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성적 돌봄의 예술가, 빙엔의 힐데가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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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성적 돌봄의 예술가, 빙엔의 힐데가르트
  • 한상봉
  • 승인 2017.05.30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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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ldegard von Bingen (1098-1179)

어머니, 부르면
어머니, 손을 잡으면
어머니, 눈빛을 맞추면
어머니, 등을 바라보면
뒤에서 그만
안아주고 싶어요.
엄마, 하고.

‘마리아’에 대한 기억

어머니, 하고 부르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은 어머니의 따뜻한 등이었습니다. 내 기억의 끝닿은 데로 가 보면, 어머니 등에 업혀 인천 도화동 성당엘 가서 발돋음 하며 미사를 ‘구경’하던 어린 시절이 떠오릅니다. 아마도 그것은 제 가장 오래된 기억일 것입니다. 대여섯 살 때였을까요? 잘 모릅니다. 그저 제대에서 벌어지는 일이 궁금해서 나는 발끝을 세웠고, 길고 유별난 옷을 입은 사제가 양 팔을 벌리고 읊조리는 소리를 들었던 것 같습니다. 미사 중에 엄마 등에 기대어 온기를 느끼며 잠도 들었겠지요, 어머니.

중학생이 되어서 레지오 마리애 활동을 하였지만, 그때 제가 뭘 알았겠습니까? 경쟁적으로 활동보고를 하느라고 하루에 15단 이상씩 매일을 하루같이 묵주신공을 바쳤던 시절입니다. 제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마리아’가 아니었고, 그저 ‘성모님’뿐이었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마음을 담아 마리아, 라고 발음해 주길 그분이 얼마나 기다렸을까, 생각합니다. 그분은 엄마로서의 모습만 지녔던 게 아니었고, 한 때는 처녀 마리아였으며, 말년엔 할머니 마리아였을 텐데, 저는 그저 거룩한 엄마 마리아만 또렷이 기억했던 것이겠지요. 성모송을 바칠 때마다 그분의 이름을 외우지만, 남아있는 그림자는 여전히 성모님뿐입니다.

그래요, 마리아를 엄마라 부르는 것은 어쩜 당연한 것인지 모르겠어요. 장성한 자식들조차 엄마, 라고 부를 때는 뭔가 우묵한 느낌으로 안심하니 말입니다. 그러나 엄마란 언제나 자식을 앞에 두고 있으니, 뭐든 무조건 해줘야 하는 존재로만 남습니다. 정작 하고 싶은 일 밀쳐두고 자식들에게 그저 내어 주어야 한다고 우리는 배웠지요. 그래야 ‘엄마’라고 배웠지요. 그래서 우리는 어려움이 있거나 누가 아프면 응당 성모님께 청하지요. 이거 해 주세요, 저거 해주세요, 청할 대상이 필요해서인지 마리아를 언제나 엄마로만 붙잡아두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철이 들면 달라지는 법이지요. 아들 딸이 언젠가부터 “엄마 뭐 필요한 거 없어요?”하고 물어보기 시작하면 어른이 되었다는 뜻이겠지요. 제가 필요한 것을 청하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가 필요한 것을 살피는 마음이 성숙한 자녀의 태도입니다. 그분은 엄마이기 전에 한 여성이며, 우리와 마찬가지로 고유한 생애를 살아가고 있는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지요.

그분이 원하는 것을 미리 알아서 해주려는 마음씀이 필요합니다. 성모님이 거룩한 어머니가 되신 것은 아드님 예수가 바랐던 것을 그분도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아드님 예수가 바라던 하느님 나라를 위해 우리가 자비를 베풀고 세상의 평화를 위해 일할 때 성모님은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말년의 마리아처럼 당신의 지혜를 우리에게 나눠 주실 것입니다.

의로운 자식을 두어 고난이 많으셨던 어머니, 그만큼 엄혹한 생애가 그분에게 가르쳐준 지혜도 깊으셨을 것입니다. 초기교회에서 분명히 예수님의 어머니로서 존경받았을 어머니가 정작 사도행전 등의 기록에는 별로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사도들 앞에 나서지 않고 그저 고요히 머물며 공동체의 배경으로 남아 계셨을 것입니다. 그분이 사도들에게 어떤 지혜를 주셨을까, 궁금한 오늘입니다.

