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의 공부는 ‘싸움의 기술’을 가르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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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공부는 ‘싸움의 기술’을 가르치지 않는다
  • 유대칠
  • 승인 2017.06.14 10: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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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칠의 아픈 시대, 낮은 자의 철학 - 8]

책을 읽는다는 것은 수동적이지 않다. 능동적이다. 책을 쓴 과거의 어느 누군가와 책이란 공간 속에서 독자는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으로 돌아오는 답에 동의하기도하고 반대하기도하면서 독자는 또 다른 자신의 답을 만들어간다. 그렇게 독자는 저자의 도움 속에 저자의 답과 동화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답을 만든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수동적으로 저자의 뜻을 그저 수용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답을 만들어간다는 말이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저자와의 대화

중세 수많은 철학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을 읽고 읽고 또 읽었다. 하지만 이들의 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다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던진 질문에서 돌아온 답이 그들의 철학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그 답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모사품이 아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도움이었고, 막상 그의 책을 읽고 공부하며 만들어진 답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답과 달랐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중세 철학자들에게 그러한 것이었다. 책 속에 담긴 객관적 답을 구해 그 답을 얼마나 잘 요약하고 정리 암기해 시험을 잘 치고, 이로 인해 고득점을 이루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저자와의 대화다. 자신의 답을 만들기 위해 고민의 선배, 궁리의 선배, 바로 그 선배에게 도움을 구하는 것이다.

중세 대학의 교실은 대화의 공간이었다. 수업은 근본적으로 토론이었다. 질문하고 답하는 토론이었다. 선생이 학생의 앞에 서서 자신의 답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었다. 함께 고민하고, 그 고민에 대한 서로의 답에 질문하고 논쟁하며 동의하고 반대하며 수업이 진행되었다. 토론, 토론 역시 대화다. ‘자신의 생각’과 ‘다른 이의 생각’을 충돌 하게하는 것이다. 그 충돌 속에서 무엇이 부족한지 알아가기도 하고, 다른 한편 자신의 생각이 가진 긍정적인 점을 다시금 확인 하기도 했다.

중세 대학은 작은 칸막이 도서관 책상에 앉아 책 속에 쓰인 객관적인 답을 열심히 요약하고 정리하여 암기함으로 시험을 치고, 그 시험으로 고득점을 얻어 좋은 곳에 취업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칸막이 속 그 작은 공간으로 시선을 돌리고 다른 이의 도움도 대화도 없이, 타인은 그저 방해가 된다며, 막힌 공간 속에 밀어 놓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었다.

스승과 제자

13세기 중세의 큰 스승인 ‘대 알베르토’에겐 유명한 제자들이 있었다. 그 중엔 ‘토마스 아퀴나스’도 있었고, ‘마이스터 엑하르트’도 있었다. 스승 대 알베르토는 자신의 답을 제자들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제자들은 스승의 답을 있는 그대로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지 않았다. 제자들 서로의 생각도 많이 다르다. 스승은 토론 속 질문으로 각자의 답을 만들어가도록 도움을 주는 존재다. 자신의 답을 강요하는 존재가 아니다.

13세기 후반에서 14세기 초반 또 다른 시대의 스승은 둔스 스코투스였다. 그의 강의실에서 그의 강의를 들은 많은 이들은 그의 철학을 수정 보완하려했으며, 또 다른 많은 이들은 강단 앞에서 강의하는 둔스 스코투스의 철학을 적극 수용하여 더욱 더 치열한 자기 답을 만든 후 스코투스를 논박하였다. 바로 이것이 공부이고, 바로 이것이 스승이고 제자였다.

독서는 대화다. 교실의 수업도 대화다. 이것이 중세다. 대화는 서로의 이해 속에 함께 답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대화는 강요된 하나의 답을 강요하지 않는다. 그것은 대화가 아니다. 대화는 함께 답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독서도 저자와 독자가 함께 답을 만들어가기 위한 과정이다. 하나의 답을 달달 암기하기 위함이 아니다. 일 년에 백 권의 책을 읽어 외국의 어느 기준에 맞는 그런 지식인이 되기 위함이 아니다.

특히 오랜 동안 시간과 공간을 넘어 많은 이들에게 도움을 준 말을 건넨 ‘고전’을 읽는다는 것은 더욱 더 그렇다. 대화를 한다는 것이다. 그 오랜 생각 도움이의 도움 속에서 자신의 답을 만들어간다는 말이다. 수업도 그와 같아야한다. 만일 하나의 객관적인 답을 홀로 달달 암기하여 얻기 위한 것이라면 선생은 어떤 존재인가? 그것을 잘 암기하는 비법 혹은 암기했는지 확인하는 존재인가?

스승은 남들보다 더 좋은 대학에 가야한다는 말을 하며 혹은 남들보다 더 좋은 직업을 가져야한다며, 남을 이기라고 학생들을 자극하는 존재일 뿐인가? 같은 교실의 다른 학생들은 결국 이겨야하는 존재일 뿐인가? 하나의 문제로 같이 고민하고 서로 질문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고민의 자극제가 되어, 함께 답을 만들어가겠다는 것은 지금의 승자를 위한 교육에선 공허한 소리로 들린다.

이 세상은 사랑보다 다툼을 가르치는 싸움터인가

책은 일 년에 수백 권을 읽어야하는 것이 아니다. 그 점수 속에 자신의 지혜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교실에서의 공부도 학생의 점수보다 더 많은 것이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서로 대화 하고 함께 답을 만들어가는 법을 배워가는 공간이다. 많은 이들이 공부를 하다 자살한다. 높은 성적이 아니라 자살하는 학생들이 있고, 좋은 직장을 가는 시험을 제대로 치지 못해 자살하는 취업준비생도 있다. 대화 없이 그저 이기기 위해 살아가고 공부하는 존재, 대화 없이 홀로 죽도록 아프다가 결국 죽음을 선택하는 사회, 독서도 전투적으로 공부도 전투적으로 하는 사회, 타인이 함께 대화하는 존재가 아닌 이겨야하는 존재로 여기는 사회, 사랑보다 다툼을 가르치는 사회, 지금 많은 이들이 이 싸움터에 지쳐가고 있다.

‘시에나의 가타리나’는 아프고 힘든 이를 향한 무조건적 사랑에서 인간 가운데 ‘하느님의 모상’을 발견했다. 싸움의 기술을 익히기 위해 책을 읽고 공부하는 이 싸움터는 하느님의 모상으로부터 멀어진 슬픈 싸움터다. 많은 이들이 정말 죽어가고 있는 힘든 싸움터다. 

 

유대칠 암브로시오
중세철학과 초기 근대철학을 공부한다. 
대구 오캄연구소에서 고전 세미나와 연구, 번역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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