랑세 아빠스, 살롱의 잡담에서 수도원의 침묵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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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세 아빠스, 살롱의 잡담에서 수도원의 침묵 속으로
  • 한상봉
  • 승인 2017.06.11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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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mand-Jean de Bouthillier de Rancé (1626~1700)

예전에 <침묵속에서 하느님을 찾는 사람들>이라는 소책자를 읽었을 때의 감동을 잊을 수 없습니다. 토마스 머튼이 쓴 책인데, 그 제목처럼 책자는 두께가 얇고 사이사이 끼어넣은 사진에 아주 짤막한 글을 적었습니다. ‘침묵’에 대해서 누군가 500쪽 짜리 책을 써대는 황당한 상상을 하면서 웃었던 적이 있습니다. 일본에선 ‘하이쿠’라는 시 형식이 있다더군요. 아마 촌철살인(寸鐵殺人)이라 할 만한 명징한 시선이 없고서는 가당찮은 일일 테지요. 저도 모를 이야기를 중언부언하는 것처럼 듣는 이를 짜증나게 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요.

저는 아직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없지만, 정말 ‘하늘’을 본 사람은 할 말을 잃을 것이란 생각을 합니다. 그 느낌만 가슴 속에 담아두어도 모자랄 지경일 테니까요. 입을 닫고 살고서야 미세한 소리에도 반응할 수 있는 것인지 모릅니다. 그래야 대숲소리 귀에 담아둘 수 있을 테지요.

우리는 지금 소란한 시절을 건너가고 있는 셈입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는 하루에도 눈을 떠서 감을 때까지 수천수만 가지 광고를 봐야 합니다. 미디어 매체는 물론 길거리에서 전철에서 식당에서 어디에서나 광고는 수없이 내 눈을 파고듭니다. 그 상업주의의 아우성을 ‘무심(無心)하게’ 건너고 싶다는 생각을 가끔 합니다. 소란 속에서 침묵을 발견하고, 침묵 속에서 그분을 알아볼 때까지. 오늘은 토마스 머튼이 살았던 트라피스트 수도원 창립자 이야기를 통해 그 길을 가늠해 봅니다.

아르망 잔 드 본틸리에 드 랑세

우아하고 귀족적인, 돈 많고 많이 아는

아르망 잔 드 본틸리에 드 랑세(Armand-Jean de Bouthillier de Rancé). 아주 긴 이름이 말해주듯이 랑세는 프랑스의 귀족 출신이었으며, 어린시절부터 조숙하고 총명했습니다. 그의 부친은 11살밖에 되지 않은 소년에게 삭발례를 받게 하고, 막대한 재산을 소유하고 관리할 힘을 주었지요. 랑세는 파리의 노틀담 대성당의 주임신부로서 5개 수도원의 명의 원장이 되어 재정을 관리하였고, 유산으로 받은 성(城)까지 소유했던 대단한 부자였습니다.