그분은 땅처럼 온갖 생명을 품으셨지만 자랑하지 아니하고, 어린 예수 아기를 어루만지며 당신의 젖으로 양육하셨지만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장성한 자식을 십자가 아래서 다시 품에 안아 가슴에 묻으신 분입니다. 그 품이 아름다워 예수는 사도들을 통하여, 그리스도인들을 통하여 거듭 새삼 부활하고 있는 것입니다. 돌봄이란 그런 것이지요.

땅은 어머니입니다

그 어머니와 같은 마음을 하느님의 자비로 다시 노래한 성인이 있습니다. 빙엔의 힐데가르트입니다. 그분은 생명을 품어내는 땅을 통하여 하느님의 강생 사건을 표현합니다.

땅은 동시에 어머니입니다.
땅은 모두의 어머니입니다.
모두의 씨앗들이
땅에 보듬겨 있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땅은
모든 촉촉함과
모든 푸르름과
모든 발아시키는 힘을 보듬고 있습니다.
땅은 너무도 다양하게 풍성한 결실을 냅니다.
이것은 정말이지, 단지
인류에게 기본이 되는 재원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아들의 실체까지도 꼴지어 줍니다.

힐데가르트는 땅이 생명을 품어내는 것처럼, 마리아 역시 하느님의 생명인 예수님을 품어내었다고 말합니다. 하느님의 자비가 마리아를 통하여 이 땅에 열매 맺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리아를 땅의 마리아(terra maria)라고 불렀습니다. 여기서 땅은 곧 예수님을 수태한 마리아와 닮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녀를 통하여 하느님의 생명이 우리에게 왔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하느님 말씀의 그릇이 되었고, 이렇게 생명을 주는 여성적인 특징이 교회 안에서도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여성 신비가, 발언하다

힐데가르트는 독일 라인강 유역의 신비가이며 ‘창조영성의 어머니’라고 불릴 만큼 생태주의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유명한 성인입니다. 그녀는 1098년 라인 헤센지방의 베르머스하임의 귀족집안의 막내딸로 태어났습니다. 이미 3살 때 특별한 ‘환상’을 보기 시작하였고, 8살 때 그녀는 여성 은둔자인 유타 폰 스폰하임에게 위탁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수도원들이 한창 늘어나던 때였는데 900년에 70개였던 수녀원이 1250년에는 500개나 되었습니다. 어린 소녀들은 수녀원에서만 읽고 쓰는 것을 배울 수 있었는데, 힐데가르트는 유타에게서 성서를 읽고 시편으로 기도하고 노래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교재가 제한되어 있었던 터라 그 모두를 가슴에 새기고 입에 달고 살았다고 해야 하겠지요.

유타의 죽음이후 1136년 그녀는 급속히 성장한 수도공동체의 지도자로 선출되었고, 1148년경에는 빙엔에서 루퍼스 산 위에 수도원을 건립하였습니다. 또한 1165년에는 이 수도원의 지부를 아이빙엔(Eibingen)에 세우게 됩니다. 그녀는 마치 마리아와 마르타의 결합체인 것처럼, 활동적인 많은 일을 해가면서도 끊임없이 명상생활에 몰두하였는데, 그녀가 43세 되었을 무렵인 1141년 극적인 환상체험을 합니다.

그 소리는 “네가 보는 것을 글로 적고, 네가 듣는 것을 말하라!”는 것이었지요. 이를 거부하자 병을 얻어 눕게 되었는데, 이 부르심에 응답한 뒤로 병도 낫고, 그후 10년에 걸쳐 <쉬비아스>라는 책을 쓰게 됩니다. 그후 <책임있는 인간>, <세계와 인간> 등의 책을 더 썼으며, 81살에 죽기까지 77편의 시와 노래와 36 점의 그림, 보석치료와 자연치료에 관한 의학에 관한 책과 당시의 정치인들과 성직자, 신자, 백성들에게 올바른 삶에 대한 300통에 가까운 편지를 남겼습니다.

