

여자로서의 마리아의 역할(그러므로 주님 앞에 있는 인간으로서)은 요한 복음서에서 강조되는데 거기서 복음사가는 그녀를 이름이 아니라 호칭으로 부른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여인”이라고 불렀다고 했을 때 요한은 그녀를 단지 마리아로서 뿐만 아니라 주님 앞에 선 우리 모두의 공동적인 신원을 상징하고 있다.

그녀는 그분만이 주실 수 있는 것을 달라고 하면서 예수님께로 간다. 처음에는 예수님께서 그녀의 말을 듣는 것 같지 않으나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필요한 것을 주시리라는 것을 확신한다. 우리는 그녀가 즉시 하인들에게 자신의 아들이 시키는 대로하라고 지시한 것에서 이를 알 수 있다(요한 2,5).

이야기 속에 나오는 여섯 개의 돌항아리는 받아들임을 의미하는데 이런 의미에서 여성성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하인이 돌항아리에 부은 물은 잔치를 위해서 필요한 활력소가 부족한 삶을 상징한다. 우리는 인류가 메마른 삶이 아닌 좀더 나은 무엇으로 채워지기를, 주님만이 주실 수 있는 성령으로 가득 채워지기를 마리아가 간구하고 있다고 상상할 수 있다.

그리고 주님은 마리아를 실망시키시지 않으신다. 그녀의 요청에 응해서 예수님께서는 그 자리에 모인 손님을 위해 150갈론이나 되는 가장 좋은 포도주를 아낌없이 쏟아 부어 주신다. 그것은 충만한 성령에 대한 아주 멋진 상징이며 매일매일 일상생활을 축제로 변형시키는 포도주이다. 그러나 주님은 인류(영원한 여성)가 와서 청할 때까지는 새로운 생명을 주실 수 없다.

요한 복음의 마지막에서 우리는 마리아를 다시 만나는데 이번에 그녀는 십자가 아래 서 있다. 다시 예수님께서 그녀를 “여인”이라 부르는데 이는 그녀 안에서 모든 인류가 갈바리산으로 와서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과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마리아가 겪은 불합리한 상황처럼 우리도 악의 승리가 분명하게 보일 때 고통을 겪어야한다. 마리아 안에서 또한 마리아를 통해서 우리는 모두 십자가 아래 서 있다. 십자가 죽음의 표상은 우리가 마리아 안에서 예수님과 함께 거기 있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


<성서의 위대한 주제들-신약>, 리차드 로어 & 죠셉 마르토스(참사람되어 2000년 7월호 번역)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