게다가 어려서부터 대단히 총명해서 일찍이 호머의 책을 번역했고, 그리스와 라틴어로 쓰여진 시를 읽었으며, 13살에 이미 책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소르본느 대학에서 신학 박사를 받을 만큼 똑똑했지만, 그가 관심을 가진 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이라기보다 학문 그 자체였지요. 이를테면 그는 신학을 공부했지만 그리스도교 진리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귀족적이고 우아했던 랑세는 부와 총명함을 두루 갖추었기 때문에 당연히 상류사회에서 인기를 독차지할 수밖에 없었죠. 외모는 적당한 체격에 박력있는 인상, 품위 있는 이마와 빛나는 눈을 가졌고, 머리는 항상 정성껏 빗어 올린 상태였답니다. 두 개의 비취 단추가 소매끝에서 찰랑거렸고, 손가락에선 다이아몬드 반지가 반짝거렸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는 사냥을 즐겼는데, 사냥은 당시 교회법상 금지된 것이었지만 아랑곳 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랑세는 상류사회의 사교생활을 좋아하고 능수능란했는데, 백작과 공작부인들 사이에서 수준 높고 지성미 넘치며 풍자적인 대화로 유명했습니다. 그는 특히 몽바쏭(Montbazon)의 공작부인과 절친했다고 전해지는데, 그녀는 뭇 남성들의 시선을 모으는 젊은 미망인으로 매력적인 미녀였지요. 그녀가 정감 넘치고 섬세하게 배려해 주었기 때문에 랑세는 그 집을 자주 방문했다고 합니다. 두 사람 사이가 어느 만큼 발전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랑세는 그녀와 젊은 시절에 대하여 시종일관 침묵하였으며, 편지를 비롯한 모든 기록을 불태워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달콤한 애정을 나누던 몽바쏭 부인이 갑자기 병마에 시달리고, 랑세는 수시로 그녀의 병실로 달려가곤 하였지요. 그러던 어느날, 풍문에 따르면, 랑세가 그녀의 병실을 찾아갔는데 빈 방안엔 관이 놓여 있고, 컴컴한 방에서 발에 걸린 것이 그녀의 머리였답니다. 시체에 항유를 잘 바르기 위해 머리를 잘라 두었던 것일까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아름답던 귀부인이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지요. 소스라치게 놀라서 그 방에서 달아난 이후로 랑세는 오랜 시간 동안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는 내면의 깊은 성곽 안에서 이 체험을 되새기게 되었지요. 기다란 복도는 자신의 발자국 소리로 되울리고, 무겁게 가라앉은 우울한 마음은 더 어두워졌습니다. 그동안 자신은 지나치게 겉핥기로 인생을 살아왔던 것이지요. 몽바쏭의 공작부인과 나누던 대화와 시선, 정다움은 이제 영원히 가버렸습니다. 홀로 있으면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 싶었지만 응답 없는 공허한 울림뿐입니다. 그녀는 영원히 사라진 것입니다.

죽음의 폭력 앞에서 그 자신도 죽음에게로 다가가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덧없는 삶이여! 보통 우리는 죽음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 생각이 빨리 지나쳐 가게 만들고, 자기를 창백하게 만드는 그런 생각에서 벗어나 재빨리 아무렇지 않은 듯한 일상생활로 돌아가려 합니다. 그러나 랑세는 그럴 수 없었습니다. 공작부인의 잘려나간 머리는, 그가 일생동안 듣고 읽었던 말보다 더 절실한 말을 하고 있었습니다. 죽음에 대한 체험이 그의 삶을 돌려놓았습니다.

천천히 분명하게, 물러섬 없이 그분에게로

랑세의 회개는 곧 돈과 지식과 쾌락를 끊어버리는 것으로 나타났지요. 그는 자신이 불쌍한 죄인이라고 여겼으며, 다시 태어나기 위해 엄격한 고행이 필요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일시적 충동이 아니었죠. 사람에게 달라붙은 아집과 습성은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육신에 붙어있은 피부처럼 말입니다. 그는 이름만일지라도 수도원장이었지만 한번도 자신을 수도자라고 여긴 적이 없었던 자였습니다.

그는 천천히 그러나 분명히 달라졌습니다. 화려한 성곽을 팔고 고급 마차와 은식기와 서재를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하인들에게 자유를 주고, “누구든지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꾸준히 강철 같은 의지로 수행하기 시작했던 거지요. 다시는 ‘에집트에서 맛 본 고깃냄비’를 동경하지 않았습니다.

사진출처=docuranossasalve.blogspot.com

랑세는 평생 거친 속옷을 입고 가시 돋힌 혁대를 띠고 젊은 시절을 속죄하는 마음으로 살았답니다. “나는 신학박사이지만 그리스도교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다. 배우지 못한 자들이 천국을 차지할 것이요, 나는 내 지식 때문에 멸망할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1657년에 ‘트라프’라는 수도원에 처음인양 입회합니다. 그리고 수도원 뒷간부터 청소하기 시작했던 거지요.

시토회에 속한 트라프 수도원은 베르나르도 클레르보라는 성인으로 한 때 유명했던 수도원이었지만, 이 당시는 루이 13세 시대의 흥청망청한 분위기에 오염되어, 젊은 남녀들이 밤낮 가리지 않고 드나들었고, 식당은 오락과 잡담 장소로 쓰이고, 수도자들은 사냥하러 나갔으며, 마치 도적떼처럼 몰려 살았습니다. 명분상이나마 이 수도원의 아빠스였던 랑세가 평범한 수도자로 들어오는 것 자체가 맹렬한 반발을 일으키는 분위기였지요.