설교가, 수도원장, 그리고 치유하는 예술가

힐데가르트는 수녀였으나 수녀원의 정원에 조용히 묻혀 지냈다기 보다, 서신교환을 통해서나 공적인 연설 등을 통해서나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매우 적극적이고 활동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녀의 글들은 당시 신학자에 비견될 만한 명료함을 지녔으며, 그녀는 수녀원에서 뿐만 아니라, 저자거리에서도 공공연하게 설교하였습니다. 그녀는 당시의 세상을 돈과 위선이 지배하며 파괴가 자행되는 세상으로 규정지었으며, ‘성스러운’ 로마가 이에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교황에게 보내는 글에 쓸 정도였지요. 이는 그녀가 정치적으로도 뛰어난 식견을 지니고 있음을 알게 합니다.

수도공동체를 관리하고 운영하는 그녀의 능력 또한 뛰어났습니다. 수녀원을 이끌어 나가며 그녀는 신성로마황제 프리드리히 바르바롯사에게서 특별히 수녀원을 보호받게 하는 편지를 받기도 하였지요. 또한 그녀가 설립한 수녀원의 근대적 양식의 건물은 위생적이며 실용적이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것을 기반으로 하여 수녀원에서는 훌륭한 많은 사업들이 전개되었죠. 그녀는 수녀원에서 어머니이며, 현명한 지도자의 역할을 수행했으며,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그녀를 찾아오는 수많은 사람들을 축복하고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녀는 병자와 가난한 자들을 특별히 돌보았고 사람들이 건강한 삶을 누리도록 도왔습니다.

한편 힐데가르트는 예술가로서 만다라를 연상시키는 그림들을 남겼으며, 특별히 병든 이들을 치유하는 데 관심을 쏟아서 약초 등 자연요법을 개발하였으며, 보석을 통한 치료법도 발견했지요. 특히 음악과 규율을 통해 정신분열 치료를 시도하였다고 합니다. 치유는 하느님이 인간에게 준 본래의 힘을 회복하면 얻어지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이는 비밀스런 종교적 마력이 아니라 사랑 가득한 어머니다운 돌봄의 힘으로 병자를 치유하려는 것이었지요.

이러한 차원에서 시도한 것이 음악이었습니다. 인간은 천상의 존재와 천사들과 함께 합창하도록 지음받은 존재라고 믿었던 힐데가르트는 작곡을 하지 않거나, 노래하고 시편을 송독하거나 춤추지 않는 자는 하느님 찬양을 거부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녀는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은 율동감 있는 조화이며, 인간은 소리가 나는 악기라고 생각했지요. 음악을 창조자에게 화답하는 울림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땅을 비롯해서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은 아름다운 것이며 선하다고 보았던 힐데가르트는 여성을 낮추어 보던 가부장적 사회 안에서 ‘여성임을 자랑하라’고 수녀들에게 말합니다. 그래서 수녀들에게 하루에 한 잔 정도 포도주를 마시라고 권하면서, 얼굴에 돋는 홍조가 하느님이 주시는 생기를 느끼게 한다고 말합니다.

힐데가르트가 죽고나서 얼마 후부터 교황 그레고리 4세와 이노센트 4세, 클레멘스 22세 등이 그녀의 시성을 추진하였으나, 아직까지 승인되지는 않았습니다. 이 파격적 여성이 교회로선 여전히 부담스러웠는지도 모릅니다. 다만 독일 지역교회 주교들의 합의로 1971년부터 전 독일어권에서 매년 9월 17일을 힐데가르트의 축일로 정해 경축해 왔습니다.

역사적으로는 1664년부터 독일 마인츠 교구 성무일도와 미사경본에 9월 17일을 힐데가르트의 축일로 지내기 시작했으며, 1940년부터는 전 독일 성무일도와 미사경본에 힐데가르트의 축일이 올라왔습니다. 그녀가 죽은 뒤 833년만인 2012년 5월 10일,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힐데가르트를 성인품에 올리고, 같은 해 10월 7일 교회학자의 칭호를 부여했습니다. 

 

 

 

 


[출처] <그대 아직 갈망하는가>, 한상봉, 이파르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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