여기서 랑세는 수도원 개혁운동을 일으킵니다. 게으른 수도승은 없느니만 못했고 미지근한 수도승은 차라리 수도원을 떠나는 게 나았으니까요. 그는 시토회에 영감을 주었던 베르나르도의 영성과 전통이 회복되길 바랐습니다. 그는 수도원장이 된 뒤에 아주 작은 것이라도 개인 소유를 금했고, ‘내 것’이라는 말은 아예 쓰지도 못하게 했지요.

그는 수도원을 세상과 엄격히 분리된 사막처럼 고요한 공동체로 탈바꿈 시킵니다. 이내 ‘침묵’이 수도원 방마다 되돌아 왔지요. 속닥거리는 밀담도 하지 못하게 금하고, 예전에 사용했던 수화(手話)를 다시 쓰게 만들었지요. 그는 침묵이 천사들의 언어이며 하느님과 나누는 대화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수도자들은 오로지 기도와 하느님 찬양을 위해서만 입을 엽니다.

이렇게 탄생된 것이 ‘엄률(嚴律) 시토회’라고 부르는 ‘트라피스트 수도회’입니다. 그는 14세기 후반 세속화의 물결에 휩쓸려 쇠퇴해 가던 시토회의 쇄신에 성공한 것입니다. 이 수도회는 그동안 헛된 소문에 시달리기도 했지요. 그들은 “관속에서 잠을 자야 한다”느니, 서로 인사할 때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고 한다느니, “자신의 무덤을 스스로 파야 한다”는 소리는 다 뜬소문입니다. 그들은 진정으로 마음의 평화를 얻은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침묵 속에서 하느님을 응시하는 삶이 거기에 놓여있었습니다.

그러나 랑세가 좀 지나치게 엄격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는 수도자들이 학문을 연구하는 것을 반대했다고 하는데, 그건 자신의 경험 때문이지요. 수도승들이 학문 연구에만 몰두하다 보면 정작 하느님의 뜻에는 딴전을 부릴 수 있습니다. 신학지식이 그 사람을 거룩하게 만들지 않는 까닭입니다. 그래서 수도승이 학문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베네딕토 성인 역시 수도규칙에서 학문 탐구보다 손노동을 더 중요하게 여겼던 것을 기억하려는 것이지요. 학문이란 진리와 구별되고, 다만 진리를 찾기 위한 방편일 뿐이겠지요.

"가장 인적이 드문 황폐한 곳에 시신을 묻어달라"

그는 지푸라기 침대 위에서 75세로 이승을 떠났습니다. “가장 인적이 드문 황폐한 곳에” 시신을 묻어달라고 부탁하고서 말입니다. 그는 복자품에도 성인품에도 오르지 못했지만 아마 랑세 역시 그것을 바랐을 것입니다. 속죄자로서 자신은 그러한 영광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의 수도원은 ‘탐욕의 무덤’이었기에 허영에 들떠 있던 사람들에겐 자기 삶을 근본적으로 돌이켜 보라고 말하는 천둥소리 같은 도전이 될 것입니다. 어느 작가의 말마따나 그는 “최고급 승용차로 천국에 오른 자가 아니라 오늘날 사람들이 알지 못할 어떤 힘으로 승화된 사람”입니다.

오늘날 어떤 사제도 주교도 수도자도 ‘쇄신’을 입에 담으면서도 제 십자가를 지는 데는 인색합니다. 이미 교회 안에는 세상의 가치관이 너무 많이 침투되어 예복을 벗으면 다른 사람들과 별 차이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그리스도교는 세상이 그러하듯 우리도 그러하다는 뼈아픈 각성을 해야 하겠지요. 재산과 명예욕, 허세와 기회주의, 상업주의는 교회에서도 세력을 넓히고 있습니다. 세상을 거슬러 살아갈 용기가 우리에겐 없는 걸까요.


[출처] <그대 아직 갈망하는가>, 한상봉, 이파르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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